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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자의 가정으로 위로 두 명의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 후 어머니 줄리아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앤디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1949년 졸업을 하면서 뉴욕 시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쌓았다.
1950년 (22세)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 부문에서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Art Director's Club Award)를 수상하고, 상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지만 동시에 주문주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림을 수정 하느라, 사생활에서는 대인 관계에서 타격을 받은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단지 정확하게 비추는 TV 영상처럼 내면을 버리고 표층을 철저히 충실하게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곧 선에 잉크를 실어 종이에 전사하는 "브롯테드 라인"(Burottedo line)이라는 대량 인쇄에 적합한 기술을 발명한다.
1960년 (32세),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버리고 미술의 세계로 옮겨간다. '배트맨’, '딕 트레이시’, '수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지만, 계약했던 〈레오 캐스테리 갤러리〉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주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의 추구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는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바꾸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그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1961년 (33세),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 수프 캔〉이나 지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린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하여 작품을 양산하게 된다. 주제에도 대중적으로 화제가 풍부한 것을 선택했다. 마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곧바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의 최고의 스틸 사진 초상화를 잘라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대량 생산을 계속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의 화재의 신문 보도 사진을 사용했다.
1964년(35세)부터는 뉴욕에 《팩토리》(The Factory)라고 하는 스튜디오를 짓는다. 팩토리는 알루미늄 포일과 은빛의 그림물감으로 덮인 공간이며,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것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이미징하여 만들어 졌다. 그는 여기서 ‘아트 워커’(art worker; 예술 노동자의 뜻)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 한다. 팩토리는 믹 재거(롤링 스톤즈),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르만 카포티(작가), 이디 세지 위크(모델) 등 아티스트가 모이는 장소가 된다.
1965년(37세),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이하 V.U.)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 한다. 워홀은 V.U.의 연주를 듣고 공동 작업을 신청해, 배우 겸 모델인 니코를 데려와 합류시킨다. 1967년 3월 발매한 그들의 데뷔작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 Nico)에서는 프로듀스와 자켓 디자인을 다루었다.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자켓은 유명해 졌다. 전위적 음악이기 때문에 앨범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이후 재평가되었다. 워홀은 V.U.의 악곡을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이용했다. 두 번째 앨범을 제작할 무렵에는 워홀과의 관계도 끝난다. 그들과의 관계는 영화 《루 리드: 락큰롤 하트》(Lou Reed: Rock and Roll Heart)에 그려져 있다. 또 워홀의 사후 멤버인 리드와 케일은 재결성해 《쏭 포 드렐라》(Songs For Drella, 1990년)라는 추모곡을 만들었다. (Drella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조합한 합성어이며, 워홀에 대한 그들의 인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1968년 6월 3일 팩토리 스튜디오의 직원 발레리 솔라나스가 스튜디오에 들어와 워홀을 총으로 세 발 쏘았다.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이 그의 양쪽 폐, 지라, 위, 식도를 관통했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으나 그는 그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솔라나스는 후에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한다. 1970년 〈라이프 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1972년, 닉슨의 방중에 맞추어 모택동의 포트레이트를 제작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창조한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 등이다.
1987년 2월 21일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22일,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였으며, 평생 독신이었다. 피츠버그 성 요한 침례 카톨릭 공동 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건너 맞은 편 언덕의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 미국 최대이다.
워홀의 작품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여자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화려한 색채 같은 도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마릴린 먼로나 앨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와 상품, 달러 기호 등 미국 사회에 유포하는 경박한 기호를 작품화했다. 고전 예술과 모더니즘 등과는 달리 그 도안은 풍부한 미국 사회를 구현하는 명쾌한 팝아트, 상업 회화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가지는 대량소비가 아닌 인류, 진부, 공허함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편성을 구한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나 대중이 매일 접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와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사고와 죽음의 이미지도 그려졌다.
그는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어리지 않고, 유명인을 연출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아크릴 물감 등으로 캔버스에 그렸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판화의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공판 인쇄인 실크 스크린 프로스세의 원리는 평평한 "프린트 고코"와 같은 것으로, 작가가 직접 인쇄에 종사하지 않아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기술이다. 그는 기계로 만들어 내듯 실크 스크린 작품을 찍어내는 아틀리에 《팩토리》를 마련하여 많은 젊은이를 고용하여 제작에 종사하게 했다. 한편, 같은 판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프린트를 늦추거나 잉크를 많이 쓰게 했다. 실크 스크린 모티브로 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는 만드는 초상화는 당시 고액을 받는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유명인이 자신의 모습을 프린트하기를 원했다.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제작 한편 1963년부터 1968년에 걸쳐 60편 이상의 영화도 다루었다. 그러나 실험영화 같은 작품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적다. 처음 공개된 작품은 1966년 《첼시 걸즈》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잠자는 남자를 8시간 동안 계속 비춰주는 《잠》(Sleep)(1963년)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똑같은 것"을 원했다. 끝없이 변화가 없는 영상은 보편적인 것을 테마로 한 워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하였고, 극 영화도 제작하였다. 뉴욕의 유명 호텔 "첼시"를 무대로, 각 객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임의의 2방만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여, 2개의 화면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계속 비춰주는 (도중 한쪽 스크린은 니코의 모습이 임의로 삽입된다), 《첼시 걸즈》(1966년)는 미국에서 출판에서 대히트를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전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조 달레산드로(Joe Dallesandro)와 우도 기어(Joe Dallesandro)를 주연으로 한 《악마의 죽음》(1974년)와 《처녀의 생피》(1975년) 등 공포 영화 감독도 시도하였다.
1928.8.6~1987.2.22
그가 태어난지 80년, 그가 사망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군요.
그렇지만 아직도 현대의 상업관련 디자인들 - 혹은 트렌디 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보면 그의 작품과 컨셉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상업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1962년 시드니 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트전(展)’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고 그 후 만화의 한 컷, 신문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1963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 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4년 9월,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팝아트전이 개최되었다. 주요저서에 《1970년대의 조망》 등이 있다
Ameryka?ski Indianin
Ameryka?ski Sło? - 1983
Beethoven (Niebieski)
Buntownik Bez Powodu - 1985
Buty - 1957
Mao #91
Bł?kitny Kot
Mick Jagger - 1975-76
Podwojny Elvis
로스앤젤레스의 화랑에서 열린 앤디 워홀의 첫 개인전이 끝난 다음 날인 1962년 8월 5일
남성들의 우상 마를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가장 인기있던 헐리우드 스타 마를린의 죽음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언론은 몇 주에
걸쳐 그녀의 삶을 소개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자 앤디는 마를린을
자신의 예술에 끌어들인다.
<마르린 먼로>- 초상화에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색이 밖으로 빠져 나오도록
(머리보다 노란색 면적을 더 크게 칠했고 붉은색은 입술 밖으로 번지는
방식) 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하나씩 독립적으로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유명인을 그리면 자신도 유명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두드러진 팝아트 예술가가 되기를 바랬던 앤디의 시도는 적중했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스타들의 초상화는 자연히 인기가 있었고 중개상들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클레오 파트라로 분장한 파란 리즈>- 흥행 성공한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영향으로
거리에는 온통 머리카락으로 앞이마를 덮고 짙은 눈화장을 한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모습의 많은 여성들 투성이었다고 한다.
미 대통령 케네디 암살 사건 이후 제작한 <재키 케네디>
여성들의 우상<엘비스>
가수<믹 재거> 250장 한정판으로 제작
배우, 작가<브룩 헤이워드>- 그녀는 영화배우들이 모인 파티에서
앤디 워홀을 대단히 칭찬하며 유명배우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팝아트- 대중적 영화, 공상 과학, 광고, 게임 기구, 언론에서 취급하는 배우, 가수, 정치가
등의 영웅들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이미 상업 미술에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마티스가 되고 싶다며
순수 미술에서도 성공하고 싶어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앤디 워홀은 이름이 알려져 미술계 사람들의 화실 방문이 잦아지자 그들이 올 때마다 서둘러
상업미술품들을 숨겨 자신이 순수 미술에 전념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면이 있었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갖은 방법도
불사하는 약삭빠른 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 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이다.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면 더 이상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주 새롱누 그림을
시도했는데, 이는 자신의 미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디자인과 같은 "시각적 감각"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화랑들을 자주 방문해 당시 예술가들의 동태를
살폈으며 무엇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늘 궁리했다.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하는데 열정적이던 그는, 미국 중산층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가장
대중적인 캠벨 수프 통조림에서 매일매일의 새로운 사건, 충격적 사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1면 기사로 눈을 돌렸다.
<찢어진 큰 캠벨 수프 통조림>- 앤디 워홀의 형에 의하면 어머니는 그들 형제에게
늘 켐벨 수프를 먹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199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 낙찰가
150~250만 달러를 훨신 넘는 352만 달러에 팔렸다.
<푸른 코카 콜라 병들> - 112개의 코카콜라 병을 가로 세로로 반복하여 대량 생산품의
기계적 이미지를 조형적 요소로 사용하였으며 동시에 병 하나
하나가 개별적인 물체로 존재하도록 조금씩 다르게 그렸다.
<메그의 남자> 캔버스에 아크릴
영국의 마가렛 공주와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얼굴을 마치 초상화처럼
그려 관객은 신문 표지를 재현한 것임을 알면서도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가 없었다.
<데일리 뉴스> 캔버스에 아크릴
신문의 앞, 뒷면을 함께 그렸는데 뒷면의 내용은
<에디 피셔 쓰러지다/여기 병원에 입원:로마에 있는 리즈>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가수 에디 피셔와 영화 배우 리즈 테일러 부부의 관계 악화로
그들에 관한 기사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인기 있는 두 스타의 붕괴 직전 부부관계를 주제로 그린 것이 의도이다.
앤디 워홀에게 막대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실크스크린이 그에 의해 처음으로 예술에 사용된 것은 아니다.
실크스크린은 원래 상업용으로 활자와 장식적 인쇄에 사용되었고 포스터를 대량 생산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앤디워홀의 실크스크린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특허처럼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예술이란 누가 시작했느냐보다는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두개골(182.9x203.5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1976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SACK, Seoul,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