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학적 안정성과 조화된 곡선미의 백미 '첨성대'
예로부터 하늘의 변화를 하늘의 뜻이거나 하늘의 명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옛 사람들은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하늘을 받드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그때 사람들은 제단을 만들어 여러 가지 제천 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하여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깨닫고 하늘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농경 국가로서 비와 바람 등 천기의 변화가 지대한 관심사 중의 하나여서 천문 관측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하늘의 변화는 왕실과 백성들의 평안과 직결되는 신의 뜻이라고 여겨 항상 주의 깊게 하늘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국조 단군(檀君)이 세웠다는 참성단(塹星檀)이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산정(山頂)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별[星]자가 붙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 곳에서 개천절(開天節)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옛날부터 천문 관측과 농경의 풍요로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증명한다.
별자리의 기본인 28수 중 그 하나인 기수(箕宿)와 연관을 가졌다는 기자 조선을 시작으로 한 한국의 고대 천문학은 먼저 고구려의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 신라의 첨성대 등 여러 가지 유물을 남겼다.
고구려 각저총 별자리 그림
고구려 무용총 별자리 그림
삼국 시대 우리 선조들은 우주에 대한 관측에 기초하여 우주에 관한 넓은 견해와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천문 관측을 진행하여 여러 천문 현상들을 관측하고 기록에 남겼다. 이를 위해 천문 기상 관측을 위한 첨성대도 건설하고, 과학적인 석각천문도도 만들었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천문 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일자(日者)'라는 직제가 있었다. 백제에서는 '일관(日官)'이 있어 해와 달, 별들에 대한 관측과 계산, 기록을 담당하였고, 신라에서는 누각박사(漏刻博士)와 천문박사(天文博士)들이 천문 관측을 담당 수행하였다.
고려 시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서 일어난 혜성 관측과 일식을 관측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혜성 출현이 67회, 일식이 67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그리고 기타(천체 현상의 의미가 불분명한 것) 약 12회 등 모두 226회의 천체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혜성(彗星)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에서는 10회, 백제에서는 15회, 신라에서는 32회나 관측되었다.
일식은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554년(고구려 마지막 일식 기록)까지 591년 동안 11회, 신라는 기원전 54년(신라 최초 일식 기록)부터 911년(신라 마지막 일식 기록)까지 965년 동안 30회, 백제는 기원전 13년(백제 최초 일식 기록)부터 592년까지 606년(백제 마지막 일식 기록) 동안 26회의 관측을 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신라의 기원전 54년 일식 기록은 실제로 일식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양력 5월 9일(음력 4월 1일)에 일어났다. 더불어 삼국의 일식 기록 67회 가운데 약 80%가 실제 일식이 일어났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실제 일어난 일식 기록이 80%가 넘는다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중국 한나라의 78%, 동·서진의 63%, 당나라의 65%, 일본의 일본서기 45%와 비교하여 보아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독자적인 천문 관측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첨성대를 평양성에 두었다는 문헌 기록들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54 지리지 평양부에는 '성 안에는 9개의 사당과 9개의 못이 있는데, 9개의 사당은 바로 9가지의 별이 날아 들어간 곳이며, 9개의 못 옆에는 첨성대가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권51 평양부 고적조에는 '첨성대는 부의 남쪽 3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에서 고구려 첨성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경주의 신라 첨성대(瞻星臺, 국보)는 경주시 인왕동(慶州市 仁旺洞)에 자리 잡은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天文臺)로 알려진 석조 건물로, 우리나라의 천문학과 기상학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첨성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27대 선덕 여왕(善德女王) 때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新增東國輿地勝覽) 람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돌을 다듬어 대(臺)를 쌓았는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이며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한다(瞻星臺…善德女主時,鍊石築臺。上方下圓,高十九尺。通其中,人由中而上下,以候天文)'라는 기록에서 첨성대의 규모와 기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하면 첨성대란 한자 그대로 '첨성(瞻星)하는 대(臺)'라는 의미이며, '별[星]을 바라보는[瞻] 시설[臺]'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첨성대에 대한 기능에 대해 천문 관측대, 제단 등의 논란이 있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첨성대는 별을 보는 곳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첨성대가 평지에 있고 높이가 별로 높지 않아 천문대로 보기에 어렵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지만 개성에 있는 고려 첨성대(축대 높이 2.8m)와 서울에 있는 조선 관천대(창경궁 관천대 - 높이 3m, 관상감 관천대 - 4.2m)보다 높다는 점에서 재론할 여지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첨성대는 질 좋은 화강암으로 기단에서부터 높이 9.108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쌓아 만들었다. 건축학적으로 정교하며 역학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약 1천4백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첨성대는 천문학적으로 볼 때 당시 천문학 부문에서 지배하던 '천원지방(天圓地方)' 설에 따라 위는 둥근 몸체에 기초에는 네모난 기단석을 놓았다. 그 기단석 위로 돌을 한단 한단씩 모두 28개단을 쌓아 천체의 별자리 28수를 나타내었다. 몸체는 27단이나 맨 위의 정자석을 합치면 28단이고 기단석을 합치면 29단이며, 기단석과 정자석을 제외한 원주부(圓柱部)에 사용된 석재 수(石材數)는 하층부터 27단까지 3백62매이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27단은 선덕 여왕의 27대, 28단은 기본 별자리 28수, 29단은 한달 29일을 의미하고, 3백62개는 1년의 일수(日數)를 상징한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네모난 출입구를 중심으로 창문 아래와 창문 위로 각기 12개의 단으로 쌓았다. 이것은 1년 12개월과 24절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대석(臺石)으로부터 높이 약 4.16m 되는 곳에 정남(正南)을 향하여 1변의 길이가 약 1m인 네모난 출입구를 배치하고, 이를 통하여 햇빛이 그 안벽에 비추는 그림자의 위치와 그 길이에 따라 시간과 절기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
춘분과 추분에는 태양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비추게 돼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을 측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라에서는 혜성 관측 기록이 32회, 일식은 29회나 관찰되고 있는데, 신라인들은 이 첨성대에서 주기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통해 혜성과 일식 등 하늘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첨성대 실측도(함인영 그림)
첨성대의 건축학적 연구는 재미 교포 건축공학자 이동우 박사가 1972년 이래로 여러 면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첨성대 설계자는 특이한 반곡선 형태(半曲線形態)를 창안하여 축조 시 구조적 안정성과 심미적이고 기능적인 요소를 고려했음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즉, 건축 시의 안전과 완공 뒤의 안정성을 특별히 고려하여 1단에서 12단까지는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으로, 13단에서 20단까지는 비스듬한 직선, 21단에서 23단까지는 경사진 직선과 수직 직선을 이어 주는 이변곡선(移變曲線), 24단에서 27단까지는 수직 직선(垂直直線)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첨성대의 전체적인 외형은 하나의 완전한 곡선이라기보다는 두 곡선과 두 직선으로 된 완만한 복합 곡선(複合曲線)으로 되어 있으며, 이 부드러운 반 곡선으로 인하여 첨성대는 안정되고 조화된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첨성대의 구조학적 안정성(함인영 그림)
또한 첨성대 설계자는 19단과 20단에 내부 정자석(井字石)을 배치하고, 원주부의 하부인 12단까지 흙을 채운 점, 그리고 남쪽에 창을 만들고 창을 중심으로 아래는 밖으로 부풀게, 위쪽은 오그라드는 모습으로 설계하였다. 이러한 것에서 당시 설계자가 여러 석축 공법을 종합 응용하여 그 안정성과 기능적 곡선미를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1단 아래에 차 있는 흙은 원형의 변형에 저항하는 내력을 발생시켜 축조 시 무너지는 위험성을 낮추었고, 완공 뒤에는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게 되어 외력과 기초부등침하(基礎不等沈下) 및 지진 등으로 인한 진동에 대비할 수 있어 첨성대의 원형을 보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불어 머리 부분에 네모난 정자석을 올려 원주부의 둥근 구조를 균형 있게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구조는 세계 건축물에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첨성대 설계자가 뛰어난 건축 기법과 과학 기술, 그리고 심미안적 사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경주 첨성대는 삼국 시대 우리나라 천문학의 높은 발전 면모를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체적 형태와 크기, 석재의 경제적 처리 및 배치,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기능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또한 첨성대는 가장 치밀한 설계를 바탕으로 건축된 석조 건물로, 뛰어난 예술성과 과학 기술이 최상의 조화를 이룬, 우리 겨레의 독창적인 과학 기술 세계를 보여 주는 세계적 유물이다.
첨성대의 천체 관측 추측도(신라 역사 과학관 석우일 관장)
[네이버 지식백과]
구조학적 안정성과 조화된 곡선미의 백미 '첨성대'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 2012. 4. 30., 윤용현)*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