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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해방 이후의 혼란한 국제적강국 간의 이속 챙기기로 한국 사회는 1) 미 군정에 의한 이승만 계열과 그에 기생하여 정권을 창출하려던 일제 공무원 출신들과 조폭집단들이 서로 협력하는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2) 러시아와 공산국가 설립을 목표로 군사무기를 공급하며 중국,러시아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조직 그리고 3) 한반도 내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조직들로 이루어진 3개 계파가 난립하여 서로 집권을 하려고 감언이설과 선동을 통하여 세를 키우던 격동기 였고 제주도는 일본으로 끌려가서 군인,근로자 등으로 생활하다가 해방과 동시에 가까운 제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과 미군정의 박해를 우려한 사회중의 신봉자들이 몰려 들었고 육지에 비하여 공권력이 약한 제주도에 공산주의 세력이 행정권까지 장악하면서 경찰과 충돌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5] 무려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이런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로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165p)으로 판단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6],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켰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7]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84-89p).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536-539p).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4.3 사건은 폭동적 시위진압을 시작으로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학살, 이념과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등등 사실상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총집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발단
제주 삼일절 발포 사건로 인해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로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친일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도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9][10][11]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12]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아갔다.[13]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저항세력을 모두 좌파로 매도하고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14]에서 온 서북청년회[15]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을 비롯하여 응원경찰들을 제주도로 파견을 보내, 조병옥의 지휘 하에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때문에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제주도민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부임이다. 1947년도에 도지사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 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 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대놓고 발언하며 탄압 정책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미군정 관계자들조차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그(유해진)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보는 본인(군정장관)은 물론 도민들을 당혹케 했다. 제주도 우익테러 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며 제주도에 조성된 탄압적 상황을 꼬집었다.[16]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 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 활동을 자행했다"[17]며 유해진 지사가 문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는데, 탄압 정책에 동원되어 입도한 서북청년회원들은 극우테러 활동은 물론,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우려가 있음에도 미군정은 4.3 전까지 제주도지사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의 이같은 폭력행위는 사상적 요인도 있었지만 경제적 요인과도 결부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없었기 때문에 자금 모금을 위해 테러에 의존했던 것이다.[18] 심지어 이들은 같은 우익 진영과도 갈등하였는데, 서청 세력은 4.3 사건 진행과정에서, 5.10 총선거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우익 청년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약칭 족청) 단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집단으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9] 족청 단원 집단 사살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빨갱이(좌파)라는 지목은 순전히 탄압 주체의 자의적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1948년 1월 CIC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지식인층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으며, 좌익 인사들도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고, 좌익 인사로 불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익을 위시한 이들의 빨갱이 공포 선동이 테러의 일차적 요인이었다. 애초에 제주도 좌익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난의 해결이었다.[20]
이와 같은 극단적 탄압 국면이 심화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해졌다.
1948년 말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한 것이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남한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질문했으며, 국제적인 관심이 있던 덕분인지 관련 경찰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벌을 내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점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경찰의 폭력행위는 3.1절 발포사건 이후 경찰력이 육지발 응원경찰 위주로 교체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는 증언이 속출하는 등, 경찰의 강압에 대한 도민사회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21]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일제는 앞서 1945년 패망했지만 아직 3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표준 일본어는 다들 학교에서 배워 놓은 상태였으므로 이런 게 가능했는데, 이들이 당시 일본어로 소통한 것은 제주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대량학살의 촉발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3. 피해 집계
구분 | 신고인 수 | 희생자 수 | 유족인 수 | |||
계 | 사망자 | 행방불명자 | 후유장애자 | |||
총계 | 9,917 | 14,028 | 10,715 | 3,171 | 142 | 28,561 |
제주도 | 57 | 87 | 73 | 12 | 2 | 203 |
제주시 | 3,146 | 4,606 | 3,389 | 1,180 | 37 | 7,743 |
서귀포시 | 953 | 1,322 | 1,012 | 297 | 13 | 2,974 |
북제주군 | 3,404 | 4,714 | 3,626 | 1,024 | 64 | 10,031 |
남제주군 | 2,357 | 3,299 | 2,615 | 658 | 26 | 7,610 |
● 사망자 중 10955명(78.1%)가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 대부분의 사망자는 대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의 기간에 발생했다. |
3. 휴유증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4.19 혁명을 기점으로 많이 축출당하거나 사망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좌파 측 사건의 주동자인 김달삼은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 전쟁 때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 쪽을 헤집다 정선군에서 처형당해 죽었다. 김달삼이 북한으로 향한 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자리를 넘겨받은 이덕구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됐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 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우익 측 인물 중 강경 진압을 지시한 조병옥은 4.19 혁명 전 병으로 사망했고 탁성록은 언제 죽었는지 모르나 학살을 저지른 데다가 마약쟁이라 오래 못 살았을 것이고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충실하게 개 역할을 하다가 1956년에 프래깅당하고 김종원 역시 4.19 혁명 이후 병으로 사망했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지사를 역임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 내 공직에 앉혀 불씨를 만든 유해진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나마 송요찬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인데 송요찬은 정군운동으로 강제 예편되기는 했지만 5.16 군사반란 이후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인천제철 사장을 지냈으며 사망 직전인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윈회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렇게 4.3 관련자들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 중 사망하거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쫒겨났지만 그 중 아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고 반공에 의해 4.3 사건이 부정되면서 그나마 살아 있던 사람마저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처벌받은 무장대 측 인물 역시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처벌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학살을 방조 및 묵인과 더불어 강경진압을 직접적으로 지휘한 미군정 역시 사죄나 반성이 없이 본국으로 복귀했다.
5. 언어적 영향
제주어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35] 사건 당시 제주어를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 하려고 억지로 제주어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 (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어는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 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 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 인구가 약 5,000~10,00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도 인구의 1/60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히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주어교육 활성화 조례)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미 신축민란을 계기로 이미 천주교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이 4.3 사건 당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는 보수 개신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다.[36] 이 때문에 21세기에도 제주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리고 개신교의 비중이 가톨릭보다도 더 낮다.[37] 참고로 신축민란은 이미 한 세기 이상이 지난 사건이고, 민란 중 무고한 천주교인들까지 공격 당한 측면이 있어 천주교회가 일부 피해자적 위치를 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교회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제주교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죄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반면, 4·3 사건은 해방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피해자가 아직 생존해 있고, 구한말의 신축민란보다 더 오래, 광범위한 피해를 입힌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예장통합 교단의 영락교회나 한경직 목사 등은 “제주반란군을 평정했다”는 것을 무용담으로 이야기한 사실만 있을 뿐 무고한 도민 피해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한 사실이 없다.
6. 정치적 영향
21세기에는 전체적으로는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준 적이 많은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과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고향을 떠나 육지로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육지에서 이주하면서 4.3 사건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제주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젊은 세대가 많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4.3 사건 추모식에 직접 참석해 진상규명과 사과를 약속하는 등 민주당 정권이 4.3 사건을 챙기는 것이 계속되면서 제주도의 성향도 차츰 민주당계 정당에 기울고 있다. 20대 총선에 이어 2020년 21대 총선, 2024년 22대 총선까지 민주당계 정당이 국회의원을 독차지한 것.
그렇다고 보수정당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와 원희룡이 각각 승리하였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4.3 사건, 지연 등이었는데 박 후보는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으며 원 후보의 경우는 본인이 고향인 제주도에서 먼치킨 급의 좋은 이미지(학력고사 및 사법시험 수석, 보수 정당 내 소장파 등)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 출신을 중앙 정계에 고위 정치인으로 진출시키고 싶은 것이 보수정당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현오봉 전 의원의 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19대 총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38] 제주도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보수정당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이라고 추앙하자 제주도의 노년층 표심도 돌아서면서 19대 대선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세탁하면서 개인기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원희룡을 제외하면 보수정당의 득표율이 대거 폭락하고 민주당에 거의 텃밭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이건 사드 배치 논란으로 중국의 보복에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도 있다. 원희룡 이전에 신구범, 김태환도 보수정당 출신 도지사로 선출된 바가 있다. 다만 둘 다 민주당계에 잠시 몸담은 바가 있지만.
그리고 원희룡도 제주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국힘 대선 경선에 참가 하고 윤석열 지원 유세를 돌면서 도정 공백이 생기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20대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거의 호남 다음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때문에 역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대선 후보 적중에 실패했다.[39] 이제 제주도에서 지지를 얻을 만한 보수 인사가 없기 때문에 경합지역이 아니라 민주당 텃밭에 가까워졌다.
제주도민이 많은 타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부산에서 제주도민이 많은 영도구에서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김철훈[40]이 영도구청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물론 영도구는 다른 원도심 지역처럼 보수 세력이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고 민주당계 득표율이 40% 이상 나오는 이유 중 하나를 제주도 출신 사람들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7.주요역할자들
1) 채명신 : 진압소대장
2) 조병옥 내무장관
3) 이승만 대통령
4) 김익열 9연대장(초기 협상을 주도하다가 /미국정에 의해 해임됨
7)무장공비사령관 김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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