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와 지내마을은 예부터 농사가 주업이었고 운촌 승당마을은 갯가로 어업을 주로 하였다. 현 해운대 여중·여고 일대인 지내마을은 못의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이 지역의 농업용수에 필요한 저수지를 축조한 후부터 연못 지 자를 따서 지내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구)해운대도서관 (현 해운대도서관 우동 분관) 자리에는 1천 3백 평의 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까지만 하여도 울창한 송림이었다. 이 도서관 부근 주택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아직도 몇 그루 남아 있다. 김해 김 씨, 김령 김 씨의 집성촌으로 김해 등지에서 임진란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 온다.
장지마을은 지금의 해운대고등학교 아랫쪽에 형성된 마을로 지내마을의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윗마을로 통하던 곳이다. 지금은 일반 주택지로 변해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이 곳을 흘러내리는 장지천의 장지유수는 해운팔경의 하나였다. 이 마을의 지명을 풀이해 보면 장지의 ‘장’은 ‘보리수나무’를 가리키며 ‘보리’라 함은 범어로서 ‘깨달음’의 뜻이며 ‘지’는 ‘지시와 가르침’의 뜻이니 즉 ‘불법을 펼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장지천에 빨래를 하고, 오른쪽 제일교회 종이 보인다. (1958년)
약 50년 전 장지마을 앞 신작로 길
장산국과 연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가야국 건국신화에 구지라는 지명이 나오는 데 장산국 건국의 터가 이곳 장지였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 동래부의 《동하면고문서》에 소개된<동하도로교량준천수지절목>(1792년)에 따르면 동래에서 해운대로 오는 길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동래 - 승당마을 - 수비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가다가 안승당마을의 둥근바위 - 장산자락에도 길이 나 있었다.
해운대공고 섧은 고개 - 못안마을 장지마을 장승거리 북쪽으로 좌회전 - 한적골(해운대고교) 옆 골짜기로 가면 양운초등학교 - 신성아파트 - 대천교(여기서 대천교는 지금의 대천교가 아니라 대천교 위쪽에 자리잡은 현 좌동교를 말함) - 동부·삼성아파트를 거쳐 장산마을로 올라가는 검문소에 도착한다. 검문소에서 한참 가면 좌동과 송정의 경계 지점인 우태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으면 내리, 기장으로 가는 지방도로로 울산방면으로 이어진다.
※설분곡 마을은 운촌마을 뒷산인 해운봉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우 2동 해운대공업고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지역으로 6.25사변 전까지만 해도 인가란 없었고 과수원이 있던 자리이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