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4~15세기 체코의 신학자. 주요 저서로는 <교회론>이 있다. 중세에서 종교개혁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활동했으며,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론을 기반으로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에 섰다. 교황 등 로마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사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보헤미안 공동체가 탄생했으며, 그의 개혁활동은 약 한 세기 뒤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예고이자 그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415년 후스의 처형 후 그의 교시(敎示)를 받던 보헤미아인(人)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에 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농민·하층시민을 주체로 한 과격한 타보르파가 프시네츠의 니콜라이 니콜라우스, 얀 지슈카 등에 의해 형성되어 프라하시(市)에서 황군(皇軍)과 싸우고(1419), 독일 각지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그 밖의 이단자에 대하여>란 칙서를 발표하고 십자군을 발동하였으나 얀 지슈카에게 대패하였다. 1433년 이들의 신학적 핵심인 양형영성체의 의식은 인정하되 교리상 큰 의미를 부여치 않는 양측의 타협안을 담은 프라하 계약(compactara)으로 휴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강경한 입장이던 타보르파는 이에 반발하여 교전을 이어 나갔고 교황청은 온건파인 양형영성체파와 합세하여 이들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갔다. 결국 타보르파는 1433년의 리판(Lipan)대전에 대부분이 참수당하였고, 일부 생존자들이 게릴라성 전투를 간헐적으로 이어갔다.
타보르파를 궤멸시킨 뒤 승자인 교황청과 양형영성체파는 다시 평화협상을 진행하였고 1436년 7월 두 종류의 성찬식과 교회토지의 사회횐원, 안 로키카나를 대주교로 삼는 보헤미아 가톨릭 독립교회의 설치를 골자로 하는 이글라우 협정을 맺었다. 이후 후스파가 세력을 거의 상실하자 교황 비오 2세는 양형론자의 의식(儀式)을 완전히 폐지하여 1620년경 로마 가톨릭에 흡수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쿠트나 호라에는 이 전쟁 때 목숨을 잃은 개신교인 희생자들의 해골과 뼈로 장식된 '해골성당'이 있다.
좋은 영상 잘 시청하였습니다. 후스가 화형을 당한 만큼 그의 의로운 죽음에 분개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니 큰 일이 벌어지는군요. 위클리프의 영향력이 후스에게까지 이어지고 후스의 영향력이 독일 농민들에게, 그리고 루터에게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흐지부지하지 않고 화끈한 개혁을 이룬 후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네요.
첫댓글 얀 후스 Jan Hus
요약) 14~15세기 체코의 신학자. 주요 저서로는 <교회론>이 있다. 중세에서 종교개혁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활동했으며,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론을 기반으로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에 섰다. 교황 등 로마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사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보헤미안 공동체가 탄생했으며, 그의 개혁활동은 약 한 세기 뒤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예고이자 그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머지 내용은 어래 링크 참조하세요!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5h3192b
종교개혁의 예고편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신 개혁자이시군요. 잘 읽고 존경합니다.
후스 전쟁
1415년 후스의 처형 후 그의 교시(敎示)를 받던 보헤미아인(人)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에 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농민·하층시민을 주체로 한 과격한 타보르파가 프시네츠의 니콜라이 니콜라우스, 얀 지슈카 등에 의해 형성되어 프라하시(市)에서 황군(皇軍)과 싸우고(1419), 독일 각지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그 밖의 이단자에 대하여>란 칙서를 발표하고 십자군을 발동하였으나 얀 지슈카에게 대패하였다. 1433년 이들의 신학적 핵심인 양형영성체의 의식은 인정하되 교리상 큰 의미를 부여치 않는 양측의 타협안을 담은 프라하 계약(compactara)으로 휴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강경한 입장이던 타보르파는 이에 반발하여 교전을 이어 나갔고 교황청은 온건파인 양형영성체파와 합세하여 이들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갔다. 결국 타보르파는 1433년의 리판(Lipan)대전에 대부분이 참수당하였고, 일부 생존자들이 게릴라성 전투를 간헐적으로 이어갔다.
타보르파를 궤멸시킨 뒤 승자인 교황청과 양형영성체파는 다시 평화협상을 진행하였고 1436년 7월 두 종류의 성찬식과 교회토지의 사회횐원, 안 로키카나를 대주교로 삼는 보헤미아 가톨릭 독립교회의 설치를 골자로 하는 이글라우 협정을 맺었다. 이후 후스파가 세력을 거의 상실하자 교황 비오 2세는 양형론자의 의식(儀式)을 완전히 폐지하여 1620년경 로마 가톨릭에 흡수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쿠트나 호라에는 이 전쟁 때 목숨을 잃은 개신교인 희생자들의 해골과 뼈로 장식된 '해골성당'이 있다.
이외 내용은 어래 위키 백과 참조하세요!
https://ko.wikipedia.org/wiki/%EC%96%80_%ED%9B%84%EC%8A%A4
@노베 유럽은 종교전쟁이 발생하는 것이 독특하군요. 후스파를 위클리프파와 한 데 묶은 것에서 서로 영향을 받은 것이 느껴집니다.
@노베 좋은 내용 첨부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내용을 시청하고 교회사 내용을 알아 갑니다.
좋은 영상 잘 시청하였습니다. 후스가 화형을 당한 만큼 그의 의로운 죽음에 분개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니 큰 일이 벌어지는군요.
위클리프의 영향력이 후스에게까지 이어지고 후스의 영향력이 독일 농민들에게, 그리고 루터에게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흐지부지하지 않고 화끈한 개혁을 이룬 후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네요.
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