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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마지막 남은 조선왕릉. 서울의 중심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했기에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광화문을 출발한 버스는 한참을 달려 분당과 서울의 경계에 날 바래다줬고,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적막감이 맴도는 곳 정류장에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횡단보도가 따로 없어 바로 옆에 있던 육교를 타고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언론에서만 보던 그 익명의 기관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 흔한 차 한 대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능역 자체가 다른 곳에 비해 비좁거나 하진 않았지만, 제사의 준비를 관장하던 재실이 헌인릉 가는 길 중간에 자리해 있었기에 사뭇 호기심이 일었다. 능역이 축소가 된 것인지 어떤 것인지를 사실 확인은 어려웠는데 혹시나 그 내부를 돌아볼 수 있나 싶어 주위를 살폈지만 역시나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게다가 평일의 조선왕릉 주변의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으나 이곳은 빈 공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렇다고 왕릉 내부에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정체모를 의아함을 품은 채, 발권 후 안으로 들어갔다.
1. 헌릉
인릉 주변에서 한창 능역 정리 공사가 한창이라 잠시 여유를 두고 우선 헌릉부터 돌아보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맑았지만 인기척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산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인릉을 지나 중간 지점에 들어서니 저 멀리 헌릉의 비각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함에 가려진 채, 그 오랜 시간을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왔던 왕릉의 위용은 세상을 호령했던 인물들의 잠자리를 보존하며 사람들의 방문을 반겨줄 뿐이었다.
헌릉의 주인은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과 그의 반려자 원경왕후였다.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주며 조선 초기에 조성된 쌍릉의 형태로,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왕릉들과는 다르게 계단에 올라 가까이서 왕릉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고, 정자각 뒤쪽으로 가파르게 형성된 언덕으로 인해 자연스레 느껴지는 경외감은 꽤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더불어 매우 비슷한 전각들의 배치 그 안에 깃든 서사가 다른 왕릉들을 찾게 만들어주는 큰 이유로 작용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는 전형적인 애증의 관계로 고려 후기와 조선 개국 후, 그가 왕권을 손아귀에 거머쥘 때까지 상호보완적 존재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했다. 게다가 태종은 조선왕들 중, 유일하게 과거 시험을 통과한 이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성계가 느꼈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한다. 원경왕후 집안은 대대로 개경에서 고려 중앙 정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집안의 출신. 당대 변방의 무인 가문이었으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아버지의 활약으로 두 사람의 결합은 어렵지 않게 성사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 개국의 과정에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 일을 두고 태조의 미움을 샀기에 그는 개국 이후에도 실권 바깥으로 서서히 밀려나게 된다. 와중에 정도전의 사병혁파와 후계자 문제에 있어 이해하기 힘든 결정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그는 무인정사를 일으키게 된다. 이성계가 병석에 누운 틈을 타,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을 숙청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정종의 즉위와 동시에 잠시나마 수도가 개경으로 바뀌게 되는데 무대를 바뀌어 일어났던 제2차 왕자의 난도 결국 이방원의 승리로 끝이 나며, 반대파 이방간은 유배를 보냈고 아들이 없었던 정종의 양자로 입적 후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며 동궁 생활을 이어간다.
머지않아 정종은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고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무인정사의 순간으로부터 2년 만의 일이었다. 따라주지 않았던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었기에 조선의 왕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튼 왕위에 오른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양으로의 환도였다. 도읍을 옮긴 다음 재위기간 내내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보게 되는데 육조직계제와 사병 혁파를 통해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등 왕조의 초석을 다지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다.
와중에 태종이 가장 민감하게 신경을 썼던 부분은 외척과 공신들의 숙청인데, 본인을 반석 위에 올리는데 충심을 다했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숙청 작업을 단행하게 된다. 멀리서 봤을 때는, 차후 그의 뒤를 이을 세종이 뜻을 펼치는데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가까이에 있던 여흥 민씨 집안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는 곧, 여흥 민씨 집안 출신의 원경왕후와의 불화를 의미했으며 국모의 자리에 오름과 동시에 탄탄대로였을 것 같은 그녀의 앞길에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이 닥쳐오게 되는 것 또한 이때부터였다.
고려시대 문벌귀족 가문 출신으로 시작해 반려자를 만인지상의 자리로 이끈 이물. 원경왕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대의 여걸로 잘 알려지며 무인정사 당시 기지를 발휘해 이방원을 지킨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가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뒤이은 외척들의 숙청에 힘이 빠지는 건 당연했으며,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후궁을 들이는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을 정도로 호탕했던 성격이 유명했다 전한다. 이로 인해 다툼이 심해지자 중궁전에 가둬두다시피 하며, 폐위를 거론하나 신하들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었을 정도라 하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게다가 맏아들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왕재의 자질을 갖춘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맏아들의 운명을 걱정하던 중전이 눈물을 보였다고 전한다. 이는 이후, 충녕대군에게 가서 양녕대군을 살려줄 것을 간청을 했다고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왕이 되지 못한 대군들의 운명은 자칫 이름이 거론되거나 역모에 휘말리면 풍전등화와도 같은 형국이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후, 세종이 즉위하면서 원경왕후는 왕대비의 자리에 올랐고, 2년 후인 1420년에 창경궁에서 학질(말라리아)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세종은 그녀를 헌릉에 모시며 절차를 간소화해 12일 동안만 상복을 착용할 것을 권유했던 태종의 부탁에도 그건 그렇게 못하겠다며 그녀가 이곳에 안장될 때까지 상복을 착용했다고 전한다. 한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얼핏 보면 부러 울 것들이 없어 보였지만 관련된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상심이 컸을 그녀의 모습에 동정심이 강하게 와닿았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머물렀던 태종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권을 거머쥔 채 세종의 외척들을 끊임없이 견제하며 든든한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게다가 세종 초기,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을 실행에 옮기 면서도 유흥을 위해 정자를 짓거나 사냥을 다녔다고 하니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거기에 살아생전에 후계자 세종이 행하는 통치들을 통해 왕이 자질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나타내던 흡족함은 기록을 통해 자세히 나타나 있었다.
이후,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더니 56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는 원경왕후의 바로 옆에 묻히게 되며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되었는데, 살아생전에 애증의 관계였던 만큼 저승에서는 사이가 좋아지길 바라는 세종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게 반석을 다져놓은 태종의 활약으로 세종대에 조선은 반석 위에 올라가며 4군 6진의 개척을 통해 오늘날 강역의 그 모습이 완성이 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2. 인릉
헌릉을 돌아 나온 뒤, 인릉 주변이 한결 조용해졌기 때문에 조심스레 순간을 담아갔다. 꽤 가까운 거리에 중요한 기관 건물이 자리했음에도 주변은 상당히 고요했으며, 한창 주변을 돌아다닐 때 불현듯 나타난 외국인 방문객들을 제외하면 인기척이 상당히 드물었다.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군주, 정조 그 이후에 갑작스레 자리한 순조와 순원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 동시에 조선의 쇠락은 이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조의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죽음으로 당시 11세의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뒤, 정조로부터 꽤나 강력한 권한과 정통성을 물려받게 됐지만, 왕조의 내리막길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만큼, 자연스레 왕실의 큰 어른이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됐는데, 그 기간 동안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고자 박해를 일으켰고,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치세 초기에 찾아온 홍경래의 난과 외부로부터 나타난 이양선 '암허스트 호'의 통상 요구로 인해 난세의 서막을 알리게 됐다.
게다가 어린 나위에 즉위한 만큼, 정조의 염려로 인해 중전을 배출한 안동 김 씨 집안이 본격적으로 조정의 전반을 장악하게 되며 조선을 수십 년 동안 좀먹은 세도정치의 서막을 알렸으며, 그나마 매우 영특해 기대를 걸었던 효명세자도 요절하게 되는데, 그 충격으로 인해 순조 또한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를 맞이한다. 재위 초기 비변사에 국정 운영의 전반을 맡겼고, 효명세자에 양위를 천명하면서 스스로가 무능한 임금임을 자처했던 왕. 능침에서의 그의 모습은 정말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정조의 염려로 인해 안동 김 씨와 손을 잡으며, 왕실에 첫발을 내디딘 순원왕후. 그녀는 안동 김 씨의 일원으로서 발을 내딛을 때부터 말이 많았지만, 선왕이 확정 지은 일을 뒤집을 수 없다는 입장이 힘을 얻게 되면서 무사히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을 거두게 되며, 순조가 치세를 이어가던 와중에 순원왕후의 혼례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추궁이 있어야 한다며, 국문이 열리게 된다. '대혼을 저지하며 선왕의 뜻을 거스른 역적을 처벌하라'라는 반대파의 요청에 불쾌함을 느낀 정순왕후가 다시금 수렴청정을 시도, 해명을 하고자 했으나 유교 법도상 그럴 수 없었기에 사과를 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순원왕후의 지위는 더욱 굳건해지게 된다.
순조가 병이 들자 효명세자와 국정의 전반을 논의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있었던 그녀는 1834년 11월, 역사의 중심에 다시금 놓이게 된다. 순조 승하 후, 각각 헌종과 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면서 왕실 어른으로서 2차례의 수렴청정을 행할 수 있게 됐는데, 당시 조정의 전반을 장악했던 안동 김 씨 일가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국정 전반을 돌보게 된다. 철종 이원범 즉위 후, 3년간 수렴청정을 행한 뒤, 68세의 나이에 심근경색 질환으로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며 이곳 인릉에 자신의 반려자인 순조와 함께 묻히게 된다.
3. 사색
서울의 중심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곳을 찾아오기 전 부터 각 능역에 묻혀있던 인물들의 됨됨이를 살피면서 부터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줬던 곳이다. '흥망성쇠' 이 사자성어가 능역을 돌아볼 때 쉽게 잊히질 않았고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며, 느껴지던 그 복잡다양한 감정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렬했다. 가상속의 상상이겠지만 바로 옆에 자리해 있는 능역을 두고 태종은 순조를, 순조는 태종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상상 속에 그려진 작품 '아테네 학당'처럼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됨됨이 등 복잡 다양한 그들이 살아왔던 환경들을 고려해 봐야겠지만 와중에 불현듯 공통 분모는 확실해 보였다.
자리에 따르는 책임감. 한반도를 518년 동안 다스렸던 왕조의 최종 책임자였던 만큼, 그들이 보여야 했던 모습은 절대적인 권위만큼 무한한 책임감도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순조의 경우 국정의 전반을 비변사에 맡기며 모르쇠로 일관했던 그 대가가 결국 경술국치였기 때문에, 더욱 크게 와닿았던 것 같았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던 곳에 깃들어 있는 도합 약 50년의 서사가 넌지시 말해주던 이야기는 분명했으며, 단순하면서도 매우 복잡했다.
올해 들어 수많은 변화들이 우리들을 찾아왔다. 불현듯 일어난 우크라이나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코로나의 종료와 동북아시아에서 촉발된 수많은 갈등들. 그렇기에 이곳에서 느끼고 담아낼 수 있었던 그 요소들에 더욱 마음이 가는 것 같았다. 그 끝내주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한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갈수록 증대되는 국제무대에서의 외교의 중요성. 헌릉과 인릉 사이에 조성된 숲길을 거닐며 그 사이에 답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대답을 구해봤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한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게 해 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