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얼 이기축의 씨됨을 알아보고 남편으로 맞아 3등 공신에 올려 놓은 내조의 여왕, 우씨 부인
이기축(李起築, 1589년 10월 7일 ~ 1645년 6월 6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왕족 서얼 출신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기축(己丑), 자(字)는 희설(希說) 또는 희열(希說), 기축(己丑),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8대손으로 왕족 출신이었으나, 그는 서자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사촌 형 이서(李曙)가 1622년(광해군 14)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부임할 때 함께 내려가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의 집에 자주 출입하며 모의하였다.
이기축 (李起築)
생애1589년 10월 7일 ~ 1645년6월 6일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양주군 별비면 송산리
(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송산동) 송산 부락)
사망지 : 조선 경기도 양주군 별비면 송산리 송산병사 자택
별명
초명은 기축(己丑), 자(字)는 희설(希說) 또는 희열(希說), 기축(己丑)
시호는 양의(襄毅)
작호는 완성군(完成君), 완계군(完溪君)
복무 : 조선 육군, 조선 수군
복무 기간 : 1620년 - 1645년
주요 참전 : 인조반정, 병자호란, 정묘호란
서훈 내역 : 1623년(인조 1) 분충찬모정사공신 3등(奮忠贊謨靖社功臣三等)
기타 이력 : 1620년(광해군 12) 무과(武科)에 급제, 1723년 시호 '양의' 추서
얼자 출신이며, 젊어서 한때 가난하여 타인의 집 머슴으로도 생활하였다. 아버지 이경유에게 정실 아들이 있었지만 일찍 죽어, 성서탈적되었다.
이후 무과에 급제, 선전관, 충좌위부사과 등을 거쳐 그뒤 이서, 이귀 등과 반정에 가담, 1623년(광해군 14) 장단에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이 되어 입성했고, 반정이 성공하자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공신 3등(靖社功臣三等)에 책록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군되었으며 금군장(禁軍將)이 되었다. 이후 수별장, 호위별장, 오위장(五衛將), 군문천총별장(軍門千摠別將) 등을 역임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수행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역시 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했으며, 어영별장(御營別將)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완성군(完成君)에 봉군되고 다시 완계군으로 개봉되었다. 정축하성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소현세자 내외의 배종신이 되자 처음에는 거절당했고, 뒤에 배종신으로 다시 선양(瀋陽)에 갔다가 3년 뒤 병으로 귀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장단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의 병으로 사퇴했다. 증 한성부 판윤에 추증되었으며, 경종 때 양의(襄毅)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1634년 조정 대신들을 모욕했다가 그해 3월 사헌부지평 박수홍(朴守弘)에게 천얼 출신이 오만하다는 성토를 당했고, 심양에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의 배종신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서얼이기 때문에 영을 세울수 없다며 처음에 소현세자로부터 수행원직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맨손으로 호랑이 등을 상대했지만 배움이 짧은 그를 인조반정 공신들에게 연결시켜준 것은 그의 처 단양 우씨 또는 중인 출신 첩인 공주 정씨였다는 전승도 전한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 이경록의 조카이며, 인조반정의 주동자인 이서의 사촌 동생이다. 정조 때의 작가 이옥의 고조부가 된다.
출생과 가계
이기축은 1589년(선조 22) 11월 14일(음력 10월 7일)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사후 완원군(完原君)에 추봉된 이경유(李慶裕)와 그의 첩인 고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이기집(李起集)이라는 이름의 친형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에는 1633년 10월 1일 그의 어머니의 병환으로 집 종이 정장을 올려 이기축의 소환을 청하는 내용 중, 이기축과 이기집이라는 사람이 각각 나뉘어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일설에는그가 천민 여성에게서 나온 얼자라는 설이 있고, 사촌형 이서 역시 그를 서족이 아닌 얼속으로 칭한 기록도 있다.
처음 이름은 기축년에 태어났다 하여 기축(己丑)이고 뒤에 인조가 이름을 지어주어 기축(起築)이 되었다. 자는 희열(希說)이다.
그는 왕족으로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7대손이었다.
효령대군 이보의 7대손으로 6대조는 의성군 이채(誼城君 李宷), 5대조는 운림도정 이핍(雲林都正 李愊)이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고조부 파성군 이철동(把城君 李哲仝)에게서 끝이 났다.
그의 고조부 파성군 이철동(把城君 李哲仝)은 서자였는데, 파성군이 서자인 것은 윤근수가 그의 아버지 이간의 묘비문을 지을 때 종실에서는 적서(嫡庶)를 따지지 않지만 파성군 위로는 모두 적파(嫡派)라고 언급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파성군은 본래 파성부정에 제수되었다가 정으로 승작된 뒤, 노인직으로 정의대부를 제수받고 군이 되었다. 증조부 이광윤(李光胤)은 풍덕군수이고, 사후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과 증 자헌대부 형조판서로 거듭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이간(李幹)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군수와 오위장을 역임했고,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와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큰아버지 이경록(李慶祿)은 충의위로 군문에 투신하고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의 조선군의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이경유는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군수를 지냈으며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뒤에 그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것으로 다시 증 가선대부병조참판과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원군(完原君)에 추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자였는데 어머니 고씨는 옥구현감 고언명(高彦命)의 서녀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조카딸이었다. 중종~명종 때의 문신 고맹영은 고씨부인의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그가 얼자는 견해도 존재하는데, 완풍군 이서가 서족이 아닌 얼속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복 형 이정(李日+丁)이 있었고[2], 친동생으로는 이상(李㫾)이 있었다. 이복 누이는 첨정 이경항에게 출가했는데, 예송논쟁 당시 남인 논객이던 이서우(李瑞雨)가 그의 외조카가 된다. 한때 그의 형 이정의 이름인 정이 그의 아명 또는 처음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1970년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와 에드워드 와그너 등이 각각 조선의 문,무과 방목을 한글로 해석,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의 동생 이상의 안항 란에 형 이기축, 적형 이정으로 된 것이 발견되었다. 무과방목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승정원일기에는 그의 일찍 죽은 친형으로 추정되는 이기집(李起集)이라는 인물도 나타난다.
일찍이 그는 겁이 없고 힘이 세서, 무기 없이 맨손으로 호랑이나 들짐승을 상대했다 한다.
소년기와 청년기
그의 아버지 이경유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정희석(延錫禧)의 딸과 결혼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다시 죽산박씨(竹山朴氏) 병절교위(秉節校尉) 박문좌(朴文佐)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는 본래 서자 또는 얼자로 태어났으나, 이경유의 계비 죽산박씨에게 얻은 아들 아들 이정(李日+丁)이 일찍 죽었지만 아버지 이경유는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뒤에 인조 반정후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녹훈(錄勳)되면서 승적(承嫡)되었다.[3] 사촌 형 이서는 반정 직후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얼속이라 칭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비범했다 하며, 궁마(弓馬)로 단련하였다. 소년기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었는데 후일 그를 임금으로 받들게 된다.
그의 첫 이름이자 소자(小字)는 기축(己丑)인데 후일 인조반정 후 임금이 된 인조가 "나는 이기축(李起築)과 어린 시절 함께 놀아 아명(兒名)을 부르는 데 익숙하다. 이번에 녹훈할 때도 그 아명으로 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첫 이름이자 소자와 이름이 비슷한 기축(起築)으로 지어주었다.
이후 성년이 된 뒤에도 능양군(綾陽君)의 사저를 왕래하면서 교류하였다.
그는 날짜는 정확하지 않으나 15~16세 연하의 부인 단양우씨와 결혼했는데, 국조인물지와 의령현감을 지낸 서유영이 쓴 금계필담 등에는 그의 부인 단양우씨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고아였다. 금계필담, 국조인물지 등에 의하면 단양우씨가 한성으로 올라왔다가 그를 본 뒤, 그의 관상을 보고 청혼하였다 한다. 우씨는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성품이 쾌활하고, 관상을 볼 줄 알았으며, 입담이 좋았다. 노비와는 달리 양민 출신 하인이 머슴인데, 결혼 직후 한양 근처의 어느 양반가에 신분을 숨기고 머슴살이를 1간 한 뒤, 재산을 마련해서 양반가를 나왔다. 이후 부인 우씨는 서대문 밖에 주점을 차렸다 한다. 이후 이귀 등 인조반정에 가담하는 인사들이 일부 우씨의 주점을 찾았고, 어느날 우씨는 사람을 시켜 능양군에게 탕방걸(湯放桀)이라는 글자가 쓰인 쪽지를 보냈다. 쪽지를 본 능양군이 당황해 하여 우씨를 죽이려 하자, 자신을 믿고 남편을 반정군에 끼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이기축을 반정으로 이끈 인물은 그의 첩 동정월(洞庭月)이라 한다. 동정월은 정씨(鄭氏)로, 평양부의 기생이었는데, 사대부가 또는 공주군 향리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는데 정씨(鄭氏)가 이기축을 보고, 자신의 남편으로 삼겠다고 했다. 서출이었던 그는 한때 정씨 집압에 머슴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그의 관상을 알아본 정씨 여인이 청하여 그를 남편으로 정했다 한다. 결혼 후 어느날 정씨가 이기축에게 글을 배우게 했고, 어느 병서의 내용을 짚은 뒤 신무문 밖에 가서 이귀 등에게 묻게 했다 한다. 이귀가 이를 보고 이것이 뭐냐고 묻자, 그 뜻을 어떻게 아느냐 했고 이기축은 자신의 아내가 잘 안다고 하였다. 이기축은 주막으로 이귀 등을 데려왔고, 동정월 정씨는 자신의 남편이 글은 짧아도 힘이 세고 담력있는 장사이니 거사에 참여시켜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기축의 첩 정씨가 공주 향리의 딸이라는 전승은 1930년대의 잡지 별건곤 제28호에 <仁祖反正의 裏面史>라는 제목으로 실려서 보도되기도 했고, 정씨가 평양 기생이었다는 설은 김동인의 소설 술값 외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는 야사집인 청구야담(靑邱野談)에도 실렸고, 19세기 인물 최영년(崔永年)의 설화 모음집 《실사총담 (實事叢談)》에도 수록되어 있다.
과거 급제와 인조 반정
1620년(광해군 12)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 등을 지냈다. 당시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있던 사촌형 이서(李曙)는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과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에 분개해 반정(反正)을 모의하였고, 김류, 이귀 등과도 기맥이 통하였다. 이때 이기축은 적 사촌형 이서와 서로 지기(志氣)가 통하여 능양군(綾陽君)에게 접근, 능양군의 별장과 장단군 사이를 거의 매일 오고 가면서 거사를 준비, 동태를 보고하고 연락을 맡았다. 힘이 장사였지만 그가 인조 반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장사라서가 아니라 성품이 우직하여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2일 이기축은 범몰이를 핑계로 장단군의 병력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한성부 연서역(延曙驛)에 들어왔다.[4] 이어 김류, 이귀, 이괄 등이 이끄는 군사가 도성을 점령하고 반정이 성공하였다. 계획 시간보다 늦었는데, 군사 모이는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에 능양군은 초조해하며 몸소 앞으로 마중을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