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론
정진권
가재는 눈도 있고 수염도 있어서 제법 그럴듯한 풍채인데 굼벵이는 눈도 없고 수염도 없이 그저 초라한 모습이다. 자, 여러분은 이렇게 된 연유를 아시는가?
옛날 어느 곳에 가재와 굼벵이가 서로 이웃해서 살았다. 그런데 가재는 수염이 있는 대신 눈이 없고 굼벵이는 눈이 있는 대신 수염이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이 위엄 있는 수염, 어험."
"이 밝은 눈은 어떻고?"
하며 서로 제 것을 자랑했지만, 가재는 굼벵이의 밝은 눈이 탐났고 굼벵이는 가재의 위엄 있는 수염이 부러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들은 그 수염과 눈을 바꾸기로 했다.
먼저 굼벵이가 제 눈을 빼서 가재에게 주었다. 가재가 굼벵이의 밝은 눈을 받아 달고 보니 세상은 더없이 환하고 저의 수염은 더욱 더 위엄 있게 보였다. 그래서 가재는 저의 위엄 있는 수염을 굼벵이에게 내줄 생각이 없어졌다. 굼벵이는 가재가 그 수염을 선뜻 내주지 않자
"왜 이렇게 꾸물대는가?"
하고 가재를 다그쳤다. 그러자 가재는
"눈도 없는 놈이 수염은 달아서 무얼 해?"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개미는 굼베이의 하는 짓과 그 당하는 꼴이 하도 우스워서 웃고 웃고 하다가 그만 허리가 잘록해졌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굼벵이란 놈이 여간 한심스럽지가 않았다. 아무리 수염이 부럽기로서니 눈을 주고 바꾸다니, 그는 저의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 수염이라는 것마저도 꼭 받을 수 있다는 아무 보장도 없이 제 눈을 덜컥 뽑아 주었다. 무지無知와 경박輕薄, 참으로 한심스러운 놈이다. 수백 번 세인世人의 웃음을 사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또 가재라는 놈이 참으로 괘씸했다. 아무리 새 욕심이 생겼기로서니 제 수염은 못 내주겠다니, 신의信義란 털끝만치도 없는 놈이다. 게다가 그 하는 말 좀 들어보라. 눈도 없는 놈이 수염은 달아서 무얼 하느냐구? 배신背信과 모순矛盾, 참으로 괘씸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수천 번 세인의 질타를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가재와 굼벵이 이야기를 듣고 이쯤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지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개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얄미운 생각이 펀뜻 들었다. 아니, 괘씸했다. 굼벵이의 무지와 경박은 허리가 끊어지게 웃어대는 놈이 가재의 배신과 모순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는가? 더구나 배신과 모순은 무지와 경박과는 달리 부도덕不道德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도 말은 고사하고 손가락질 한 번이 없다.
그렇다면 개미란 놈은 왜 그토록 편파작이었을까? 굼벵이의 무지와 경박이 하도 우습다보니 가재의 배신과 모순은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약간의 상상을 보태보자. 만일 굼벵이에게 예민한 촉각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럴 때도 개미란 놈이 그토록 편파적일 수 있었을까.
굼벵이는 처음부터 개미가 두려워할 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는 눈까지 없다. 그러므로 백번 웃어 주어도 보복당할 염려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재는 그렇지 않다. 옆걸음을 쳐도 눈까지 달았으니 숨을 수도 없다. 잘못 보였다가는 언제 그 예리한 집게발에 허리가 잘릴는지 모른다. 개미는 물론 이런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굼벵이의 무지와 경박을 비웃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가재의 배신과 모순을 질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다소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개미의 간악한 편파성을 꾸짖자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개미는 가재의 잘못을 질타했어야 한다. 보복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면 굼벵이의 어리석음도 비웃지 말았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는 더 꾸짖을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니, 앞에서 몇 마디 꾸짖은 것도 오히려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개미란 놈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나에게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다.
"이봐요, 정 선생. 내가 당신에게 보복할 만한 힘이 없다고 나를 매도하는 거요? 호랑이가 나처럼 해도 이럴거요?"
내 발이 저리니 어떻게 개미를 더 꾸짖겠는가?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出乎爾者返乎爾一孟子)는 옛말이 있다. 내가 개미를 꾸짖는 말이 나를 꾸짖는 말로 돌아오다니, 참으로 말의 어려움을 알겠다. 그럼 어찌할까? 호랑이를 꾸짖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까지는 개미를 꾸짖는 일을 삼갈 수밖에 없다. 적어도 공평公平이라는 것을 우리가 숭상해야 할 가치價値라고 믿는다면
정진권 (1934―2019)|수필가, 국어학자, 교수역임
저서|《비닐우산》《빙긋과쿡》《한국수필문학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