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대왕 :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집권 6년2개월 76세)
이성계는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로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3년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또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수도를 물색 케 하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 숭유 억불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 새 도읍지 한양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자 무학과 정도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운다. 일차적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건립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다시 한양으로 변경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왕이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인 1101년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일찍이 도참사상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도선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 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고려왕조는 이를 염려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북악산 남쪽에 오얏(자두)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 버리게 했다. 즉 오얏李의 성한 기운을 없애 이씨가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양으로 도읍지는 정해졌지만 궁터만은 쉽게 정하지 못했다. 하륜은 모악산 아래 지금의 신촌으로 무악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대왕은 남으로 향하는 법이지 동향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면서 북악산 아래쪽을 극구 주장했다. 이에 무악은 화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궁 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 낼 수 있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채택하여 북악산 아래에 왕성을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 먹는다는 전설의 동물인 해태의 석상을 경복궁 앞에 세웠다.
정도전 :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꿈꿈. (1341년 경북 영주출생, 62세)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동문수학 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자 역성혁명을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인 136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그 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다. 1375년 이인임 등 친원세력과 맞서다가 나주 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 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고 그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 그러나 정도전의 이같은 노력은 사병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 되는 것을 두려워한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도 죽임. 방석의 나이16세.
무 학 :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수있다는 확신을 심어 줌. 1327년 경남 합천 출생. 79세. 천문지리와 음양도창설에 밝았고 해몽 술에 능함.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 개국의 주체 이면서 그 기득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임.
■ 조선 왕조 ■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간도)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이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원주민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호적을 만들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한다. 당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으로 밀려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자춘은 이러한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 위화도회군과 4대 불가론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데다 철령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려를 명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여 그 해 4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5월에 위화도에 당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 4대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리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고 주장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해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조민수가 차기 왕으로 창을 내세우는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아홉 살인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한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하고, 공양왕을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