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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흥기” 학도병의 6.25 참전기
6.25 당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이 9.28 서울 수복을 계기로 패퇴하는 북한의 인민군을 섬멸하면서 북진을 할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민 흥기는 북한의 의용군에 용케도 끌려가지 않은 채 춘천이 수복이 되고 나서 하루는 뒷동산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군복차림의 군인이 문 앞에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7연대에 소속으로 전쟁 발발후에 소식이 없던 삼촌이 드디어 살아 돌아와서 어머니를 반갑게 붙들고 말씀 중이었다.
삼촌은 조카가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면서 몇 번이나 조카를 안아주며 대견해하였다.
삼촌은 후퇴를 하는 중에도 인민군과 수차 전투를 하다가 죽음 직전에 살아났다면서 이제 국군이 북진을 하고 있으니 삼촌과 함께 전선으로 가서 패퇴하는 인민군을 모조리 섬멸하고 압록강 국경에 태극기를 꽂자고 하셨다
흥기는 그러지 않아도 인민군이 마을에 와서 갖은 압박을 가할 때에 산에 가서 내내 숨어 지내면서 국군이 수복해 들어오면 군에 입대를 하겠다는 각오를 하였는데 삼촌의 그 말을 듣고는 바로 그리 하겠다고 대답을 하자 어머니는 너는 이직 나이가 어리니 이다음에 입대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자 삼촌은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었다.
“ 아주머니 아무 걱정 하시지 마셔요. 대한의 남아로서 이런 때에 군에 입대를 하지 않으면 생전 후회를 하게 됩니다. 제가 데리고 가서 훌륭한 군인을 만들겠습니다.”
삼촌은 그 말씀을 하시더니 3일간의 휴가를 맡았다면서 조카인 흥기에게 내일 모래 데리러 올테니 그때 같이 가자면서 삼촌댁인 거두리로 올라 가셨다.
삼촌이 가시자 어머니는 다시 흥기에게 지금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왜 삼촌을 따라가려 느냐 하시면서 절대로 안 보내겠다고 하시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흥기는 그래도 군에 가겠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생각을 하니 자기 주위에 있는 친구들 중에 아직 피란에서 돌아오지 않은 친구들이 생각났다.
흥기는 이 아이들이 있다면 함께 입대를 하자고 종용이라도 할 텐데 친구가 없으니 그것은 헛된 생각이었다.
흥기는 군대에 가기 전에 이모님께 들리기로 하였으니 혼자되신 이모님은 딸 하나를 데리고 사시는데 흥기를 남달리 사랑하시고 어떤 때는 방학 때마다 용돈을 두둑하게 주시면서 학생 때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하셨다.
흥기가 삼촌을 따라서 사흘 후에 군에 입대를 한다고 하자 엄마가 무어라고 하시더냐면서 이번에는 엄마의 말을 듣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그동안에 엄마가 이모님께 무어라 말씀을 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서 흥기는 어머니가 만류를 하시더라도 군에 가겠다고 하자 이모님은 남아로서 결심을 하였다면 나라위해 전선으로 나가는 것도 국민으로서 할 도리이지만 전쟁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니 각별히 몸조심을 하라면서 따뜻한 밥을 해 주시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자 이모님은 눈물을 흘리셨으니 조카가 입대 후에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러셨을 것이다.
이모님 댁을 나오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으니 한동안 소식을 모르고 있던 오 경희의 모습이었다.
그와는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기도 하지만 학교 다닐 때에는 스카우트활동을 함께 하였고 연극도 같이 하는 사이에 둘은 다른 어느 아이들보다도 친해졌으며 흥기보다도 경희가 적극적으로 흥기를 따라다니기를 좋아하였다. 경희는 집에서 떡을 하면 흥기에게 갔다가 주었고 흥기 또한 그렇게 경희가 살갑게 대하자 한 여름이면 개울가로 함께 나가서 물고기도 잡고 잠자리를 잡아서 꼬랑지를 달아서 시집을 보내게 되면 손뼉을 치면서 신기해하였다.
잠자리를 시집보낸다는 놀이는 잠자리 중에 눈이 커다란 호토의 암놈을 잡아서 긴 막대에다가 실로 매단 다음에 “ 잠자라 꼼자라 이리 오면 살고 저리가면 죽는다.” 하면서 휘두르면 날아다니던 수놈의 호토는 영낙없이 암놈에게 달려드는 것이니 그때에 이놈을 붙잡은 후에는 암놈의 꼬리에 풀을 꽂은 후에 날려 보냈는데 이를 두고 시집보낸다고 하였다.
이런 놀이를 통해서 둘은 아주 가깝게 지났으나 중학교 진학을 한 후에는 띄엄띄엄 가물에 콩 나듯이 만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경희는 잘 모르는 수학을 오빠에게 배우고 싶다고 하여 몇 번 가르쳐 주었지만 흥기는 만날 집에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드리다 보니 그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를 못하였다.
지난해 그러니까 흥기가 고등하교 1학년으로 올라가고 경희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에 하루는 일요일이라서 흥기가 모처럼 금병산엘 가기 위해서 집의 대문을 나서서 마을을 벗어나다가 생각을 하니 한동안 만나보지 못하던 경희 생각이 났다.
흥기는 경희가 이따금 교회를 간다는 소리를 들은 바가 있어서 혹시나 하고 교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시간에 벌써 교회의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뒤에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교회를 빠져나오는 경희를 보게 되자 흥기는 앞뒤 가리지 않고는 이름을 불렀다.
“ 경희야. 여기 좀 보아.”
이날 흥기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경희를 보게 되어서 그런지 부르던 목소리가 꽤 크게 들렸던 모양이다.
뒤를 돌아보던 경희는 흥기를 알아보고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는데 그가 손을 흔드는 것은 처음이다.
“오빠 어쩐 일이야.”
“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혹시 교회에 오지 않았을까 하고 기웃대던 중이었어.”
“ 정말이야. 왜 진작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으면서.”
경희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 빛이 되어 있었으니 흥기를 만난 것이 그리도 좋았던 모양이다.
경희는 대뜸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 오늘은 공연히 마음이 울적하고 갑갑하기도 해서 금병산에 올라가려던 참이었어”
“오빠가 마음이 울적할 때도 있어.”
경희는 흥기를 보고 의아해 하더니 한참 만에 말을 하였다.
“ 나 오빠 따라갈까.”
경희의 말을 들은 흥기는 그러지 않아도 그를 만나보고 싶던 차였는데 이렇게 기회가 만들어졌으니 속으로는 얼씨구 하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약간 비틀은 말을 하였다.
“남자 친구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 웬 남자 친구는,”
“그럼. 아니야. 교회 다니는 여자애들은 남자친구 한둘씩은 다 있다고 하던데….”
“ 난 1년에 잘 해야 교회에 댓 번이나 나간다고 할까. 그래서 아는 남자애들도 별반 없는 편이야.”
“ 그 말 믿어도 돼.”
“그러고 보니 오빠는 나를 늘 색안경을 쓰고 보았구나.”
경희는 그 말을 하드니 방금까지 밝던 얼굴이 초저녁처럼 어두워졌다.
“아니야 내 말 취소.”
흥기는 경희가 금방 토라져 달아날까 봐서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 그러고 보니 오빠는 나를 떠보고 싶었지. 그렇지.”
“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구. 후후.”
“ 오빠의 진실을 이따가 따져 볼 거야.”
경희는 흥기가 한 말에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지만 바로 얼굴을 펴면서 말을 하였다.
“그럼 오빠 천천히 산을 향해서 먼저 올라가. 내가 곧 따라 갈 테니까.”
“ 어디를 갈려고 그래. 나를 놓쳤다가 도중에 호랑이라도 만나면 어찌 할려구.”“ 오빠. 지금이 고구려시대도 아닌데 웬 호랑이 이야기야.”
“ 그것은 네가 모르는 소리야. 요즘에도 너 같이 예쁜 여학생이 산에 나타나게 되면 어디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날지도 모른단 말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오빠의 단수가 높아졌지. 하긴 오빠는 학교 다닐 때에 연극부에 있었으니까.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할만 해.”
경희는 그 소리를 하고는 휭 해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흥기는 경희를 만난 것이 우연이기도 하지만 집에서 잘 나왔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산 입구까지 가서 경희를 기다리다가 6학년 때 개교기념일을 기해서 학예회에 출연했던 생각을 하였다.
그때 흥기가 출연한 연극은 흥부와 놀부 중에서 흥부의 역할을 맡아 하였고 경희는 흥부의 마누라 노릇을 하였는데 흥부는 만날 형수인 놀부 마누라의 구박을 당하기가 일수였다.
“ 형수님. 오늘이야말로 큰 아이의 생일날인데 쌀이 떨어져서 그러니 쌀을 서 되만 꾸어 주셔요.”
“ 올해가 흉년이 든 것도 몰라. 농사가 되질 않아서 쌀을 한 됫박은 커녕 반 됫박도 줄 수가 없으니 어느 방안 간에 가서 방아확이나 훑어가.”
“ 형수님. 방아확에 남은 쌀 알갱이는 참새들이 다 쪼아 먹었지 내 차례엘 오질 않아요. 그러니 이번만 제발 사정을 봐 주셔요.”
“ 허허. 아무리 여기서 그 입을 나불거려도 쌀 한톨 줄 수가 없으니 어서 썩 꺼져 이놈아.”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놀부 형님이 호통을 치고는 침을 탁 뱉고 뒤란으로 돌아가자 흥부는 물끄러미 형님을 보다가 다시 형수에게 사정을 하였다.
“ 형수님. 그러면 형님 돌아오시기 전에 광에 있는 보리쌀 한 되박이라도 주시면 무쇠 솥에다가 물을 부어 보리쌀이 퉁퉁 불도록 불을 땐 다음에 먹게 되면 우리 열 식구 한 끼는 외울 것 같은데요.”
“ 하는 소리를 들으니 어디 가서 각설이타령이라도 하면 굶지는 않겠네. 어서 나가 그 꼴악써니 보기도 싫으니까.”
“ 형수님. 우리 애들 생각해서 좀 살려 주셔요.”
“시끄러워. 누가 애들을 그렇게 많이 만들라고 하였어. 어서 나가지 못해. 주걱으로 봍타구니를 후려치기 전에.”
“ 형수님. 정 그러시다면 밥알이 붙은 주걱으로 이 볼타구니를 때려나 주셔요. 주걱에 붙은 밥알이라도 뜯어 가지고 가게요.”
“흉년에 주걱에 무슨 밥알이 붙어. 어서 가지 못해.”
형수가 부엌문을 덜컹 닫는 바람에 흥부는 고만 뒤로 나가자빠지다가 흙탕물에 빠지고 말았다.
연극을 하게 되면 경희가 항상 끝나고 난 다음에 흥기의 출연에 대한 평을 하였다.
“ 오빠 형수에게 구걸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언짢았는지 눈물이 나서 혼났어. 학예회에 참석하신 어머니들도 오빠가 참 잘 한다는 소리를 하면서 무어라고 하였는지 알아.”
“어머니들이 무어라고 하였는데.”
“ 이다음에 오빠를 사위삼고 싶다는 말까지 하시더라니까.”
“ 설마.”
“그렇지만 오빠는 내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걸 명심해 알았지 .”
경희가 그 소리를 하자 흥기는 언제부터 저렇게 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한참 후에 경희가 헐레벌떡하면서 달려왔는데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보소소 나고 있었다.
“오빠 잊어버릴까 봐서 막 뛰어왔어.”
“호랑이가 따라오지 않던.”
그러자 경희는 오빠의 등을 탁 후리쳤다.
“ 아야야. 아프단 말이야.”
흥기가 아프다면서 상을 찌프리자
“ 세상에 그렇게 엄살하는 사람 여기서 처음 보겠네.”
눈을 흘기면서 경희가 하는 말이 너무 귀여워서 흥기는 저도 모르게 경희를 꽉 끌어안았다.
흥기는 어디서 그렇게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하고 나서 순간이지만 경희가 삐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경희는 놀라기는 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리는 바람에 둘은 그대로 낙엽이 쌓인 수풀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는지 둘이 함께 일어났을 때에는 경희의 이마에서는 영롱한 풀잎의 이슬처럼 땀방울이 빛나고 있었다.
“ 난 몰라.”
경희는 눈을 흘기면서 다시 흥기에게 매달렸다.
이날 이후 경희는 2.3일 간격으로 흥기를 만나자고 하였으나 부모님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흥기로서는 적극적으로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를 못하자 경희는 그때마다 오빠의 용기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흥기야 말로 경희의 간절한 요구를 다 들어주고 싶었지만 혹시나 아이들 간에라도 흥기와 경희가 좋아한다는 소문이 날까 그것이 두려워서 그를 피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경희가 만나자고 하는 이상으로 흥기는 매일같이 경희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고 동네 사람들이 뿔뿔이 피란을 갔다가 인민군에게 막혀 도로 집으로 들어와서 살았지만 쥐 죽은 듯이 살다가 국군이 수복을 한 뒤에야 허리를 펴고 살수가 있게 되었다. 흥기는 그동안 경희네가 피란을 갔다가 오지를 않아서 걱정을 하던 중에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경희네 집은 솟바리로 이모님 댁에서 30분은 더 가야 한다. 가는 길에 군 트럭들 수 십대가 일선으로 보급품을 싣고 가는 것 같았다. 경희네 집이 저만치 보여서 흥기는 자못 흥분이 되었으니 한동안 소식을 모르다가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싸리문 앞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나지를 않아서 혹시나 집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였는데 마침 경희가 한 다름에 달려 나와서는 집 뒤에 소나무 숲을 향하여 앞장을 섰다.
경희네 집 뒤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한쪽에는 나무토막으로 앉을 수 있게 의자가 놓여 있었다.
솔 내음이 듬뿍 풍기는 숲에서는 아름모를 새들이 날아다니고 밥을 짓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오고 있었다.
“ 오빠 어떻게 왔어요.”
“ 네 소식을 몰라서 애가 탔는데 언제 왔지.”
“ 홍천에 있는 일가 댁에 가서 피란을 하다가 사흘 전에 왔어요. 그동안 엄마가 편찮으셔서 오빠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지를 못했어요.”
“ 까닥 하면 못 볼 번 하였네.”
“ 왜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 나 내일 모레 군대에 가기로 하였어.‘
“ 오빠.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군대엘 간다는 거야. 가지 않으면 안 돼.”
“ 경희야. 지금 나라를 빼앗기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있는데 어떻게 남아로 태어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그래서 군에 가려는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음에 만날 때는더 예뻐져야 해.”
“ 다음에 만나자고? 혹시 또 피란을 가게 되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는데?”
“ 왜 못 만나.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그렇지만 경희는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울기 시작하였다.경희의 눈물을 보고 나니 그의 말마따나 그를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기도 하여 순간 군에 가는 것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미 삼촌과 약속을 하였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흥기는 울고 있는 경희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그를 안아주자 그는 돌아서면서 품에 안긴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저녁노을이 서산머리에 연 붉은 색깔의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답게 번지고 있었다.
드디어 삼촌이 오신 날 흥기는 기어코 삼촌을 따라나서긴 하였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거의가 다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기에 군에 입대하겠다는 마음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었다.
삼촌은 그때 포병부대의 선임하사였으며 흥기가 일단 삼촌을 따라나서자 어머니는 못내 아들의 손을 놓지 못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삼촌은 어머니에게 다가서면서 아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마침내 삼촌의 부대에서 찦차 한대가 와서 흥기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는 차에 올랐다. 흥기가 입대를 결정하고 부대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춘천 양구 화천지역의 학도병들이 모두현지입대자로 등록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 .나라가 위기에 있는데 애국에 불타는 소년들이 그냥 자기의 안위만 생각한다면 군에 입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이 대열에 나섰다.
이들은 개인 신상에 대한 조서를 기록한 다음에 중대장에게 신고를 하자 소년으로서 자원입대한 것을 환영한다면서 일일이 손을 잡으면서 격려를 해주었다.
나이 열여섯 살의 소년병으로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나름대로는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막상 군복이며 철모와 M1총이며 관물을 지급받고 나니 갑자기 눈보라가 치는 큰 산을 오를 때처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각오가 새로워졌다.
그때 학도병들은 뿔뿔이 각 소대에 배치가 되었는데 흥기가 속한 소대에는 고향이 전라도 정읍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의 아들인 함 동수가 있었는데 그도 민 흥기와 같은 나이로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입대를 하였단다.
얼굴이 둥글 넙적하고 말을 할 때에는 생글생글 웃는 상인 그는 흥기가 춘천 출신이라고 하자 자기는 아직껏 강원도의 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면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하였다.
흥기야말로 그의 인상도 좋으려니와 그가 생전 가보지 않던 전라도 정읍이 고향이라고 하여문득 백제시대 지어진 정읍사라는 시가를 공부하던 생각이 나서 동수에게 정읍사에 대해서 아느냐고 하자 그는 담임선생님이 해설한 가사를 오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면서 그는 장차 국어학자가 되어 고전연구를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 어기어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어기어차 어강됴리 ⁄
아이 다룡 디리⁄ 시장에 가계신가요⁄ 어기어차 진 곳을 디딜세라⁄ 어기어차 어강됴리 ⁄
어느 곳에다가 놓고 계시는가 ⁄ 어기어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어기어차 어강 됴리
이으 다룡디리⁄
동수는 눈을 감고 금방 그 가사를 오이고 있었다. 흥기는 동수의 두뇌가 영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네 머리가 참 좋다고 하자 동수는 그러냐면서 좋아하였다.
이날 이후 둘은 집안이야기며 부모님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동수는 지금은 잘 못사는 편이긴 하지만 자기가 자라면 무모님을 극진하게 모시는 효자가 될 것이라면서 그에게는 중학교 2학년짜리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미술에 소질이 있어서 장차 화가의 꿈을 꾸고 있다고 하였다.
그날은 모처럼 보초도 서지 않는 날이라서 둘은 저녁에 PX에 가서 소주 2병을 사가지고 와 서 같이 나누었는데 이날 동수는 흥기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너무도 엉뚱한 소리를 하였으니
그것은 자기의 매부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 야. 너 농담하냐. 네 동생이 지금 중학교 2학년이라면서.”
흥기가 핀퉁아리를 주자 동수는 정색을 하더니 말을 하였다.
“ 내 동생은 학년은 그래도 얼마나 숙성한지 지금 시집을 가도 넉넉하단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네 동생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오빠 마음대로 동생 시집을 보낸다구.”
“ 내 동생은 내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들으니까 하는 소리지.”
“ 야. 다시 그런 허튼 소리 하지 말아. 우리 들 사이에 금이 갈라.”
“너 지금 내가 한 소리를 허튼 소리로 들었다니 섭섭하다.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
“ 동수야 우리는 지금 전장 터에 나와 있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그런 소릴 하냐.” “ 왜 그래. 나는 너를 처음 만날 때부터 이 사람은 내 매부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서 엊그제 동생 사진까지 보내라고 하였어. 사진을 보게 되면 처남 소리가 저절로 나올걸. 하하.”
이날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임시 막사에서 자다가 총소리에 잠이 깨긴 하였지만 흥기는 간밤에 한잠도 자지를 못하였으니 동수가 한 말로 인해 경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 둘은 더 가깝게 자나면서 과자 하나라도 나누어 먹고 보초 교대를 하게 되면
같은 소대에 초년병으로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을 좋은 인연으로 생각을 하였으니 둘을 내놓고는 모두가 상관으로 만날 때 마다 부동자세로 “충성” 하는 구령을 천지가 떠나나가도록 외쳐야 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애국가의 소절처럼 두 초년병은 잘 때도 한 천막에서 자고 보초도 앞뒤로 교대를 하게 되니 며칠 가지 않아서 둘은 친 형제 간처럼 지나게 되었다.
선임하사님은 경상도 출신으로 말소리가 우렁찬 것으로 들렸으나 군 생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것을 들으니 철두철미한 성격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민 흥기와 함 동수 두 학도병이 속한 부대는 7사단 16포병연대로 입대 후에 기본훈련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바로 북진하는 국군의 대열에 올라 트럭에 실려 전선으로 향하는 중에 38선을 넘게 되자 흥기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으니 그것은 중학교 3학년 때에 춘성군 북산면 38선 인근에서 하루 밤 야영을 하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학교에서는 3학년 전학생으로 하여금 38선 인근의 부대를 방문을 하여 부대의 현황을 듣고 나서는 적의 진지 구축이며 수시로 남파되는 간첩들의 동향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적의 진지를 살펴보니 능선과 능선사이에 보초막이 보였지만 그쪽에서 움직이는 인민군은 보이지를 않았다.,
그때 느낀 학생들의 반응은 애국을 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도 않으려니와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는 일이야말로 남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제로 학도병으로서 자원을 하여 전선으로 향하게 되니 낯선 산천도 그렇지만 북한의 땅이 남한의 산천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를 일러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한다지만 우리나라처럼 산천이 아름답고 사철이 분명하며 사람들이 모두 살기가 좋다고 하는데 국토가 양분되자마자 북한이 동족에게 총을 겨누는 6.25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런 사람들을 어찌 동족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흥기는 북한의 마을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남한도 잘 못살지만 북한이야말로 남한보다도 더 못 살고 있다는 것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국군을 환영하는 인파들의 얼굴과 마을마다 걸려 있는 시뻘건 선전구호를 통하여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당시에 기수를 북으로 돌린 국군들은 트럭을 타고 탄탄대로로만 북진을 하게 되다 보니 후퇴를 미처 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은 넓은 도로를 피해 도보로 산골길을 택해서 쫓겨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패잔병과 북진하던 국군간의 교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더구나 패잔병들에게 보급품이 제대로 공급이 되지를 않자 그들은 민가에 들려서 밤중이고 한낮이고 간에 밥을 시켜먹고는 다시 산협으로 숨기에 바빴다
특히 인민군 패잔병들의 이동시간은 주간에는 유엔군의 비행기가 집중적으로 적의 진지를 폭격하고 인민군의 트럭에도 폭격을 가하니 그들은 주간에는 꼼짝도 하지 못하다가 야간에만 후퇴를 하였으니 이들의 비참한 잠행으로 인해서 동원된 민간인들은 더구나 생사의 길목에서 그들에게 붙들려서 죽을 고비를 맞았던 것이다.
이후 흥기와 동수는 포병으로서의 기초를 제대로 익힌 후에 포사격을 가할 때에 위치를 계산하여 연락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사실 6.25 초기만 해도 인민군의 전쟁장비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신무기를 사용한 반면에 아군들이 소지한 것은 일제가 쓰던 구구식 총이 유일하였다.
나중에 유엔군의 카빈총이며 M1소총이 국군에게 보급이 되었지만 전쟁 초기만 해도 국군들이 소지한 무기로는 전쟁을 치르기에는 숫자도 부족하였지만 구식이라서 전쟁의 효율성이 제대로 발휘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용감한 국군은 적의 탱크를 부수기 위해서 맨몸으로 돌진하여 수류탄을 탱크 안으로 집어넣어 폭발시켜 탱크의 길을 막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애국으로 뭉친 장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에서 울어난 충성의 징표였다.
더구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각처에서는 소년 학도병들이 군에 입대를 지원하였으니 세계전쟁사에도 이런 경우는 드문 일로 한국인의 애국정신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것이다.
당시에 본국의 소년지원병들의 숫자는 정확히 통계에 잡혀 있지 않다고 하는데 대략 그 규모는 3천내지 3천5백 명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본국의 소년지원병들의 희생자 수는 50년에 635명. 51년에 1131명 52년 357명 53년 341명이다.
학도병 전쟁사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사는 재일동포 학생 가운데에 국군이나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재일 학도의용군의 총수는 642명으로 5 차에 걸쳐 입국을 하였는데 이들은 인천 상륙 작전. 이원. 원산작전. 혜산진전투 백마고지와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135명이 전사하고 265명만이 일본으로 귀국하였다고 하니 그 외의 학도병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어린 학도병들이 조국의 위기를 구하고자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으나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 산화하였는지도 모른 채 숫자로만 남아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로서 정부와 국민들은 결코 이분들의 전공을 영원토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지금 이 나라의 어느 지역에서도 이 분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해서 위령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다.
자기의 목숨을 내던지고 전쟁에 참전한 소년병들의 위대한 애국정신을 계승토록 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에서는 교과서에 그 전공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수록하는 동시에 각 급 학교에서는 이분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함으로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
재일동포야말로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징용을 갔거나 갖은 감언이설에 의해 일본으로 돈을 벌려고 갔다가 광복 이후에는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 악 조건하에서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조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침략을 당한다고 하자 분연히 일어나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출전을 하였으나 그들 일부는 군번도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이 되었다.
이토록 애국에 불타는 학생들의 혈기에 대해서 부모가 말리고 형제가 말려도 그들의 불굴의 의지는 오직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겠다는 일연의 교육을 받았기에 들리지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 학생들이 불렀던 노래는 애국과 조국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하였다.
“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고구려 3천년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흥기야말로 이런 노랫말대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이었기에 삼촌이 권고를 하지 않더라도 그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하였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더구나 창창한 앞길을 바라보며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할 그들이지만 어찌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으며 더구나 가족의 품에서 선뜻 떠난다는 것을 어찌 망설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라사랑 정신으로 무장을 한 그들 앞에는 두려움이란 없었고 전선으로 나가서 적과 싸워야 이겨야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흥기가 소속한 부대가 어느 사단보다도 빨리 청천강 계곡을 북진하여 10월 23일 밤에는 희천에 돌입한 다음 다시 서쪽을 향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임부택 대령이 이끄는 7연대가 가장 선두에 진격하였다.
당시에 유재흥소장이 이끄는 2군단은 압록강을 제압한 다음 한만국경선을 감시하고 국토통일을 완수하려 하였다.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6사단은 수풍댐. 이 성기 준장이 이끄는 8사단은 만포진 방면을 담담케 하였다.
10월 24일 제 7연대 1대대와 2대대가 초산을 향하여 진격할 당시 북한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아군은 이들을 물리치고 판하동에 이르는 23시경에 중공군이 출현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10월 26일 인민군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적군을 물리치고 14시15분에 이르러 드디어 압록강 언덕에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태그마크가 선명한 태극기를 꽂았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란 말인가.
한만국경선까지 진출하는 최선진의 영예를 획득하였으니 이는 광복 이후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압록강까지 잠시나마 수복한 유일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적진에는 심상치 않은 긴급첩보를 받았으니 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을 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 한국군이나 미군들은 그러한 첩보를 받으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가운데 적군을 맞아 치열한 교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어린 병사들은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총을 쏘고 포를 갈겼지만 날아오는 적탄을 피하지 못하고 꽃잎처럼 떨어진 병사들이 많았으니 아! 전사에 길이 빛날 학도병들이여!
그대들의 전승에 빛나는 공적은 이 나라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국민들의 가슴에 빛나는 훈장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국군이 압록강의 물을 떠서 이승만대통령께 받쳤다는 소식이 전 국민에게 알려지자 길을 가던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서서 서로 마주보며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압록강에 대한 말이 나오기만 해도 마음을 설렜을 만큼 압록강은 겨레의 상징이요 한을 안고 만주로 떠나야 했던 독립군들의 눈물의 강이었다. 그 강물에 국군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손을 담갔을 때의 그 감격이야말로 지금까지 눈물과 슬픔의 고비를 넘기지 못한 겨레의 한을 씻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인민군을 물리치고 이제 우리가 지켜야할 국경이 압록강이 되었기에 더욱 그 기개는 천지를 얻은 것 같았다,
이 좋은 소식을 경희에게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으나 지금 어디에 가서 있는지 더구나 피란을 다시 나갔다가 들어 왔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더욱 그가 그리워지기만 하였다.
그 당시의 전선의 전투상황은 매일같이 치열하였는데 그 와중에 예상은 하였으나 너무 일찍 중공군이 한국군 진지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으니 군은 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더구나 눈앞에 다가온 통일을 붙들지 못하고 말았으니 땅을 치고 통곡을 한들 어찌 그 마음이 풀리겠는가.
우리나라의 국운이라는 것이 여기서 막히다니 군인들은 눈물을 훔칠 사이도 없이 한만국경에서 후퇴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흥기의 부대가 초산에 이르렀을 때에는 포알이 수도 없이 눈앞으로 떨어지게 되자 포병들은 M1 소총으로 적진을 향하여 무한히 방아쇠를 당기다가 세 불리하여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아군은 총알이 뿅뿅 머리 위로 스치는 것을 의식하며 파하다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죽은 시체들이 발에 걸려 나아갈 수조차 없었다.
방금 전까지 고개를 숙이라고 하던 하사관이 나곤드라져 있는가 하면 그 위로 또 다른 병사가 겹쳐서 넘어져서는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조금만 더 가게 되면 구릉이 보여 기를 쓰고 뛰는데 바로 옆에서 함께 가던 동수가 으악 소리를 내면서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동수야. 동수야.”
이름을 부르면서 동수에게로 가려고 하자 선임하사님이 어서 구부려 라는 소리와 함께 흥기를 잡아끌면서 달리는 바람에 흥기는 돌려다 볼 사이도 없이 도랑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동수를 살려야 하는데 하였지만 총 소리는 멎을 줄을 몰랐으니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흥기가 구릉에 엎드려 있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나는 게 없고 다만 나도 이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나갈 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뿐이었다.
얼마 후에 총소리가 멎어 겨우 수풀 속에서 고개를 들어 동수가 쓰러진 위치를 가늠해 보니 100여m 떨어진 곳에 동수가 여러 병사들 옆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엎어져 있는 것이 바라다 보였다.
“ 동수야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해. 동수야.”
흥기가 벌벌 떨면서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중얼거리자 선임하사님은 흥기의 어깨 죽지를 잡으면서 말을 하였다.
“ 전쟁터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수밖에 없고 동수뿐 아니라 많은 소대원들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났어. ”
그 말을 하던 선임하사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중공군의 추가 공격이 없는 바람에 이날 흥기는 그 전장을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 이날 흥기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으니 반수 이상이 전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동수의 전사 소식은 바로 일보에 올려 졌으며 동수의 전사통지서와 함께 유골함 (그 안에는 옷가지를 넣음)을 동수네 집으로 모셔가도록 명령이 떨어졌는데 운반의 책임을 민 흥기 일등병에게 맡겨졌다,
선임하사님이 동수와 가장 가깝게 지나던 흥기가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명이 되었다.
전라남도 정읍의 한 시골마을을 향해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탄 흥기는 정읍 정거장에 내려 다시 동수네 집을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마을에 도착을 하니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떨어져 있는 가운데 동수네 집은 야산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수가 자라면서 뛰어놀았을 넓은 마당에는 볏짚을 쌓아놓은 집 가리가 보이고 집 뒤에는 지붕을 훌쩍 덮을 만큼 살구나무가 동향으로 뻗어 있었다.
이른 봄이면 살구꽃이 함빡 피고 벌들이 윙읭 소리를 내며 날아다닐 때 아이들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하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동수도 그 속에서 소리높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흥기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동수는 흥기를 매부를 삼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삭아지기 전에 동수는 눈을 감았으니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비참하다는 말인가.
동수가 학교 다닐 때에는 1학년에서 6학년 까지 반장을 하였고 노래를 잘 불러서 담임선생님은 동수에게 선생님이 되라고 하였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던 생각이 났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지금 흥기는 그 다정한 친구의 유골함을 안고 그의 집을 찾아야 하는 얄궂은 운명에 놓였으니 생각할수록 그의 발걸음은 앞으로 나가지지를 않았다.
마침내 솔가리로 울타리를 한 싸리문을 가만히 열고 보니 다섯 간 들이 초가집으로 아래 윗방에 마루가 있고 사랑채가 달려 있는 집으로 마굿간에는 송아지가 한 마리 매어져 있었다.
어머니를 찾으니 방문이 열리는데 어머니가 문을 여시다가 유골함을 보고는 맨발로 뛰어나오면서 이게 웬 일이냐면서 통곡을 하시는데 뒤따라 나오시던 동수 아버지가 흥기 앞으로 다가서서는 아들의 유골함을 받으시었다.
어머니는 우리 동수가 정말 전쟁터에서 죽었단 말이냐고 하시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시는데 얼굴이 하얘지면서 그대로 쓰러지시었다. 흥기가 얼른 어머니를 부축해서 일어나시게 하려 하였지만 한동안 어머니는 꿈쩍도 하시지를 않으시더니 완전히 정신을 잃으셨다. 흥기가 어머니의 손과 팔을 주물러 드리자 한참 후에 어머니는 겨우 눈을 뜨시더니 “우리 동수가 죽다니 이를 어쩐디야.” 하시면서 다시 통곡을 하시었다.
“나라가 위급하여 친구들과 함께 학도병으로 나간다더니 이렇게 돌아온단 말이냐.”
동수의 아버지도 어머니 못지않게 탄식을 하시면서 엉엉 소리를 내시면서 우시었으니 흥기 또한 동수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골함을 열어보시더니 동수의 옷가지가 나오자 옷을 들고는 다시 동수를 부르시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동수는 좋은 친구이고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은 친구인데 이리 되었으니 얼마동안이 지나야 그를 잊을 수가 있을까.
흥기는 그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 지금도 ‘동수’ 어머니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애통해 하시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