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豫感)에 관한 시
차례
예감 / 정희성
豫感 / 송수권
예감 / 류인서
예감 / 황규관
즐거운 예감 / 이강산
예감 / 정희성
울산에 가서 보았다
저녁 무렵
까마귀들이 어지럽게 하늘을 날다가
일제히 전깃줄 위에 내려앉는 것을
닥쳐올 어둠을 예고하는 천상의 악보 같은
동중정(動中靜)의 하늘
한가운데
전깃줄이 없다면
까마귀들은 어디에 가 앉을까
- 정희성,『흰밤에 꿈꾸다』(창비, 2019)
豫感 / 송수권
들파가 무더기로 피어나는 남녘 나라의 봄
하얀 꽃대궁이에 흘러내리는 햇빛
보면 눈물나리야
서역 만 리 大藏經 한 짐을 지고 와
義湘大師
이 강산 낭랑히 첫 經을 외듯
어쩌면 초록 제비들의 울음 소리도 들릴 듯한 날.
- 송수권,『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1983)
예감 / 류인서
왜 가슴보다 먼저 등 쪽이 따스해오는지, 어떤 은근함이 내 팔 잡아당겨 당신 쪽으로 이끄는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한 단락 흐린 줄글 같은 당신 투정이 어여뻐 오늘 처음으로, 멀리 당신이 날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 했습니다 우주로의 통로라 이른 몇 번의 전화는 번번이 그 외연의 광대무변에 놀라 갈피 없이 미끄러져 내리고 더러 싸르락싸르락 당신 소리상자에 숨어 있고 싶던 나는 우물로 가라앉아버린 별 별이 삼켜버린 우물이었지요 별들은 불안정한 대기를, 그 떨림의 시공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반짝임을 얻는 생명이라지요 벌써 숨은 별자리라도 찾은 듯한 낯선 두근거림, 어쩌면 당신의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더라도 부디 놀라지는 마시길, 단호한 확신이 아닌 둥그렇게 나를 감싼 다만 어떤 따스함의 기운으로요
- 류인서,『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 2005)
예감 / 황규관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제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
- 황규관,『패배는 나의 힘』(창비, 2007)
즐거운 예감 / 이강산
먼먼 석기시대엔 비둘기호를 타기도 했지만 광속의 세월에 이보다 더 느릴 수는 없으므로 무궁화호를 타고 장례식장에 가면서
어느 밤 타박타박 무궁화호를 타고 영등포 장례식장에 들러 너무 빨리 떠난 김 형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기억이며 또 어느 밤 남원의 상가를 다녀오며 무궁화호 계단에 앉아 덜커덩덜커덩 졸다 깨다 목뼈가 부러질 뻔한 기억이며
낡은 아궁이 같은 몸속으로 서리서리 얽힌 기억의 장작들이 피워 올리는 연기가 매워서
연기를 헤치고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제멋대로 걸음을 멈추고 담배 한 대씩 태우던 열차의 느긋함이 그나마 나를 주검 멀찌감치 부려놓았던 것이어서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듯 종종 주검을 향해 떠날 때마다 차라리 아주 느려서 끝내는 닿지도 못할 열차에 대한 예감을 은근슬쩍 즐기는 것이다
- 이강산,『하모니카를 찾아서』(천년의시작, 2020)
[출처] 시 모음 937. 「예감」|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