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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삼층석탑[落星垈 三層石塔] 서울유형문화재 제4호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장군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일생을 바쳐 백성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백성들은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장군의 집터에 사리탑(舍利塔) 방식의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의 낙성대라 이름 하였다. 화강암으로 된 삼층석탑은 1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4.48m이다.
강감찬 생가 터(낙성대)[姜邯贊生家(落星垈)]서울기념물 제3호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이 태어난 곳. 강감찬이 태어난 고려시대에는 금천(衿川)이라고 불린 곳으로, 원래 여기에는 그의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한 사리탑식(舍利塔式)의 삼층탑이 있었다. 이곳을 낙성대(落星臺)라고 부르게 된 연유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 마침 이 고을을 지나던 중국 사신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상히 여겨 관원들을 시켜 그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 보도록 하였더니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는 것이다.
강감찬(姜邯贊:948∼1031)은 본관은 금천, 초명은 은천(殷川)이다. 983년(고려 성종 2) 문과에 장원하고 곧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침입해 왔을 때 모든 조신들이 항복을 주장하는 가운데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뒤 국자제주·이부상서·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고, 1018년 (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다시 40만 대군으로 침공해오자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나가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다음해인 1019년에는 물러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대파시켰다. 훗날 마을 사람들이 강감찬이 태어난 옛터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의 생가가 있던 곳에 ‘낙성대’라는 글자를 새긴 기념비와 사리탑식의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정기를 없애기 위하여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었으며, 탑 안에 있던 보물도 모두 훔쳐갔다고 한다. 또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고, 탑 주위에 있던 병풍 바위와 선돌바위까지도 부수어 놓았다고 한다.
1964년 탑을 보수하고 1972년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하였다. 1973∼1974년에 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안보(安保)의 의표로 삼게 하고자 출생 유적지를 정화하여 낙성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그 경내에 새로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원래 이곳에 있던 석탑을 옮겼다. 그리고 그 옛터인 여기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이곳이 강감찬이 탄생한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안국사 경내에서는 1988년부터 강감찬 장군의 호국정신과 위업을 기리는 추모제향으로 낙성대 인헌제가 매년 10월경에 열린다.
사적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賂首) 형태로 되어 있으며, 1972년 5월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호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낙성대를 보호하기 위해 1964년 석탑이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뒤 1973년 11월부터 안국사라는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삼층석탑을 이전하였다. 또 녹지와 공원시설을 갖추어 1974년 6월 10일 지금의 낙성대가 조성되었다. <출처;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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