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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30일...
용산에 맡겨둔 프린터가 10%의 실패 확률을 재끼고 수리에 성공했다.
나는 부랴부랴 카메라를 챙겨서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중학교 때까지 살던. 동심 가득한 신림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교량 위에서 내려다보니 비교적 맑은 물이 흐르고 문화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40여 년 전 저곳은 겨울에 간이 스케이트를 즐기는 공터였었다.
나는 저녁 신문에서 내일의 기온을 미리 보면서 온도가 낮기만을 기대하곤 했다.
(그래야 얼음이 얼고 스케이트를 즐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교량 위에서 호떡을 지져 팔던 금련이네(우리 집에 세 살던)도 있었고
다리 건너 신림당 약국 하는 명지 초등학교 친구네도 있었다.
또한 내 이마가 찢어졌을 때(놀다가 돌에 부딪쳐)
아버지가 단숨에 날 데리고 병원으로 간 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목욕탕 가던 날...
저 쪽에서 급히 굴러 오는 삼륜차를 보지 못하고 건너가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부르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한 기억도 되살아 났다.
(그때 아버지가 부르지 않았다면 육체와 분리됐을 것이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직진하다가 제일 끝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옛집이 나온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흥분했다.
이제 저 끝에 있는 <채움빌>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나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회전했다!
드디어 옛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에 층계를 만들어 2층으로 올렸다.
그때는 들어가서 왼쪽에 화장실이 있었고 우측에 펌프가 있었고 약간의 화단이 있었으며
조금 더 들어가 왼쪽에 부엌이 그리고 마루가 가운데 있고 좌우에 방이 한 개씩 있고
각 방에는 다락이 있었다.
이곳은 낮은 지역에다가 배수 시설이 잘 안 되어 있어서 비만 오면 잠기기 일수였다.
"킹"이라고 불리는 강아지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기억도 있고
엄마 아빠 골려 주려고 걸레에 물을 적셔서 오히려 방 안에다가 더 짜 넣기도 했었다.
두 분은 비가 공포였지만 나와 동생은 공포와 즐거움이 교체되는 모험의 나날이었다.
또한 연탄가스를 맡아 식구들이 거의 죽다가 살아난 적도 있었다.
엄마가 가까스로 집 밖으로 나가 동치미를 구해 오지 않았다면 모두 육체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나는 야구와 축구를 좋아해서 친구들이랑 편을 갈라 놀았다.
그 당시는 야구 글러브나 베트가 매우 귀했다.
그래서 부러진 야구 베트를 가진 친구 조차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드디어 야구 글러브를 사 가지고 오셨는데
가죽이 쌔무로 되어 있어서 공을 잡으면 손이 무지 아팠다.
거의 맨손으로 잡는 거와 같았다.
(나중에 왜 그런 걸로 사 왔냐고 물어보니 그게 제일 싸서 그랬다고 하셨다.)
구슬치기도 딱지 치기도 팽이 돌리기도 기본 메뉴였다.
엄마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말렸고 나는 필사적으로 집을 탈출했다가
혼날 일을 생각하며 얼굴이 하얘져서 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 이곳은 집이 드문드문 있었고 거의 허허벌판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언덕에서 흙으로 소꿉장난하며 놀다가
"황금 박쥐" "번개 아톰" "타이거 마스크" "마린보이" "요괴 인간"같은 만화 시간만 되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흑백 TV 앞에 앉곤 했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는 것도 기억나고 대연각 호텔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도 기억난다.
모두 흑백 TV가 전해줬던 추억들이다.
그리고 집 앞에는 동산이 있었다.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
거기엔 신림 초등학교가 있었고 아버지와 야구공 받기 하던 아지트도 있었고
엄마가 멀리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저 글씨 보이니?"하던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비가 와서 이곳에 웅덩이가 생기면 고추잠자리 왕 잠자리들이 날아오곤 했다.
특히 왕 잠자리를 보면 신을 만난 것처럼 흥분했었고,
그것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들곤 했다.
그러다 누가 꾀를 내어 암컷을 실에 매달아 날려서 유인해 잡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백이면 백 수컷들은 모두 이 수법에 걸려들었다.)
그 당시에는 이곳에 마땅한 초등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서소문에 있던(서소문에서 남산 그리고 남가좌동으로 이전한다.)
사립학교 명지 초등학교에 날 입학시키기 위해 동네 아이들을 모았다.
일정한 인원이 확보되어야 통학 버스를 보내 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벅찬 학교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황제였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줄 알고 있었다.
3학년 때 뭔가 마련하기 위해서 학급별로 돈을 걷을 일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을 때 손을 들었다.
(아버지는 국토 계획부의 비정규직 말단 사원이었다.)
그래서 일정 금액을 기부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다 이해하시고 없는 돈을 마련해 주셨다.
나는 조금 생각이 돌기 시작하여 돈을 낼 순간에 담임 선생님과 타협하여 약간 널 내었고
남은 돈을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노란 필통이 매우 갖고 싶어서 엄마 지갑에서 돈을 슬쩍해서 그 필통을 구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밝혀졌고 난 무지 혼났다.
그런데 학예회 때 글쓰기 대회가 있었는데 이것을 소재로 글을 썼다.
제목은 "노란 필통"이었다.
엄마와 함께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심어 나가며 이 글을 완성하였고 그 글은 "금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미술 대회에 나가면 항상 상을 탔다.
시간에 쫓기어 그리다 보면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왔고 나는 그럴 때마다 남은 물감들을
모두 도화지에 짜 놓고 손으로 문질러 대었었다.
이렇게 특이하게 하면 뭔가 주겠지...라는 계산이 있었고
내 계산은 틀림없이 맞아떨어졌다.
또한 여자 친구 앞에서 자랑한다고 물감 풀은 물을 냉수 마시듯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신림 초등학교가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다.
나는 먼 "명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당시 학군제였던 관계로 인해 "배재 중학교" "한영 고등학교"와 같은 먼 곳을 통학해야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특별한 동심을 심어 주셨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이곳에 올라와 먼 곳을 가리키며 엄마가 물었다.
"저기 있는 글씨 보이니?"
나는 보인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러면 눈 좋은 거야"라고 하셨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그날 저녁 우리는 키우던 닭은 잡아 닭조림을 해 먹었는데
닭을 잡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평소에 파리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하시는 분이다.
(아버지는 한쪽 귀가 안 들려 보청기를 끼고 계신데, 귀 근처에서 아른거리는 파리를 잡으려고
모질게 자기 귀를 때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셨다.)
파리는 유유히 도망가고 한쪽 귀의 청력을 잃으신 거다.
이런 분이 닭을 잡겠는가?
그러나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잡긴 잡아야 했고 그때의 표정과 동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만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나보고 닭 잡으라고 하면 난 못 잡는다.)
그리고 모기 장을 설치하고 잠자리에 들어가곤 했는데 설치 후 들락날락 하다가 아버지에게
혼난 기억도 있다.
눈오는 날 엄마가 어디 간 날....
오줌누고 있는 동생의 손을 뒤에서 비틀어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나는 동생을 진정시키려고 내가 아끼던 연습장을 모두 주면서
"하루 지나고 나면 날 거야"
부러졌다면 네가 말을 할 수 있겠니? 하면서 동생을 위로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엄마가 돌아왔고 근처에 있는 태권도장으로 동생을 데리고 가서 뼈를 맞춰 주었었다.)
야산이었던 이곳이 개간되어 많은 주택이 들어섰고 절도 들어섰다.
(절이 있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본다.)
나는 "무량사"라는 절에 들려 잠시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나갔다.
종이 가면을 쓰고 여기까지 단숨에 뛰어오르면서 "철인 28호" 흉내를 내기도 했었다.
그 당시 학급에는 만화를 유난히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철인 28호" "타이거 마스크"와 같은
만화의 주인공들을 그려 달라고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아버지는 "소년 중앙"이라는 월간 잡지책을 사다 주곤 하셨다.
만화 위주로 되어있는 "보물섬",
육영재단에서 나오는 "어깨동무"와 같은 잡지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책을 받아보는 순간 보물을 안은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꼈다.
(만화에 일일이 색을 입혀 가면서 즐겼다.)
공부도 아주 열심히 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전교 3등까지 해서 아버지로부터 자전거를 선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술 드시고 늦게 오는 날이면 늘 불안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아버지는 그러시다가 물난리 이후로 술을 줄이신 걸로 기억한다. )
그 당시 장욱제와 태현실 나오는 "여로"라는 연속극이 인기가 좋았던 시절이다.
코미디로는 "웃으면 복이 와요", "좋았군 좋았어"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노란색을 좋아했던 것 같다.
노란 필통뿐 아니라 노란 고무줄을 그렇게 좋아해서 많이 모았었는데
(그 당시 고무줄 총이 유행했었다.)
돋보기로 불을 붙이기도 했었고
햇볕에 오래 두어 영상을 찍어내는 원초적인 사진도 등장했었다.
또한 쉬는 시간마다 닭싸움을 했었는데 체구가 작고 날렵했던 나는 상대를 많이 자빠트렸다.
그리고 여자애들 틈에 끼어 공기도 했었다.
겨울에는 스팀에 도시락을 덥혀 먹으려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기도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연필 따먹기도 했었다.
자신의 연필을 튕겨서 상대의 연필에 맞춰 책상 밖으로 밀어내면 자기가 갖는 게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연극을 했었는데
나무꾼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엄마는 그 장면을 위해서 손수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나무 꾼의 대사는 그냥 "호랑이 못 봤냐고 했을 때" "저기로 지나갔다."는 대사였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지게를 손수 만들어가지고 온 학생은 나 혼자였다.
선생님은 어머니의 정성에 탄복했다.
나는 딱지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엄마는 공부 안 하고 삐뚤어질까 봐 상당히 경계하는 태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버스에 내려 집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저 쪽에서 엄마가 오고 있었다.
엄마 손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딱지가 쥐어져 있었다.
나에게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었다.
잠시라도 엄마가 안 보이면 불안했다.
엉엉 울었다.
나무 대문을 넘어 나가 엄마를 찾기도 했었다.
우리는 가난해서 사립 초등학교가 사실상 무리였다
겨울 교복 중에 옵션으로 있었던 두꺼운 오버코트도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수소문해서 졸업한 학생을 알아내어 그 코트를 구해다가 나에게 입혔다.
가방도 그렇게 마련해 주셨다.
학교가 남산으로 이전했을 때 "떢복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밀가루로 만들었는데 난생처음 먹어본 그 음식의 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친구들 몇 명이서 그것을 먹기 위해 점심때 몰래 담을 넘어 교문을 빠져나가
인근 식당으로 간 적도 있었다.)
그때 눈 오는 그 언덕을 기어 오르며 바로 그 코트를 입고 있었다.
엄마 몰래 모터보트를 조립해서 다락방에 숨겨두고
엄마 없는 틈을 이용해서 물에 띄우며 놀기도 했었다.
우리 엄마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했다.
자신이 옳다는 주관적 견해가 너무 강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에 조차 나는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이것은 점차 걷잡을 수 없는 반항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알게 된 비틀스에 빠지면서
내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엄마의 불안은 깊어갔다.
(엄마는 그때부터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그 후 우리는 홍대로 이사를 하였고
나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부터 51세까지 살게 된다.
(그 사이에 같은 동네로 한 번 이사를 가게 된다.)
이렇게 한꺼번에 쏟아지는 동심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시 처음의 위치로 돌아왔다.
나는 다리 아래가 궁금해서 어떻게 변했는지 보러 내려갔다.
작은 물고기들이 살만큼 깨끗한 물로 변해 있었다.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주인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물난리 때 함께 떠 있던 "킹"을 그 이후 없애려고(키우는 게 번거로워..)
먼 곳으로 가서 떨어뜨려 놓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어떻게 알고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개는 키우지 않겠다고...)
이 녀석은 그럴 일이 없어 보인다.
비둘기 들도 있었다.
걷기 좋게 길도 내놓았다.
저 위 쪽으로는 재래식 시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제는 건물식 상가로 바뀌었다.
편도선이 약한 나는 노상 엄마와 함께 병원을 들락거렸었는데
그 병원(삼성의료원)도 그 근처에 있었다.
유료 스케이트 장이 있었던 그 위치에 어린이 풀장이 들어섰다.
뭐 이렇다 할 것이 없는 게 사르트르의 "구토"를 방불케 하지만
나에겐 "동심"이라는 추억이 있기에 특별한 곳으로 남는 것이다.
이곳은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3등 한 기념으로 자전거를 선물 받아서 타고 놀던 곳이다.
늘 어머니가 곁에서 지켜주시곤 했다.
(스케이트 탈 때도 그랬었다.)
동심은 매우 강력하다!
다른 기억은 모두 사라져도 동심의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부모들에겐 이곳 신림동이 그리 좋지 않은 악몽으로 남을지 모르나
나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것은 바로 동심이 있기 때문이다.)
[명상법 22]
"지나간 일에 주의를 기울여라.
과거의 그대 모습을 회상하라.
그러나 그 추억에 휩쓸려 가지 말고
주시자가 되어 그 일들을 그저 바라보아라.
여기 차원의 변형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