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란 시집 『아물지 않는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
<눈물의 이면>
A4 종이 서류 모서리에 눈동자를 스쳤다
원시림을 빠져나온
빗방울들이 내게로 왔다
밤새 그치지 않는 호우주의보
첫사랑, 첫출산, 첫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깜깜하고 어두운 혹독한 시절의 맛
나무는 어디에 많은 빗방울을 뭉쳐 숨기고 있었을까
아픔을 보듬고 따뜻한 흙빛으로 돌아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속말이 일시에 밀려왔다
보이지 않아 서서히 잊히는 것들과
보이는 모든 풍경의 비밀을 읽어내는 일
나무들의 이력을 겨우 정독하고 나서야
아픈 시야가 맑아졌다
처음 햇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돌담 위 담쟁이덩굴에 한동안 붙들려
내게로 오기까지의 경로를 생각했다
나이테보다 깊은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해묵은 나를 깨운다
눈을 다친 이후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품삯>
선원 월급 주는 날
지폐를 헤아려 가다
생선 비늘이 말라붙은 만 원짜리 한 장
돈을 세는 내 손가락을 붙잡고 만다
돈에다 빨간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멸치 두 상자’
긴박한 생이 화석처럼 멈춰있다
꼬박 달포를 바다로 나간다는 멸치잡이 어선,
아버지의 품삯으로 건네 온 비릿한 것들
경매도 부쳐지지 못한 채
어머니의 발품 행상으로 살림 밑천이 되었던 멸치
구깃구깃한 만 원짜리 한 장
누군가의 충혈된 눈동자를 거쳐
어부의 딸을 용케 알아보았는지
검게 탄 아버지의 얼굴로 찾아왔다
먹먹한 수평선을 건너오는 아버지의 바다
지폐 한 장에 몸을 싣고 위태로운 파도를 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