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방동을 아십니까?
내 고향 김해는 충절과 의리의 고장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인들 충절이 없고 의리가 없겠습니까만 김해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구석구석에 충절과 의리의 역사가 배여 있는 곳도 드물 것입니다.
동네 이름으로 그냥 무심코 부르는 삼방동. 동김해 지역에 있는 삼방동(三芳洞)은 지명 자체가 충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어방동 옆에 삼방동이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름이 비슷하니 서로 4촌쯤 되겠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방동과 삼방동은 사돈의 팔촌도 안 되는 다른 성격의 이름입니다..
어방동의 방은 신어천에 살고 있는 신어(신령스러운 고기)를 잡지 말라는 뜻의 막을 방(防)이고 삼방동의 방은 꽃다울 방(芳)으로 아름다운 이름이 빛난다는 뜻입니다.
삼방동 인제대학 후문 쪽 신어천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개울가 빌라들 사이에 기품 있게 지어놓은 재령이씨 재실이 보입니다.
이 재실에 모셔진 세 분의 충절로 인해서 삼방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삼방동 관천재(재령이씨 재실). 삼방동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씨 가문의 충신 효자 열녀 3분이 왜군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는 화를 당하였습니다.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동시에 나오기는 참으로 드문 일이지요.
3분의 꽃다운 이름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삼방(三芳)’ 이라는 동네 이름을 내려 당시 지명이던 판교동 대신 삼방동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동상동 롯데 캐슬 아파트 뒤쪽 분성산 중턱에 큰 기와집 보이는데 이곳은 사충단입니다.
사충단은 임진왜란 때(1592년) 때 김해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의병장 김득기(金得器),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유식(柳湜)선생을 기리기 위한 묘단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 대병이 김해성에 들이닥치자 성을 지켜야할 김해부사는 도망을 갔습니다만, 네 분의 선비들이 500명도 안 되는 김해고을 백성들을 이끌고 13,000명에 달하는 왜적에 맞서 김해성을 사수하며 며칠을 버티다 결국은 전원이 장렬하게 순국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의병이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는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불의한 외세에 저항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던져 조국에 바쳤습니다.
비록 세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불의한 곳에 서지 않았으며, 세력이 빈약하고 사세가 불리하다 하더라도 대의가 있는 곳에 함께 하였습니다.
절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 변절을 거부하는 고유의 기질을 가꾸어 왔습니다.
이러한 기질을 이어받아 일제 때 부산 감옥에 김해출신 독립운동가로 가득 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습니다.
특히, 김해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한글학자 한뫼 이윤재선생처럼 일제에 저항하다 형무소에서 생을 마친 분들이 많습니다.
변절을 거부하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예를 존중하는 김해인의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졸저, 정영두의 <끝이없는길>에 실린 김해 관련 부분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