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2. 26.
외부생식기가 남자의 것이든 여자의 것이든 이게 경기력에 차이를 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테스토스테론 수치다
- 조안나 하퍼
소녀로 자라고 자기 성 정체성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여성이라면 설사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거나 간성(intersex)이더라도 여자 경기에서 배제돼서는 안 된다
- 아르네 융크비스트 & 조 심슨
▲ 2018 영연방경기대회 여자 육상 800미터 경기를 우승한 캐스터 세메냐(Caster Semenya) 선수. / AP=연합뉴스
지난주 태국에서 개막한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혼다 타일랜드에 참가한 미셸 위 선수의 근황을 소개한 신문기사를 봤다. 어느새 서른인 미셸 위는 “아직 최고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며 의욕을 보였다.
2001년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처음 LPGA 무대를 밟은 미셸 위는 2005년 프로로 전향하며 유명 스포츠용품 회사와 초대형 계약을 하는 등 화제를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성적은 시원치 않아(물론 기대에 비해) 지금까지 다섯 차례 우승했을 뿐이다.
미셸 위가 이처럼 부진한 데는 데뷔 초기 의욕적으로 남자투어(PGA)에 뛰어들었다가 좌절한 경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키 182㎝로 여자 선수보다는 남자 선수의 평균에 가깝고 팔다리도 긴 좋은 체격조건임에도 PGA에서 맥을 못 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을 텐데 호르몬도 그 가운데 하나 아닐까.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신체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키나 몸무게 같은 체격조건을 압도한다. 체격 차이가 아주 크면 모를까 웬만한 범위 내에서는 힘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밀린다. 테스토스테론은 근육량뿐 아니라 골밀도, 혈관, 심지어 혈액의 헤모글로빈 농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남성호르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남녀 차가 상당해 남성이 여성의 10~15배에 이른다.
여성 경기 출전 자격 강화
▲ 남아공의 육상 선수 캐스터 세메냐가 2016 올림픽 여자 800m에서 선두로 질주하고 있다. 세메냐는 남자 같은 외모 때문에 종종 성별 논란에 휩싸인다. 사진은 스포츠중재재판소로 향하는 세메냐. / AP-연합뉴스
그런데 미셸 위의 근황을 전한 기사 하루 전 신문에 또 다른 유명 여자 선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육상 선수 캐스터 세메냐가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내놓은 새로운 조치에 반발해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얘기다.
남자처럼 보이는 여자 선수로 유명한 세메냐는 여자 800m 종목에서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내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우승한다면 대회 3연패의 위업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IAAF가 세메냐의 앞길에 재를 뿌린 것이다.
지난해 11월 IAAF는 여자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테스토스테론 수치의 한계를 기존 10n㏖/L(혈액 1리터당 10나노몰. 나노는 10억 분의 1)에서 5n㏖/L로 강화했다.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7.7~29.4이고 여성의 수치가 0.12~1.79인 점을 고려하면 기존 10은 너무 느슨하다는 것이다. 다만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5가 넘는 여성은 일정 기간 이상 기준 밑으로 낮추는 치료를 받으면 출전할 수 있다.
그런데 남녀를 나누는데 겉모습보다도 남성호르몬의 수치를 더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기사에 따르면 세메냐 역시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성일 뿐이며 태어난 그대로 달리길 원한다”며 항변하고 있다.
사람을 남녀 성별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로 이제는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과학 역시 남성과 여성은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의 스펙트럼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남녀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해서 스포츠에서 남녀 경기를 구분하지 않을 경우, 엘리트 체육 현장에서는 여자 선수를 보기 힘들 것이다. 적어도 스포츠에서는 남녀 구별의 이분법이 ‘정당한 규칙’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규칙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여장남자가 여자 종목에 나가는 일이 가끔 벌어지곤 했다. 따라서 여자임을 확인하는 절차가 생겨났다.
1960년대만 해도 그 기준이 외부생식기의 형태였다. 즉 여자 선수들은 ‘전문가’ 앞에서 옷을 다 벗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수치심을 일으킨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1968년 멕시코 올림픽부터 염색체 검사법으로 바뀌었다. 즉 성염색체가 ‘XX’이면 여성인 것이다.
그러나 성별에는 성염색체뿐 아니라 태아 발생 시 자궁 내 환경 등 여러 요인이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최근에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 결과 세메냐처럼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여성은 치료로 수치를 낮추지 않는 한 여성 경기에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009년 비공개 검사 결과 세메냐의 경우 XX 염색체이고 여성 외부생식기를 지니고 있지만 놀랍게도 내부생식기는 남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누군가가 결과를 누설했다). 즉 자궁이 없고 고환을 지니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여성이 아니라 간성(intersex)이란 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주로 고환에서 만들어진다. 세메냐의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남성의 범위 내에 드는 이유다. 적어도 신체의 능력에는 테스토스테론이 미치는 영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고환이 있는 여성’인 세메냐가 크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경기력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도핑검사 항목이다. 몸이 만드는 ‘천연’ 테스토스테론과 합성 테스토스테론은 동위원소 비율이 달라 구분할 수 있다. 테스토스테론의 분자구조. / 위키피디아 제공
테스토스테론 수치 낮추자 기록 뚝 떨어져
지난해 7월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트랜스젠더(성전환자) 아마추어 육상선수이자 아마추어 스포츠생리학자인 조안나 하퍼의 얘기다.
1957년 사내아이로 태어난 하퍼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나 여동생의 옷을 입곤 했는데 커가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등학생까지는 농구선수를 하다가 물리학을 전공한 대학에서는 육상으로 종목을 바꿔 교내 스포츠 활동을 계속했다. 대학원에서 의학물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병원 방사선과에 취직한 뒤에도 운동을 계속했다.
성 정체성에 맞춰 성전환수술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이 경우 여자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된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200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트랜스젠더도 2년 이상 호르몬대체요법을 받으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 허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미 올림픽에 나갈 나이는 아니었지만 다른 대회들도 따라서 규칙을 바꿀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해 8월부터 하퍼는 호르몬대체요법을 시작했다. 즉 여성호르몬 에스트라디올과 함께 테스토스테론 차단제인 스피로노락톤(spironolactone)을 투여받자 가슴이 부드러워지고 털이 가늘어지는 등 신체의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마추어 육상 선수였던 하퍼에게 가장 놀라운 변화는 급격한 기록 저하였다.
하퍼는 호르몬대체요법으로 1만m 기록이 1~2분 늦춰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1년도 안 돼 무려 5분이나 늘어났다. 테스토스테론의 힘에 깜짝 놀란 하퍼는 관련 연구결과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의 사례가 예외인지 전형적인 경우인지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트랜스젠더 육상선수 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다수가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하퍼는 2015년 학술지 ‘스포츠문화 및 정체성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자 경기 출전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즉 1년 정도 테스토스테론을 여성 수준으로 유지할 경우 과거 남성이었을 때의 영향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남성호르몬 수치가 선수의 경기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하퍼는 “전형적인 남성의 하한선이 10이고 여성의 99% 이상이 3 미만이기 때문에 IOC의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 기준인 10 미만은 너무 느슨하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IAAF가 여자 선수의 기준을 10에서 5로 강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 트랜스젠더 육상 선수의 성전환 전후의 기록변화로 대다수가 크게 떨어짐을 알 수 있다(위는 하프마라톤, 아래는 5000m). 오른쪽 숫자는 성별이 바뀔 때 상대적인 능력 변화를 가리킨다. 즉 값이 플러스(+)이면 능력이 높아졌다는 뜻이고 0이면 과거 남자일 때의 영향이 없다는 뜻이다. 분석 결과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 / ‘스포츠문화 및 정체성 저널’ 및 ‘사이언스’ 제공
자신을 어떤 성으로 느끼느냐가 중요
그러나 모든 과학자들이 하퍼나 IAAF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즉 외부생식기나 염색체, 심지어 테스토스테론 수치조차도 남녀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메냐처럼 남녀의 특성이 혼재돼 있는 경우 본인이 스스로를 무슨 성으로 느끼느냐, 즉 성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설사 몸속에 고환이 있어 테스토스테론이 남자 수준으로 만들어지더라도 이를 문제 삼아 약물을 투여해 임의로 정한 기준 밑으로 낮춰야 여자 경기 출전권을 주는 건 심각한 인권침해라는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생명윤리학자 카트리나 카르카지스와 바너드칼리지의 의과학자 레베카 조르단-영은 지난 2015년 ‘사이언스’에 기고한 글에서 테스토스테론 수치처럼 개인차가 크고 같은 사람에서도 상황이나 시간대에 따라 변동이 심한 항목을 기준으로 여자 경기 출전 여부를 결정하는 건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IOC와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지원한 GH-2000연구에 따르면 올림픽 출전한 여자 선수 234명 가운데 13.7%에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전형적인 여성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고 4.7%는 전형적인 남성의 범위에 들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따르면 스무 명에 한 명은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이다.
한편 IAAF가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여자 선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불과 1.5%만이 전형적인 여성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나와 GH-2000연구의 13.7%와 큰 차이가 났다. GH-2000연구는 면역분석법으로 IAAF는 질량분석법을 이용했는데 후자가 더 정확하다.
▲ 2016 올림픽 여자 800m에서 6위에 그친 영국 육상 선수 린시 샤프. 경기 후 “캐스터 세메냐 같은 남성호르몬 과다 선수들과 뛰는 건 너무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 위키피디아 제공
그럼에도 저자들이 GH-2000연구를 언급한 건 남자 선수들의 측정 결과라는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446명 가운데 16.5%가 전형적인 남성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고(물론 낮은 쪽으로) 심지어 1.8%는 여성의 범위에 들어갔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엘리트 선수 여섯 명에 한 명꼴로 평범한 남자들보다도 수치가 낮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IAAF의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연구는 남자 선수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22일부터 26일까지 심리를 진행한 뒤 다음 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세메냐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자신이 바람대로 ‘태어난 그대로’ 달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