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禪詩에서의 인불사상
<1>
“법당은 훌륭하나 부처님이 영험이 없구나.”
신찬神贊스님이라는 상좌가 은사스님이 목욕을 할 때 등을 밀어 드리면서 한 말이다. 그것도 아는 것은 없으면서 살만 잔뜩 찐
은사스님의 등짝을 불쌍하고 가엽다는 듯이 툭툭 두드리면서 말이다. 그 광경을 가만히 그림을 그려보라. 누구라도 그려지지
않는가.그랬더니 은사스님은 비꼬듯이 내뱉는 상좌의 말에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상좌를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영험도 없는 부처님이 광명은 놓을 줄 아는구나.”
그때 상좌로부터 곧바로 날아간 촌철살인의 한마디였다. 그 부처님은 정말 영험이 없었던지 그 말을 듣고도 더 이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광명을 놓은 일은 가벼이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광명을 놓는 일. 바로 그것이다. 알고 모르고, 미련하고
영리하고는 별문제가 아니다. 등을 두드리면 돌아볼 줄 아는 그것. 그것이 곧 부처님의 능력이며 부처님의 신통이다. 그 능력과
그 신통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 숨을 쉬는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는 신통이다. 그대로 살아있는 부처님 활불活佛이요, 활신活神이다. 비록 살이 좀 쪘거나 빼빼 말랐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흑인이거나 백인이거나, 게으르거나 부지런하거나 너무 따지고 차별하지 마라. 그대로 모두가 광명을 놓을 줄 아는 아름다운 유정불有情佛이다.
<2>
가지가지 종류의 사람들이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여,
마치 고운 비단 위에 진주를 흩어놓은 듯아름답기 그지없구나.
참다운 지혜를 갖춘 훌륭한 성인은 사람을 얼마나 깊이 있게 꿰뚫어보고 바르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가지가지 종류의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온갖 종류의 생명들이다. 그들을 불교에서는 아홉 종류의 생명으로 나눈다.
어떤 종류의 생명이든 모두가 똑같은 아름답고도 신기한 생명 부처님들이다. 그들이 함께 같은 지구 같은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다. 마치 붉은 비단 위에 빛나는 진주를 한껏 뿌려놓은 듯 눈부시기 그지없다. 요즘의 광경으로 표현하자면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 하늘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때 갖가지의 전등불이 반짝이며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것과도 흡사하리라. 생명의 실상을 깊이깊이 사유해 보면 왜 아니겠는가? 참다운 지혜를 갖춘 성인들은 하나같이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그렇게 빛나고 아름답다고 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부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받들어 섬겨야 하리라. 염불처럼 읊조리며 길이길이 찬탄하여야 하리라.
<3>
밤마다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아침마다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거나 앉을 때에 늘 따라다니고 말을 하거나 침묵할 때도 늘 함께 있다.
호리만치도 떠나 있지 않는 것이 마치 몸의 그림자 같네.
부처님이 계신 곳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네.
부처님은 누구신가? 지금 이렇게 알고 싶어서 찾고 있는 그 사람이다. 즉 찾는 사람이 찾을 부처님이다. 그래서 밤마다 같이 자고, 아침마다 같이 일어난다. 아무리 부부라 한들 태어나면서부터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앉고 일어나고, 가고 오고, 말하고 침묵하고에 늘 같이 하는 그 사람이다. 실은 모든 일에 같이한다고 표현하지만, 주객이 나누어질 수가 없는 관계다. 관계라는 말을 쓰지만, 관계도 아니다. 편의상 틀린 표현인 줄 알면서도 하는 말이다. 언어의 한계가 그런 것이다.
잠자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잠자고 일어나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일어나거나 앉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말하거나 침묵하는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와 같은 일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이 아니지만, 이러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이다. 어디라도 이런 사람이 있거든 부디 부처님이라고 받들어 섬기자.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자.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이 행복하고 나라가 평화롭다.
<4>
이런 선시가 있다.
“우습다. 소를 탄 자여.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저 바다의 거품을 다 태워버리라.”
조선시대의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스님의 ‘소를 탄 사람[騎牛子]’이라는 선시다. 선가에서는 마음을 찾는 일, 또는 부처가 되는 일을 소를 찾는 일에다 비유하였다. 마음의 소라 하여 심우心牛라고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되는 과정인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린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소를 탄 사람, 소를 찾는 사람, 소를 먹이는 사람 등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난행과 고행을 하면서 소를 찾아 나섰지만, 소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 타고 있다. 찾아 나설 줄 아는 일이 벌써 그 찾으려는 소가 하는 일이다. 소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부처가 아니면 어찌 부처가 되려고 몸부림을 칠 줄 알겠는가?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인 것을 어디서 다시 찾는단 말인가?
알고 보니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을 하였다. 너무나 가소로운 일이었다. 그 당치도 않는 일이란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며,
거북의 털과 같은 일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바다의 물거품을 다 태워버린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는다는 것이 이와 같다. 부처님이 다시 부처님을 찾는다는 것이 이와 같다. 온 천지가 다 마음이며 부처님인데, 우주만유가 다 마음이며 부처님인데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진실로 가소로울 수밖에 없다. 천하에 마음을 찾는다는 나그네들은 이 말을 잘 명심해야 한다. 불교인들의 모든 신앙행위가 실은 모두 이 마음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음을 찾는 일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행위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5>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녀도 봄을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다녔네.
허탕치고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
송나라 때 어떤 비구니스님이 도를 깨닫고 나서 지었다는 오도송이다. 제목은 “봄을 찾다[尋春]”라는 시다. 겨울이 막 지나면 사람들은 봄, 봄, 봄 한다. 성미가 급해서가 아니다. 봄은 희망이자 꿈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가 좀 달라질 것 같은 희망이 용솟음친다. 산이나 냇가에 자꾸 눈이 간다. 논밭이나 들판에도 마음이 간다. 정원에 심어진 나무에도 저절로 끌린다. 희망과 꿈과 생기와 성장과 사랑과 기대감이 넘치고 있는 봄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봄을 찾아 나섰다. 그 사람은 곧 모든 사람이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으로 찾아다닌다. 저 멀리 구름이 걸린 언덕배기와 넓은 들판에까지 돌고 돌았다. 그러나 봄은 볼 수 없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우연히 뜰에 심어진 매화나무 밑을 지나다가 진한 매화향기를 맡았다. 고개를 들어 매화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니 새하얀 매화꽃이 막 피기 시작하였다. 종일토록 찾아도 찾지 못하던 봄을 집에 돌아와서 한껏 느꼈다. 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자기가 늘 살고 있는 자신의 집안에 있었다.
의미가 깊은 시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봄을 찾듯이 행복을 찾아 헤맨다. 재화財貨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사람을 맞이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고 자식을 두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것도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출가수행도 행복을 위해서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成佛이나, 지극한 도[至道]나, 열반이나 이 모두가 가장 이상적이며 바람직한 삶, 즉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시간을 많이 소비해서 얻는 것도 아니며, 노력을 많이 해야만 얻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성불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소위 말하는 팔만사천 방편을 시설해 두고 있다. 염불이나, 간경이나,
참선이나, 주문이나, 육도만행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만 그곳에 이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한 것들은 어디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그러한 삶일 뿐이다.
『열반경』에서는 소를 잡던 백정이 그 자리에서 칼을 내동댕이치며, “나도 부처다.”라고 외쳤단다. 이 얼마나 장쾌한 일이냐?
부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 보고 듣고 숨 쉬고 느끼고 하는 이 사실이다. 이것이 삶의 모든 것이며 인생의
모든 가치와 의미가 다 담겨 있다. 성불도 열반도 행복도 지금 바로 이 순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항용 지금에 존재하지 않는, 언제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허상虛相에다 초점을 맞춰두고 그것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확실한 부처의 실상實相에는 늘 외면한다. 사람들은 대개가 집안에 있는 봄을 모르고 멀리 찾아 헤매듯이
행복이라는 봄도, 부처님이라는 봄도, 열반이라는 봄도 여기 이 순간의 자신을 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맨다.
봄에 대한 이 시는 곧 이 문제를 깨우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