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사는 무릉산 자락 신라고찰이다. 아버지께서 칠북 덕암마을에서 태어나 건너편 함안에서 제일 높은 작대산(청룡산) 오가며 호연지기 키워셨다.
고조할아버지 덕암마을 정착하신 이유 유추하면 작대산 자락 레이크휠스골프장 북면 무동마을에 고려말 이성계 조선개국 반대하셨던 박위장군과 함께한 동래현령 김가행 선조묘역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잡으신 것 같다.
조선개국 반대한 이유로 지리산 깊은 곳 거창 가조 대초마을로 몸을 숨기셨다 취수공 김수양 선조의 입신양명으로 무동마을에 묘역이 정비된 듯하다.
당시 교통상 거창 가조에서 창원 무동까지 멀어서 후손중에 자원하여 이거하신 분이 20세 감정공 희복 ㆍ용 선조 이으신 22세 봉장 할아버지 같다.
그후 23세 석구 ㆍ24세 달세 선조 독자로 계속 후손을 잇다 25세 붕ㆍ 곤 ㆍ홍 형제가 3분으로 자손이 번창하게 되고 붕 할아버지 직계후손이 석전마을에 집성촌 이루며 칠원종친회가 되었다.
동치 3년 1864년 28세 두현 할아버지와 29세 영택 호구단자가 남아 있고, 집안에 노비 2명 등재된 것을 보면 안정적인 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칠북 이령 선영에 입칠원 할아버지 상석 기록에 29세 영택 선조께서 올렸음과 1934년 30세 찬식 직계 할아버지께서 칠북 덕암마을에 사시면서 덕연서당 장의 직책을 맡아 석다례 올린 기록은 칠원 종손으로 부유한 재산은 가지지 못했으나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하신 것으로 보인다.
책만 읽었다는 찬식 할아버지의 지성과 대장금처럼 중리 상곡 한약사 집안의 기풍을 배워 시집와 침을 놓고 한약을 지어 가계를 책임진 성주이씨 호랑이 할머니의 헌신으로 지금의 우리 가계에는 친손들은 교육자로 성직자로 봉사하며, 외손은 약사와 의사들이 이어지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