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의자 기인이 살고 있다. 기인은 의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어느 날은 의자에서 잠까지 잔다. 아마 의자에서 몇 날 며칠 앉아 있으라고 해도 큰 무리 없이 앉아 있을 것 같은 그 기인은 바로 남편이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버지의 모습 중에서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문득 아이들과 이산가족처럼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네댓 살 될 무렵 남편의 대학원 공부를 위해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아서 혼자 두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나는 국내에 남아 어머니 투병을 돕기로 하고 남편과 아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어머니의 암은 호전되어 갔지만 남편은 혼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대학원 공부를 병행해 나가야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 걱정과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남편은 밤이면 밀린 공부를 하며 의자에서 자고 일어나길 반복했다고 한다. 그렇게 주경야독한 결과 남들보다 빨리 대학원 공부도 마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셋이나 되는 아이들이 남들한테 뒤처지지 않게 뒷바라지하느라 정말 의자가 무너져 주저앉도록 열심히 일했다. 그런 남편이 오늘도 낡은 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짠했다. 남편이 쓰고 있는 의자는 내가 오래전 샀던 커다란 사장님 스타일로 이제 더 이상 높이 조절도 안 되고 살 때는 가죽처럼 튼튼해 보였던 레자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의자를 바꿔주고 싶었지만, 사는 게 뭔지 쉽지 않았다. 얘들한테 필요한 것은 망설임 없이 사주게 되는데 남편과 내가 쓰는 물건은 닳고 떨어져 못쓰게 되어야만 눈이 가는 것 같다.
남편 생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아빠 생일 선물로 의자가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제껏 우리 가족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아이들과 나의 의자가 되어주었던 남편한테 편안한 의자를 사주고 싶었다. 아이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카카오톡에 단체톡방을 열어 의자 공모전을 시작했다. 먼저 각자 추천하는 의자를 카톡방에 올리고 투표하기로 했다.
첫째는 성격대로 기능성을 중점으로 한 의자브랜드를, 둘째는 디자인과 색상을 우선적으로 그리고 막내와 나는 가격부터 보고 올렸다. 최종적으로 남편에게 가격을 뺀 세 가지 의자를 보여주었을 때 결과는 첫째가 고른 의자였다. 사실, 남편이 첫째와 성향이 비슷해 대충 짐작은 했었다.
당첨된 의자는 40만원으로 큰돈이 필요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하나 카톡방을 살펴보니 첫째가 앞서며 자기가 아르바이트 한 돈이 있으니 30만원을 내겠다고 한다. 둘째는 언니의 결심에 내심 다행스러워하며 나머지를 보탠다고 하고, 막내가 호기롭게 언니들 보다 더 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 생일 선물을 사는데 미루지 않고 서로 돈을 내겠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얘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면서 걱정을 한가득 하고 있는 남편에게는 내가 돈을 보탠다고 안심시켜 주어야 했다. 남편은 자기 선물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고 거절하면서도 속으로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드디어 생일에 맞춰 새 의자가 왔고 예상대로 남편은 기뻐했다. 이렇게 얘들과 합심해서 남편한테 선물을 하니 의미가 남달랐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남편이 한없이 고맙고 안쓰러우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생일선물을 핑계로 우리에게 의자가 되어준 남편한테 의자를 선물할 수 있어서 나도 얘들도 덩달아 기뻤다.
표현은 안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의자에서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자신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가족을 위해 평생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 온 인생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