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공동서신이 있습니다. 공동서신이라는 명칭이 조금 낯설은 분도 있을텐데요.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가 공동서신입니다. 이 공동서신에는 믿음과 행함의 문제가 나옵니다. 이와 관련, 김병국 교수님의 설명을 구분선 아래에서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의 분류
신약성경을 이루고 있는 27권의 책들을 순서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권의 복음서, 역사서인 사도행전 13권의 바울서신, 히브리서, 7권의 서신서, 요한계시록 이중에서 요한계시록 앞에 위치해 있는 7권의 책들을 공동서신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가 그것입니다.
공동서신의 특징들
그 책들을 한 군데에 모아 놓고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름대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 서신들의 저자는 바울이 아닙니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 등 다른 사람들이 쓴 서신들입니다. 둘째, 서신의 성격도 바울의 서신들과는 다릅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묵직한 교리적 주제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반면 공동서신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과 관련된 윤리적 주제들을 주로 다릅니다. 셋째, 공동서신의 수신자들은 대개 특정한 개인이나 교회가 아니라 보편적인 성도들입니다. '대개'라고 단서를 단 것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 때문입니다.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요 1:1)이라고 특정되어 있습니다. 요한삼서의 수신자는 '가이오'라고 하는 개인입니다(요 1:1).
이 일곱 편의 서신들에게 공동서신(catholic epistles)이라는 명칭을 붙인 사람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cbius Pamphilus, 주후 260-340) 입니다. 참고로 '카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보편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문제
공동서신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 한 가지만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행함의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들은 신학적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주제들이 무거울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야고보서 2장 20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장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방법임을 주장하는 바울서신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바울서신과 야보고서
바울서신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당연히 갈 것 같은데 야고보서를 읽으면 믿은 다음에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서신들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충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행함은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선행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떤 외적인 표현을 말합니다.
김병국, 『신약성경 이야기』(도서출판 대서), pp.87~88.
첫댓글 내용이 조금 쉬운 것 같습니다.
공동서신 야고보서 말씀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바탕 위에서 이신칭의의 결과인 성화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핵심을 잘 짚으셨습니다. 좋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마지막 말씀이 갈등의 요소를 한방에 날려주네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할 때 그 행함은 어떤 선행의 개념이 아니라 믿음이 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외적인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붙어 있어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를 비난하는 다른 강도에게 예수님을 두둔하고, 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하며 믿음에 따른 표현과 행위가 바로 나왔듯이 말입니다.
짧고 분명한 글 잘 보았습니다.
네, 저도 그 부분에 주목이 가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공감과 격려에 감사합니다.
붙어 있되 분리되지 않는다는 표현에 공감합니다.
@에이프릴 공감합니다.
초신자는 물론이고 기성신자도 공동서신을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바울 서신과 공동서신의 비교를 보니 제가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러했습니다. 이신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고 구분되며 연속선 상에 놓여 있습니다. 연속과 통합 가운데에서 온전하고 균형잡힌 복음이 된다고 믿습니다.
@장코뱅 네, 잘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