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홍성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홍성에서는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경부터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연행된 주민들은 홍성경찰서 상무관에 며칠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용봉산으로 끌려갔다.
주민들 목격담에 따르면, 당시 홍성 쪽에서 트럭 1~2대가 용봉산 입구로 사람들을 실어 왔으며,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 이틀 뒤 두 명의 여성이 포함된 수십 구의 시신들이 목격되었다. 희생사건은 용봉산 이외에도 행산리 이동부락 뒷산에 위치한 폐광(금광굴)에서도 있었다. 인민군은 7월 12일 홍성에 진입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의 후퇴 시기에도 주민피해가 발생했다. 홍성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60여 명이 1950년 9월 27~28일 유치장, 월산리 등에서 살해당했으며, 10월 2일에는 홍성읍에서 물러난 인민군 패잔병과 좌익이 갈산면으로 들어와 주민 3명을 살해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이 홍성지역을 수복하자 홍성경찰서는 1950년 10월 7일 공식 복귀하여 부역자 처리를 시작하였다. 홍성경찰서 유치장은 당시 8개 동이 있었는데 각 동에는 70~80명이 갇혀 있었으므로 모두 500~6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홍성읍뿐 아니라 홍북면, 금마면, 갈산면에서도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분류에도 불구하고 이들 상당수는 소향리 붉은고개에서 희생되었으며, 일부는 용봉산 절 입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붉은고개에는 큰 구덩이 3개가 있었으며 100여 명에 달하는 시신들이 매장되어 있었다.
홍성경찰서 외에도 각 지서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갈산면에서는 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남직희 등 6명이다.
결성면에서는 10월 4일부터 10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희생되기 시작했다. 희생지는 아홉골목쟁이 금광구덩이, 영장골 방공호, 공동묘지 위 방공호 등으로 아직 유골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광천면에서는 감금되었던 36명이 10월 8일 트럭에 실려와 담산리 중담마을 한복판에서 총살당한 후 담산리 금광구덩이(꿀꿀이봉)에 암매장되었다. 오서산과 광천 독배에서도 집단희생사건이 있었다.
구항면에서는 인민위원장 이금용 등 국군 수복 후 구항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오봉리 뒷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금마면에서는 감금되었던 5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 14일 화양리 안골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은하면에서는 갇혀 있던 50~60명의 주민들이 은하지서 뒷산 대천리 공동묘지 방공호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이중 8명이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장곡면에서는 장곡지서와 산성출장소에 의해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장곡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장곡면사무소 맞은편 곡물창고에 감금되었다가 가송리 배밭 교통호, 장곡초등학교 뒤 방공호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산성출장소로 연행된 주민들은 산성리 하천변 모래구덩이, 덕골에서 희생되었다. 덕골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학살이 있었는데, 1차 7명, 2차 2명이 희생되었다. 산성리 하천변에서는 50여 명이 희생당했다.
홍동면에서는 200여 명의 주민들이 홍동지서 옆 곡물창고에 감금되어 지서장의 지휘 아래 조사 및 분류되었다. 이들은 송월리 모래강변, 월현리 금광구덩이, 홍동초등학교 뒷산, 홍동지서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송월리 사금을 캐던 모래강변에서는 1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월현리 석봉산 금광구덩이에서는 30여 명의 주민들이 총살되었다. 다른 곳의 희생자의 수를 감안하면 희생자 수는 150여 명에 달할 것으로 판단된다.
홍북면에서는 의용소방대 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50여 명의 홍북면 주민들 중 30여 명이 대동리 뒷산 교통호에서, 10여 명이 동방송 골짜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홍성지역은 인민군 점령 당시 미군 전투기의 공격에 의한 주민피해도 있었다. 1950년 8월 29일 오전 11시 2대의 전폭기(F-80추정)가 장이 열린 광천읍 주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해 최소 4명이 사망했다.
이상 홍성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