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
김분홍 ∣ 파란시선 0060 ∣ B6(128×208) ∣ 138쪽 ∣ 2020년 7월 1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당신의 눈 속에 꽃나무를 심는다 마지막까지 모른다는 듯
“먼 곳까지 종소리를 산란하는 물고기는 얼마나 많은 지느러미의 시간을 소진했을까”(「풍경의 풍경」). 시인이 눌러쓴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들렸다. 여러 겹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다 보니 이해받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난청의 벽에 가로막히는 일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시인이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은 그 목소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시인은 “잘라도 잘려도/집요하게 문장은 자라났다”(「가지런한 불면」)라면서 불가항력으로 배태되는 말들의 행렬을 지켜본다. ‘다른’ 목소리들에 대한 시인의 수용은 곧 이질적인 타자들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말들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무수한 달의 뒷면을 지닌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해서 오롯이 이해될 수 없는 다중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막연한 슬픔이 떠오르기도 한다. 슬픔을 통해 김분홍이 다다르고자 하는 세계는 어떠한 장소일까. 우리는 그 실마리를 이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안의 목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시인은 다른 존재로의 변신을 마다하지 않는다. ‘분홍’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떠올리면 조금은 낭만적인 상상에 빠져들 법도 하지만, 이 시집은 낭만보다는 어떤 선홍빛 상처와 어울린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언제나 생각보다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남기고 있다. ‘거짓말에도 꽃이 피고 수선화에 초인종이 울리는 동안 당신의 눈 속에 꽃나무를 심는다 마지막까지 모른다는 듯’. 꽃나무를 심고 거기에서 꽃이 피어날 때까지 시인은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당신이 시집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쳤을 풍경들을 다시 읽어 볼 시간이다.(이상 안지영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김분홍 시인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고, 201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는 김분홍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김분홍의 시는 독자를 사물에 대한 매혹과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 방법은 “석류를 흠모하면 석류가 삭제된다”(「석류」)는 말에 요약되어 있다. 석류를 좋아하면 석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궁금해지고 석류가 감추고 있는 내밀한 세계를 엿보고 싶게 된다. 석류는 확실한 하나의 사물, 확정된 하나의 이름에서 미지와 혼란의 광활한 자리로 이동하여 기억을 끌어오고 감각을 활동시키고 존재를 무한하게 확장시키는 에너지가 된다. 석류는 사물이면서도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원피스」는 그 가능성의 세계를 경쾌한 반란과 리듬의 놀이를 통해 보여 준다. 걸음의 리듬에 따라 원피스가 물결무늬와 주름을 그리며 흔들리고 그 무늬들이 춤을 출 때 그것을 바라보는 느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는가. 원피스는 머리로는 다 알 수 없으나 느낌으로는 다 통할 것 같은 광활한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 되기도 하고 사물 간의 관계가 되기도 하고 에너지와 시공간이 어우러진 운동이 되기도 한다. 이 놀이는 어른의 사고에 붙들려 있던 감각을 해방시켜 아무것도 몰라서 더 자유로운 어린이의 활기와 생기를 회복시킨다. 사랑과 매혹에는 지루하고 평범한 사물과 일상을 처음 보는 것 같은 신비로운 사건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김기택(시인)
■ 시인의 말
야책 예르카의
해변에 딸기가 있다
딸기는 방이 많다
방문 앞에
하이힐이 있고 장화가 있고 스니커즈가 있고
잘린 발목이 있다
발자국들이 돋아나고 있다
■ 저자 약력
김분홍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201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원피스 – 11
수박 – 12
중이염 – 14
스캔들 – 16
석류 – 18
선조체 지우기 – 20
우리는 브로콜리 – 22
기념식수 – 24
전복 – 26
화살표는 악어가 되고 – 28
오데사 계단 – 30
반딧불이 – 32
흰 모자를 바라보며 – 34
걱정인형 – 36
제2부
아지랑이 서체 – 41
풍경의 풍경 – 42
거미집 – 44
복숭아 가지가 흔들릴 때 – 46
먹구름 레시피 – 48
가을 우물 – 50
자전거 타는 아침 – 51
내 손바닥 속 추전역 – 52
러닝머신 – 54
바다를 구독하다 – 56
가지런한 불면 – 58
옹달샘이 되어 – 60
스타킹에서 어망의 구멍을 탐색하다 – 62
제3부
좌초 – 67
복숭아의 계절 – 68
아령 또는 우리의 왕 – 70
노량진 – 72
옥수수 – 74
제습기처럼 – 76
사월의 방 – 78
볼트와 너트 – 80
천사의 나팔꽃 – 82
네펜데스 – 84
서울역 – 86
조롱에 관하여 – 88
곱창집의 기억 – 90
주령구를 굴리다 – 92
제4부
붕장어 골목 – 97
없다 – 98
무지개 – 100
시계와 시계꽃 – 102
항아리를 추모하다 – 104
저 가방은 출발하는 중인가 돌아가는 중인가 – 106
칸나 – 108
몸에 핀 개나리 – 110
우물 – 112
팔월의 케이블카 – 114
수선화에 초인종이 울리는 동안 – 116
초파리의 시간 – 118
나의 풍선 – 120
리아트리스 – 122
해설 안지영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굴러가는 걸까요 – 124
■ 시집 속의 시 세 편
우리는 브로콜리
샴쌍둥이가 등 돌린 사이라고 해서 풍경까지 돌린 건 아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못하고 쌓여 가는 관계라서
사막에 뿌리내린 변종을 꿈꾸는 바오밥나무
샴쌍둥이가 다리를 공유했다고 얼굴까지 공유한 건 아니다
우리는 일가를 이뤘기에
다종의 얼굴을 다중으로 교체한다
밑동 잘린 장대비를 수확하는
우기의 계절
다리 따로 머리 따로 떠도는 우리는
하나일까 둘일까
마음이 뭉툭해진 구름은 마블링을 넓혀 갈 수 없다
구름을 아삭하게 끓는 물에 데칠 순 없을까
질문은 대답으로 쌓여 간다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구름은
다리가 퇴화하고 머리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가채를 쓰고
황후의 두 얼굴을 연기한다
낱장으로 태어나지 못한 슬픔이 다발로 묶인다 ***
화살표는 악어가 되고
바게트에서 바리케이드까지 마그마로 만든 빵을 주세요
악어는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누워 있지 머리를 조아리고 매복 중인 화살표는 책동할 뿐 본성을 드러내지 않지
악어가 매복한 바리케이드는 늪
광화문 사거리에서 차들은 악어의 입 모양을 따라 움직이고 나는 화살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지
적신호에는
먼저 떠나간 속도가 있고 떠나야 할 속도가 없지
후진만 있고 직진이 없는
녹아내리는 회중시계가 매복 중인 악어를 발견하겠지
속도의 나들목에서
화살표는 악어가 되어서 닥치는 대로 통째로 삼켜 버리겠지
늪처럼 바게트에서 바리케이드까지 다 먹어 치우겠어
리허설이 없는 바닥
매복은 생존이지
●녹아내리는 회중시계: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 ***
풍경의 풍경
풍경에 묶여 흔들리던
당신의 물고기를 떠올린다
물고기 위에는 구름의 수심이 펼쳐져 있고
바람의 부레가 쪼그라들고 있다
풍경 밖으로 외출하지 못한 바람은 공중에서 한뎃잠을 자고
풍경에 묶인 물고기가
안에서 밖으로 종소리를 쏟아 낸다
먼 곳까지 종소리를 산란하는 물고기는 얼마나 많은 지느러미의 시간을 소진했을까
풍경이 바람을 풀어놓는다 그건 바람이 풍경을 가두는 일
흘러가는 종소리와 흘러오는 종소리 속에
죽은 물고기가 산 물고기처럼 위태롭게 몸을 움직인다
물고기가 짊어진 허공의 무게가 당신의 풍경일까
풍경 속에서 풍경 아래서
당신이 흔들리면
발이 더딘 종소리는 풍경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제 영혼까지 매달고 우는 물고기는
풍경 바깥의 소식을 풍경 안으로 물어 나르지 못한다
공중에 걸린 풍경 속에서
물고기는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간다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몸의 소리
당신은 누구도 듣지 못하는 풍경의 야생을 듣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