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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수단입니까? 목적입니까?
성경 본문 : 잠언 22장1절-2절, 8절-9절, 22절-23절
설교 자 : 박 한서 목사 <2023년 10월 15일 주일 오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수단을 버리고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돈을 죄악시 하거나 물질을 백안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돈을 버는 일이나
물질을 모으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땅에 번창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고난을 받았던
<욥>까지도 모두가 잘 사는 부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떡이 전부는 아니지만
떡도 필요하다는 전제입니다.
떡이 인간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요소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가 떡을 부정하고 물질을 부정하고 오직 정신만을
강조한다든지 영혼만을 강조하는 종교라고 하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인정하고 물질을 버는
노동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된 곳은 대부분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또 이와 반대의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사도 <바울>은 단적으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물질의 위험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기는 하지만 그 만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한편에서는 물질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중적인 모습이 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질은 인간의 목표가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목적이 아닌 물질을 목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물질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경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소 교리 문답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고 다른 것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단이 되어야 할 물질이 목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적이 하나님에서 물질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많은 곳에서
물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물질을 조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갑부였던 <록펠러>는
세 가지의 기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기적은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가장 부한 자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가장 인색했던 자가 가장 많은 것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적은 55살의 이른 나이에 죽을 뻔 했던 그가
98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체험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돈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바꾸어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록펠러>가 돈을 목적으로 삼고 살았다면
그는 절대 이런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적과 수단이 제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이 제자리를 잡고
물질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제 자리를 잡을 때
우리들의 삶이 올바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잘 살고 있든지 아니면 잘 못살고 있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목적과 수단이 제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제 자리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정말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잘 살아도 목적과 수단이 혼동을 일으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삶을 절대 잘 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한 내용은
여러분들도 너무 잘 아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네 제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부자 청년이 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점은 그 청년에게
재물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단이 되어야 할 물질이 목적이 되어서 그것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도 못하니까 그 물질을 수단으로 바꾸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뒤바뀌어 있는 목적과 수단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수단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질문했던
그 중요한 영생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돈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돈을 많이 벌기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 되면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이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잠언> 기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잠언서>는 기승전결과 같은 논리를 가지고 쓴 말씀이 아닙니다.
한 구절 한 구절 꼭 필요한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22장 여러 부분에서
6절을 떼어서 잡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돈, 물질에 대한 말씀인데요,
<잠언> 기자는 돈을 목적으로 하는 자는 몇 가지
잘못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잠언> 22장 2절 말씀을 보면,
2절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도 있고 부한 자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자일 수 없고 모두가 가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다 똑같이
하나님이 창조한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이 인정을 받으며 똑같은 인격으로
대우를 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돈이 목적이 되니까
사람들을 돈으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자는 무시를 당하고
돈이 있는 자는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사가 되기 전 사업이 망해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예전에 살던 가락이 있어서
한 번은 너무 생선회가 먹고 싶어서 <서울>에서
유명한 일식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웨이터가 한 마디 탁 던지는 말이
‘여기는 중국집이 아니예요. 나가세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일식집을 나오면서 눈물을 삼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세상의 것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이 되었던 학력이 되었던 용모가 되었던 입은 옷이 되었던
어떤 것도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존귀한 존재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돈이 목적이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돈이 없는 사람은 무시를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조차도 돈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돈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잘 못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돈 때문에 차별을 받으면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차별을 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두 번째) 돈이 목적이 되다 보니까
약한 자의 것을 탈취하게 됩니다.
<잠언> 22장 22절 말씀을 보면,
22절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돈이 목적이 되다 보니까 인간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인데 거기에다가 약한 자의 것을
탈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사람이 소중하지 않고 돈이 소중하니까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돈만 많이 벌면 그만입니다.
돈을 탈취하는 것은 꼭 총칼을 들이밀어서 빼앗는 것만은 아닙니다.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악덕 사채업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방법이 되었든 약한 자의 것을 탈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돈이 목적이 되면 이런 일을 쉽게 하게 됩니다.
세 번째) 돈이 목적이 되면 악을 행하게 됩니다.
<잠언> 22장 8절 말씀을 보면,
8절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해 꼬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서로 헤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형제간에 서로 싸우고
부부간에 서로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먹는 음식물에 넣어서는 안 될 것들을
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구상에 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돈을 목적으로 삼고 살기 때문입니다.
돈이 목적이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죽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맨 날 허송세월 하던 백수건달이 어느 날 사이다 병마개를 따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신령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의 소원을 말하라...
어떤 것을 말해도 한 가지는 내가 꼭 들어주겠다.”
이 남자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결혼만 하면 무엇합니까? 함께 살돈이 없는데요.
이 두 가지 꼭 필요한데 한 가지만 구하라고 하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빨리 이야기하면 한 가지 같이 들리겠지.
그렇게 생각을 해서 빨리 말했습니다.
돈 여자. 돈과 여자를 달라는 것을 이렇게 빨리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드디어 이 남자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어떤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그 남자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는 돈이 목적이 되어서 온갖 악행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그 소중한 사람의 목숨이 경시되고 있습니다.
약한 자는 더욱 어려워지고 부한 자는 계속해서 부자가 되는
양극화가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가 올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수단으로 다시 돌아와서 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22장 1절 말씀에
1절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 되는 사람은 돈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돈이 제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목적으로 삼고 돈을 벌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돈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명예입니다. 또한 은총입니다.
<잠언>기자는
이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돈이 수단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선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잠언> 22장 9절 말씀을 보면,
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고 했습니다.
선한 눈을 가진 자가 돈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 되면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게 됩니다.
돈이 너무 좋아서 돈만 바라보다가
다른 것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애할 때는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 여자만 예쁘게 보이고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결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눈이 멀었다는 것인데
돈이 목적이 되면 돈에 눈이 멀어서
돈 밖에 다른 것이 보지 않게 됩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제대로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선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마저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돈이 문제가 되고
그래서 성경이 돈을 경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눈에 하나님이 보여야지
하나님이 안 보이고 돈만 보인다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돈이 수단이 되면 선한 눈이 되어서 볼 것을 보게 되고
그래서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수단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 주님 돈 밖에 보이지 않던 나의 눈을 떠서
선한 눈을 가지고 선한 일을 보게 하소서.
돈 때문에 가려졌던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돈이 수단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23절 말씀을 보면,
23절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약한 자를 신원하여 주시고
그 노략하는 자는 생명을 빼앗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는 약한 자를 우리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관심 갖는 자에게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주님이 도와주는 자를 우리도 도와주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돈이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돈을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돈은 수단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되고 돈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보야 하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플로리다>대학에 다니고 있는 <조지프 유테너>가 어렵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지만
늘 돈이 모자라 월말이 되면 쩔쩔 매곤 하였습니다.
그 여학생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오빠는 신학교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후원자가 있어서 덜 어려웠습니다.
남매간에 별 왕래도 없었기에, 오빠도 어렵게 공부하고 있었기에
생활비가 없다고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달도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어서 이제 내일까지
기숙사 비를 내지 못하면 쫓겨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짐 보따리를 싸다가 너무 답답해서
잔디밭 길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편지가 왔다고 전해주는 것입니다.
편지를 보니 오빠한테서 온 것입니다.
그 편지 속에는 안부를 묻는 짤막한 편지와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방값을 치르고는
오빠의 '때를 맞춘 사랑'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뒤로도 그녀는 가끔 기숙사 방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는 빵 살 돈이 없어 배를 곯기도 했는데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오빠가 때를 맞추어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런 일을 다섯 번째 겪으면서
그녀는 문득 긴장을 했습니다. 그 후 오빠한테 물어보았습니다.
내 형편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돈을 보냈느냐고.
오빠가 이런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후원자가 있는 나도 어려운데
너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어려울 때
너에게 돈을 보낸 것이다.
산다는 것이 그런 거 아니겠니?
내가 어려우면 남도 어려운 법이야,
사람은 다 같으니까 말이야."
그날 이후 이 여학생은 전도자가 되어 여러 곳을
여행할 때마다 이렇게 강조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목마를 때 남에게 물을 나눠 주십시오.
그들도 목이 마를 테니까요.
내가 배가 고플 때 남에게 빵을 나눠 주십시오.
그들도 배가 고플 테니까요."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여러분의 많은 상급이 쌓일 것입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백화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멀시> 백화점 앞에는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신 큰 석상’이 있어서 유명하다.
그런데 꼭 좋게 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백화점으로> 오라!’는
느낌이 자꾸 든다.
지금 <미국>과 <한국>은, 백화점이
꼭 예수님을 대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분, 과거에 우리는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 가서
안식과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백화점가서 안식과 평안을 찾습니다.
그래서 지금 백화점은, 사실 이단보다 더 무섭다. (더 영향력이 크다)
성도들 마음이, 교회 오는 것이, 백화점 가는 것보다 더 좋아야 하는데,
어느 시점부터 이것이 바꿔져, 백화점 가는 것이 더 좋다면...
신앙점검이 필요하다.
백화점에서 1~2시간 걸어 다니는 것에는 끄떡없고,
마냥 웃고 행복한 사람이 교회에서 1시간 앉아 있어도
힘들고 지쳐한다면... 그는 백화점교를 믿는 신자입니다.
주일은 교회에 나와서 말씀으로
위로받고 평안을 얻어야합니다
주일날 백화점이나 등산을 가서 위로받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맙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