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憶)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추억으로 산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살자니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적은 편이다. 사실 어떤 추가적인 성취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통상 치매에 걸리면 온통 세상을 즐거운 회상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매체에서는 장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여 성공한 예를 보도하면서 마치 일반적인 현상처럼 이야기한다. 주로 만학을 통한 학위취득, 공인 중개사나 손해 평가사를 비롯한 자격증 취득 등이 주를 이루는데 그중에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자신의 기능을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주려고 헌신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매우 아름답고 부럽기도 하다.
우선 부모 형제와 얽힌 추억이 어느 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친다. 장남으로 자라 동생들과는 제법 나이 차가 있어 함께 어울리며 뒹굴던 일은 거의 없다. 형을 항상 어렵게 대하던 동생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함께 놀고 웃던 기억이 별로 없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 후 바로 집을 떠나 서로가 가장 대화가 필요할 때 별로 접촉이 적었다. 그리고 군 생활에 매어있으니 집에도 자주 갈 수가 없어 마음으로만 생각하며 지낸 무심한 세월이었다. 그나마 남동생 하나는 서둘러 저세상으로 떠났고, 다른 하나는 유학이후 계속 미국에 거주하니 보다 젊은 시절에 함께하지 못한 회한이 아쉽기만 하다. 따지고 보면 형제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깊은 정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큰데 이는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그나마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자주 얼굴을 대했는데 나이 차가 있어 형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도 어렵게 생각하는 동생들이었다. 그들에게 육사에 다니는 형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러웠겠는가. 하지만 짧은 휴가 기간에나마 동생들을 데리고 다정하게 손잡고 즐거운 시간조차 보내지 못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막심한 후회뿐이다.
이제 와 아무리 서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누구나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가정교육을 담당한 부모의 책임이라고 본다. 그러나 부모님의 처지에서는 당시의 형편이 어려워 세심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이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린 면이 컸던 것이다. 교사의 박봉으로 대가족이 생활하기엔 애초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지난 60년대는 우리 가족에게 힘겨운 시기였다. 조부님에게서 물려받은 중농의 농토를 처분하여 선친의 군 징집에 관련하여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설상가상으로 친지에게 사기를 당해 졸지에 생계가 막막하였다. 누구보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할머니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다. 어렵게 구한 도시의 중학교 교사직을 구하신 선친 덕분에 겨우 생활을 하였다. 그나마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근면함과 성실성으로 가정을 꾸린 어머니의 힘이 아니었다면 더욱 고생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대부분이 힘겨운 가운데 가난을 등에 지고 살던 시절이었으니 서로가 누구를 탓하며 지낼 마음의 여유조차 사치스런 시절이었다. 그래도 가족과 친지 이웃 간에 훈훈한 정을 나누며 살던 그때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운 추억의 한 장으로 각인되어 있는지.
며칠 전에 여동생이 귀한 선물을 보내왔다. 섬진강 상류에 있는 「옥정호」 주변에서 채취한 쑥과 「계화도」 쌀을 혼합해서 만든 떡의 재료를 부쳐왔다. 그 옛날 시골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새 봄이 오면 들판에 나가 봄 나물과 함께 다량의 쑥을 뜯어 만드신 「쑥 국」과 「쑥 개떡」을 어찌나 맛있게 먹었든지 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요즈음 시절에도 이른 봄이 되면 아내는 오염되지 않은 새 쑥을 캐러 한 시간 넘게 이웃들과 걸어간다. 사서 먹으라 하면 출처불명의 쑥이라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떡을 좋아하는 취향을 잘 아는 여동생은 주기적으로 각 종의 떡을 보내온다. 거의 대부분의 아침 식사는 떡으로 대신할 만큼 좋아한다.
사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떡을 먹는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설이나 추석, 주기적인 제사, 시제 행사 그리고 동네의 혼수 날이나 회갑연, 이웃의 돌잔치 상으로 만든 떡을 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개인의 생일 떡도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시절인지라 가정에서 떡을 만드는 횟수는 적은 편이었다.
어쩌다 떡을 하는 날에는 떡 시루 옆에 앉아 익기를 기다리던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떡 방앗간에 가면 이어져 나오는 「가래떡」을 한 마디 잘라 건네주는 그 맛이 그야말로 제일 맛있는 순간이었다. 잔치 집에 다녀오신 할머니는 본인의 몫을 아껴 손수건에 싸온 떡을 손자에게 먹이는 사랑을 베푸셨다. 여하튼 집에서 떡은 특별한 날에나 가까이하던 별식으로 생각하면서 자랐다. 요즘은 문화가 바뀐 탓인지 이사를 오면 이웃 간에 떡을 돌리던 관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죽하면 군 생활을 하다가 휴가를 얻어 귀가하면 언제나 어머니께서는 검정콩과 찹쌀로 만든 일명 「소머리 찰떡」을 만들어 주셨다. 옛 시절 직접 논농사를 짓던 일을 회상하시며 별도의 논을 구매, 생산 된 쌀을 원료로 했던 떡이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오늘도 떡과 함께 추억을 노래한다.
더구나 전국 가지마다 특색 있는 상품이 눈길을 끈다. 강원도 지방의 「감자 떡」과 제주도의 「오메기 떡」, 서산 지방의 「한산모시 떡」 등이 대표적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백설기 떡」을 비롯한 300여 종류가 넘는다하니 세계적으로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재료와 모양과 지방에 따라 특성이 다른 종류가 즐비하다.
군문에 들어서면서 떡의 대용으로 빵을 주로 먹게 되었다. 특히 막 군복을 입고 고된 훈련을 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삼립 빵」과 「산도과자」에 얽힌 추억은 지금도 모든 동료들의 공통된 화젯거리다. 군장을 메고 구보(驅步)를 하면서 부근 공장에서 솔솔 풍기는 산도 과자 냄새는 그야말로 식욕을 자극하는 최상의 풍미(風味)였다. 휴일이면 빵과 산도 과자에다 코카콜라를 즐기던 일이 마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던 일처럼 다가온다.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훈련과 김포 공항 부근에서 공수 훈련을 하면서도 지친 신체를 위안해준 천상의 음식도 역시 마찬가지 종류였다. 사실 그 천금과도 같은 청춘 시절을 함께한 식품이 타인이 보기엔 하찮게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생명수와도 같은 인생의 동반자였다.
최근에도 어디를 가든지 길가에서 「술 빵」이나 「만두」와 「찐 빵」과 같은 제품들이 넘쳐나 그 옛날과는 다른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아직도 나도 가끔 호빵을 즐긴다. 한 겨울의 「붕어 빵」이나 「문어 빵」, 「찹쌀 모찌 떡」 등도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그런데 세상 이치는 참으로 묘하다. 딸이 미국유학 중 결혼하여 사돈을 맺은 분이 다름 아닌 빵 집(N제과점)을 경영하는 분이다. 딸도 평소 별명이 「빵 순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타고난 인연이다. 하지만 딸 가족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외손들도 본가가 유명한 빵집 인줄은 알지만 제대로 빵 맛은 모르고 살고 있다. 여동생도 농담으로 언젠가 빵 맛을 즐길 수 있게 딸 가족의 귀국을 바라지만 여러 사정으로 요원한 일이다.
어찌 보면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주 중에서도 식욕을 채우는 음식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충족의 수단이니 누구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임에도 종종 그 중요성을 잊고 지낸다. 그만큼 우리네 생활이 예전에 비해 풍족해진 것이다.
아무리 세태가 변해도 어머니의 손맛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울고 웃는 추억의 징표이다. 떡을 대할 때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이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정성과 따스한 마음이 녹아 있다. 그 자리를 어느 덧 아내가 자리하여 아이들에게 정성을 전하고 있는 중이다. 일부 재료는 언젠가 손녀와 송편을 빚기 위해 냉장고에 보관 중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포근한 손길이 꿈길에서처럼 천국으로 이끄는 안식의 역할을 한다. 항상 얼마나 그리운 어머니의 품 이련가!
(2023.5.17.작성/5.23.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