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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이사야서8장1~11절
제목: 어려울 때 함께하는 진정한 친구
● 기독교는 어려울 때 진정한 주님(the Lord)이 돼 주시는 하나님(God)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기쁠 때에만 하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믿는 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에만 하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믿는다면? 어려울 때에는 어떤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어려울 때 진정한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갑에 돈이 있고 우리의 손에 술이 있고 우리의 마음이 즐겁고 기쁠 때 함께 하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일 수 있지만, 우리가 어렵고 궁핍할 때(in need) 함께 하는 친구는 진짜(indeed) 친구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몸과 마음은 매우 어렵습니다. 진정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성도가 살아나갈 수 있는 이유는 어려울 때 진정한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어려울 때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길거리의 가난한 분을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만약 그의 몸이라도 튼튼하다면 그 가난한 분은 아직 진짜로 어려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이 어려우면 마음이 힘들어지고 믿음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최악의 고난을 당한 자는 욥인데, 그는 가족과 재산과 친구를 다 박탈당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마저 약해졌습니다. 믿음마저도 없어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그의 탄식은 오늘의 본문 사8:1과 관련 있습니다.
사8: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
욥19:15.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23.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
위 구절을 보면 욥이 형제와 친구를 잃고 건강도 잃고 믿음도 잃은 것으로 보이는데, 묘한 구절이 보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언동을 하면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代贖者)가 살아계시니”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욥의 믿음이 밑바닥까지 낮아지고 하강했을 때 순수한 신앙이 올라오고 상승한 것이라고, 묵상자는 봅니다. 그 대속자는 나의 눈에 보일 것이고 최악의 상황 속에서 어려워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하지 않는 야속한 자들을 공격하고 형벌 내리실 것입니다. 내가 혹시 죽어서 육신을 떠난다고 할지하도 나의 대속자는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고,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던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란 말입니다. 서부 영화에 나오는 컨셉 중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이 있습니다. 악당들에게 실컷 구타당하고 고문당하고 망신당했지만 최후에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로 그 적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마지막에 서있는 사람(last man standing)이 주인공입니다. 대속자가 이 땅 위에 서시게 될 것을 고대(苦待)하고 예언한 욥의 믿음은, 어려울 때 진정한 주님(the Lord)이 돼 주시는 하나님(God)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쓰는 한자 단어 ‘고대’(苦待)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다려요? 대속자이며 심판장 되시는 분을요! 욥19:27을 토대로 참 믿음을 설명한다면, 내 눈으로 대속자 겸 심판장 되시는 분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언젠가 나중에 라스트 맨 스탠딩과 함께 서 있을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인 사8:1에 나오는 ‘마헬살랄하스바스’(급히 빼앗으리라)의 뜻이 어렵지요? 히브리어를 잘 모른다면 영어성경(NASB)이라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Swift is the booty, speedy is the prey. |
노략질(약탈행위)이 신속하고, 희생도 신속하다(묵상자 직역). |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하니까? 무슨 신비한 비문 같고 심지어는 주문처럼 보이지만 영어성경으로 보면 그 뜻이 위와 같이 명확합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사8:8에 연결됩니다. 우리가 어린 양으로 알고 인자하신 주님으로만 알던 임마누엘께서,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영적으로는 신약교화의 성도들인 우리를 괴롭히는 이 악한 세상을 전쟁으로 공격하신다는 것입니다.
● 묵상자가 예화나 비유를 들면 저의 경험과 가치관이 어쩔 수 없이 개입됩니다. 이는 묵상과 설명을 더 잘 해보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일 뿐입니다. 언제나 묵상자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독자 각자가 성경을 직접 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일부 서부영화에는 구약의 복음과 비슷한 내용들이 조금 있습니다. 신비주의나 극단적 세대주의에 오염된 분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고 구약은 율법∙신약은 복음이라는 도식만 밀어붙이겠지만요. 구약에 복음이 분명히 있고 특히 이사야서에는 무지 많이 있습니다. 주변 강대국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고 고난 받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임마누엘)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 날개를 펴시는 것(사8:8)은 이스라엘에게는 복음이고 소망이 되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 강대국에게는 심판이 되고 죽음과 피격(被擊, 공격을 받음)이 됩니다. 신약성경의 구조도 똑같습니다. 문자적 이스라엘만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우리 신약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께서는 성도들을 괴롭히고 공격하던 이 세상이 피격당하고 희생자가 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구원자와 심판자로서의 양면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온전한 신앙입니다. 서부영화에는 조금 유치하고 희미하게나마 구약과 비슷한 복음의 특성이 나온다고 했지요? 서부영화의 주인공은 영화 초반부터 악당들을 처치하지 않습니다. 뜸을 들이면서 눈을 찡그리거나 지긋이 뜨고 악당들의 악행을 묵묵히 지루하게 지켜만 봅니다. 그러다가 악당들의 악(惡)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모든 상황이 파악됐을 때… 그때부터 주인공은 모습이 돌변되어 가차 없이 악당들을 원샷원킬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스타일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영화가 셰인(Shane)인 것 같습니다. 남자 주인공 셰인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으며 눈매가 선하고 온화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착하고 평범한 농민 부부의 집에 유숙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그 농부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의 악행을 목격하고 급기야는 자신마저도 린치(lynch)를 당합니다. 영화가 후반부에 가면 주인공 셰인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는 최고의 총잡이이고 정의의 사나이입니다. 주인공의 본색이 드러날 때, 농부와 선량한 자들에게는 악당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지만, 악당들에게는 피격과 심판이 일어납니다. 사격으로 악당들을 모두 제거한 셰인은 농부의 어린 아들이 이별의 안타까움으로 계속 목청껏 소리 지르는 자신의 이름 ‘셰인~ 셰인~’을 들으면서 말을 타고 떠나갑니다. 묵상자가 교양이 없고 인격이 성숙하지 못해서 다른 목사들처럼 고상한 예화나 에피소드는 못 드립니다. 그러나 셰인을 자세히 본 분들은 구약의 복음과 조금 비슷한 플롯을 느낄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신대원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된 분이 ‘야훼의 밤’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써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소설에는 맞는 말도 있지만 보수적 신앙과 그분의 가치관은 반대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저자는 ‘야훼의 밤’에 이스라엘은 해방을 받았지만 이집트의 장자들은 죽음을 당하고 그 여인들은 통곡을 했다는 것을 특별히 애써서 강조했습니다. 이집트 장자들의 죽음이 매우 애통하다는 그 목사의 세계관은 천국과 복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복음에서 온 가치관은, 이스라엘을 노예로 학대하고 이스라엘의 갓난 사내아이들을 죽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이집트 왕의 악행을 먼저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개념으로는 크리스천 성도들을 괴롭히고 죽인 그 만행을 보지 못하는 그 저자의 세계관은 이 세상의 생각에서 온 것입니다. 앞선 영화 셰인에서, 셰인이 정의의 심판으로 쏜 총에 맞아죽는 악당들이 가엾다고 여긴다면 뭔가? 이상한 사고방식 아닙니까? 복음은 성도들에게는 축복이고 악인들에게는 심판이 된다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마누엘과 어린 양이 성도에게는 복음이 되시고 세상과 악인에게는 심판과 처벌이 되는 시기가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의외로 빠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노략질이 신속하고, 희생도 신속하다 |
Swift is the booty, speedy is the prey. |
사8:8 임마누엘의 공격이 신속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영어성경은 형용사(swift, speedy)를 앞으로 도치시켜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신속한 공격을 개역개정은 ‘마헬살랄하스바스’(사8:1)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 요즘 성경이 참 좋아졌습니다. 문단 나누기를 적절히 해주고 문단의 소제목도 적어주고 있지요. 사8:1의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사8:3). 비싼 주석이나 신학서적을 보기 전에 해설이 있는 성경과 영어성경만 참조해도 본문의 뜻을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8:1~8이 한 문단으로 끝나고 8:9~15절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8:13입니다.
사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의 힘이 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는 그분이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도일지라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것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경탄의 고백을 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경외함을 받으실 분이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세상의 신학에는 모두 약점과 한계가 있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절대적) 속성을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중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단순성’일 것 같은데요. 초신자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속성 정도로 먼저 이해해 놓으시면 되겠습니다. 사8:9는 단2:34~35와 맥을 같이 합니다.
단2: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든든히 의지할 반석(盤石) 돌이 되지만 세상에게는 우상을 파괴하는 돌이 됩니다. 앞서 욥기에서 대속자는 욥에게 소망이 되시지만 다른 자들에게는 심판장이 되십니다. 영화 셰인에서의 주인공 셰인은 선량한 농부 가족에게는 친구가 되지만 악당들에게는 응징자(punisher)가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으로 서 계시는, 온전한 신앙생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사8:16~22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의지하고 준수하라는 권면입니다.
●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보면 임마누엘은 총 3회 등장합니다.
이사야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위 3 구절 중 사7:14와 마1:23은 같은 말씀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의 임마누엘은 뭔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성탄절 아기 예수님의 부드러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사8:8 이하의 임마누엘은 심판의 무서움도 느끼게 합니다. 이 무서움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서 기초하는 것이라고 묵상자는 봅니다. 그 절대적 속성이 잘 나타나는 구절은 사8:13입니다. 의인이 어려울 때 성도가 어려울 때 임마누엘은 그들에게 진실한 친구가 되어 주시고 대속자(代贖者)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기고만장 할 때 악인이 흥왕하고 활개 치는 것이 극성에 이를 때, 임마누엘은 심판장이 되어 악인들에게 어려움과 징벌을 주실 것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이중적 속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 신앙의 지혜이고 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합시다!
첫댓글 좋은 묵상의 나눔 감사해요. 하나님늘 경외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여호와를 경외히는 것이 모든 선한 일의 근원입니다.
읽고 작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t's a mercy of God.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에요.
그런 친구를 갖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의인, 신자들에게는 구원자이시지만 악인, 불신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자가 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속성을 잘 살펴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욥과 같이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괴로워할 때 진정 친구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욥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과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겠죠. 좋은 묵상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빛의 양면성과도 같은 것 같아요. 빛이 비치면 어두움은 소멸되어야 하는 것 처럼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라임이요? 그렇네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경외함에는 사랑과 무서워함이 잘 결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외할아버지 자랑을 하실 때 외조부가 사랑도 많고 위엄을 느끼게 하는 면도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빠처럼 친밀하지만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비공유적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을 가진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경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청교도 문학의 거장 존 번연은 거룩한 전쟁(Holy War)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God-fearer로 썼더라고요. fear로 썼는데. 우리 한국은 fear의 뜻에 respect가 첨가된 경외(敬畏)를 쓰니까 그 의미가 조금 더 풍성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