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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Gervase
2009년 11월 28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Be vigilant at all times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환시를 통해 네 마리 거대한 짐승을 바라본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의 강대국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없어질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무너뜨리실 것이다. 주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희망의 성경이다(제1독서). 종말의 준비는 깨어 있는 삶이다. 매일의 기도와 선행에 힘쓰는 일이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종말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종말은 삶의 마지막입니다. 개인의 죽음입니다. 종말에 관한 말씀을 ‘자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해석이 쉬워집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늘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것이 종말의 근본적인 준비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며 살았다면 기도 속에서 운명하게 됩니다. 종말 역시 주님의 이끄심인 까닭입니다. ☆☆☆ 우주의 종말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개인의 종말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음으로써 나는 심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종말에 관한 모든 말씀은 죽음을 잘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 언젠가 프랑스 전쟁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질 무렵 백발의 늙은 사제가 형장으로 나아가 총살형에 처해집니다. 독일 군사들에게 항거하던 지하 조직을 숨겨 주다 발각된 것이지요. 같이 일하던 젊은 사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신부님, 훌륭하게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자 노사제는 웃으면서 답합니다. “훌륭하게 사는 것에 비하면 훌륭하게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 김순중 수녀- 루카복음 21장 34절에서 36절 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종말에 대한 묵상과 일상에 대한 성찰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보다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실 수는 없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양승국신부- 가톨릭 다이제스트란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가 지닌 매력 중에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편하고 부담 없이 읽힌다는 것입니다. 이 잡지는 신앙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다이제스트사는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이 잡지를 전국 소년원이나 교도소, 사회복지시설, 군인 본당 등에 매월 선물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 저희 아이들을 위해 빠짐 없이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12월호를 펴들었습니다. 매월 그랬듯이 이번 호에서도 가슴 뭉클한 한 사연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 쪽 형제들은 모두 가수 뺨치는 노래실력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누님 한 분만은 돌연변이에 속한다. 유독 이분만이 음이 자유로이 왔다 갔다 하는데, 참 이상한 것은 자신의 약점을 모르는지 노래를 할 때 너무 열심히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 누님이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오셨다. 대개의 가족 파티가 그렇듯이 대충 상이 치워지고 어린아이들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재롱이나 좀 보다가 끝을 낼까 하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누님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확실한 음정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러나 자신 있고 당당한 목소리로 그녀는 노래를 이어 나갔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와아! 우리 누님 노래 잘한다! 그런데 아니, 이거 최신곡 아냐?" 칭찬을 받는 누님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너희 매형한테 내가 매일 노래를 불러드린단다. 그 양반이 무슨 사는 재미를 느끼겠니? 또 내가 노래를 부르면 알아듣기나 하겠어? 그래도 나는 부르고 또 불러드린다. 내가 <어때요? 나 노래 잘하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을 12년 째 혼자 돌봐온 그녀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난 매일 매일 감사해. 아이들이 잘 커주었고 매형의 병도 더 악화되지 않아서 혼자 두고 얼른 미사에 갔다 올 수는 있을 정도이니까 말이야. 나 성당 반장 일도 맡았어"(손정호, 순례자의 노래, 2001년 12월호 참조). 남편의 기나긴 투병생활을 순교자적인 모습으로 감당해나가는 자매님의 모습은 참으로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의식도 없는 남편의 귓가에 대고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는 자매님은 마치도 천사 같은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십 이년이란 세월, 회복되리라는 기약도 없는 병간호를 기쁜 마음으로 해나가고 계신 자매님의 삶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결국 현실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자매님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불행이 다가와도 좌절치 않는 삶, 고통가운데서도 희망하는 삶, 끝가지 이웃을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매일의 삶에 철저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생과 영복을 누리는 백성이 되자. -경규봉신부- 이리하여 적그리스도가 일시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어 그들은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믿음 깊은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주권을 얻게 될 것이다. 지상의 강대국들은 맹수와 비교할 정도로 크고 강하며 화려하다. 더욱이 넷째 짐승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을 바수고 짓밟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강대국들이 맹수와 같은 짐승에 비교될지언정 천사나 사람에 비유되지는 않는다. 강대국들은 짐승처럼 영적인 것을 구하지 않고 물질적인 것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래서 짐승은 영적인 것을 구하지 못한다. 진, 선, 미를 추구하지 못하고 덕을 쌓지 못한다. 짐승에게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필요하고, 그것이 덕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덕이다. 바로 그러한 짐승처럼 강대국도 강한 힘과 물질의 풍요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다른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약탈하며 멸망시키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들에게는 승리가 덕이고, 강한 힘이 덕이다.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짐승에게 미래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미래가 없다. 결국 그들은 스러져 없어질 것이다. 그토록 거대하고 강하며 화려하게 보였지만 그 모든 것들은 무너져 내리고 멸망하고야 만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만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주권을 가지고 영원히 살 것이다. 영혼이 불사불멸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살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에 교회는 다시 한 번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함을 강조한다. 지상의 나라가 제 아무리 강하고 크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스러져 없어지고 멸망하고야 만다는 것을 가르치며, 우리의 눈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돌리도록 초대한다. 오직 영원한 나라는 하느님 나라임을 밝히며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만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릴 것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오늘 하느님 나라를 믿고 바라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느님 백성이 되자. 다시 용기를 내고 - 원영배-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의 종신부제 양성과정 5년을 함께했던 동기들끼리 공원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지난 6월의 부제품 이후 처음 모인 자리에서 서로 반갑게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제 각자 본당에서 소임을 맡아 고유한 탈렌트와 은사를 살려 봉사하고 사목하는 모습에서 흐뭇함을 느꼈다. 지난 5년 동안 여정에서 고락을 함께 한 든든한 동지였다. 특히 남다른 어려움을 헤쳐 나온 제시 부제와 부인 엘로이스를 보며 시련의 은총을 묵묵히 받아 안은 그들 부부한테서 경외심을 느낀다. 까치 설 -장재봉신부- 이제, 교회전례의 한 해가 마감되고 새 해가 열립니다. 이를테면 오늘이 교회의 ‘까치 설날’인 셈이지요. 어릴 적 섣달그믐 날에 가졌던 꿈과 소망을 새겨 봐도 좋겠습니다. 어릴 적에는 어른은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도 막막하고 두렵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이지요. 문득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주무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을 깨워서 구해달라고 했을 때 겁에 질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일을 기억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의지와 달리 풍랑을 만나는 일도 인생에서 고난을 당하는 일도 상황이 힘들고 괴로운 것도 예수님처럼 모두 하느님의 섭리라 믿을 수 있다면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평안합니다. +++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에 매어 백만 번의 염려나 걱정을 하는 일보다 한 번의 기도가 힘이 있는 까닭은 기도하는 마음에는 이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아주 황당한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글쎄 옛날 만화책 한 권에 천만 원이라는 것입니다. 1961년에 만들어진 만화책이라는데, 지금은 그 원본도 찾을 수가 없어서 천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6~70년대의 다른 만화책들도 있었는데, 그 만화책들 역시 적게는 오만 원에서 많게는 오백만 원까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만화책들 중에서 옛날에 우리 집에 있었던 만화책들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만화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횡재했을 텐데, 당시에 부모님께 구박받으면서 봤던 만화책이 지금 그러한 가치를 할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올 한 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반성하여 봅시다. 빠다킹신부 마무리하면서 -조명연 신부- 처음 신앙을 가질 때, 주님의 사랑을 매순간 느끼게 되고 -손영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여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우리에게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노아의 방주와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은 채 일상의 일에 몰입하고 있다가 멸망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성향이 잘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결심을 단단히 하여 하루아침에 술을 끊거나 마약을 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 한 생의 짧은 여정을 살아갈 유한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세상살이 자체에 몰입한 나머지 종말의 순간을 맞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 곧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회개하고 그 때에 잘 맞추어 준비할 것입니다. 저희 성당에서 이주일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그 때가 아마도 금요일 새벽인걸로 기억됩니다. 늦은 새벽시간 인적이 드문 때를 이용해서 도둑이 들었는데 그는 스댄으로 만들어진 정문의 대문을 훔쳐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문이 휑하고 허전했습니다. 만일 그 도둑이 언제 올지 알았더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그를 제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역시 그 도둑처럼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고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나를 이어주는 편안하고 독보적인 대화의 장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매순간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관철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종말의 시간이 슬픔과 공포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영광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하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맙시다. 그날이 오면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있더라도, 두 사람이 등산을 같이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일상에 평범한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 둘 것을 말입니다. 정말 필요하고 꼭 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의 삶을 점검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는 데 있습니다. 하루에 기도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도록 합시다. 그것도 어려우면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정성껏 십자성호를 긋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를 당신 안에서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도록 단 몇 분간만이라도 도우심을 구합시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의 뜻에 어긋난 것에 대해 단 몇 분간만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기도를 많이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순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도둑처럼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늘 회개하고, 늘 새롭게 살며, 늘 깨어 기다리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회개와 새로움과 깨어있음의 은총을 달라고 성령께 청하도록 합시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 마리아 수녀-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문구는 2005년 나의 좌우명이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올해도 역시 이 말씀을 선택했는데, 나의 이웃들은 때때로 이 말씀이 너무 어렵고 힘들지 않느냐고 한다. 참으로 자신을 살피고 예수님 안에서 늘 기도하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한다는 것을 특정 장소나 시간에 무릎 꿇고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심포니 -백광현 신부 - 예수님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양승국신부- <사제로서의 깨어있음> 인디언들은 11월을 이렇게 부른답니다. 11월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강물이 어는 달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 작은 곰의 달 기러기 날아가는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그런대로 지낼 만 했던 달, 11월도 벌써 저물어가고 있군요. 오늘은 교회 전례력 상으로 연말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입니다. 연말에 걸맞게 요즘 계속되는 복음내용은 주님의 날,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하라는 강경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듣기 섬뜩한 말씀, 너무 지나치다 싶은 말씀 때문에 한 동안 꽤 부담스러우셨겠지요. 그러나 강경한 경고의 말씀 그 이면에는 빗나가는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 자녀인 우리들이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녀인 우리들을 향한 사랑이 극진한 아버지시기에 때로 칭찬과 격려도 하시지만, 때로 매도 드시고, 혼도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질책은 우리가 제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망각합니다. 계속 회개하라, 정신 차리라는 주님 말씀도 있고 해서, 저도 최근 한 가지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그간 홀짝 홀짝 조금씩 잘도 마시던 술을 끊는 것입니다. 한 몇 일 금단 현상인지 의욕도 없고, 두통이 오고 그러더니 또 몇 일 지나니 온 몸이 얼마나 가벼워졌는지 모릅니다. 덕분에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하는데 펄펄 날아다녔습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그리고 감사하게 들려왔습니다. 요즘 자주 훌륭한 사목자들에 대한 글이나 이야기를 자주 접합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신의 사목자들을 칭찬하는 신자들을 바라보니 저 역시 기뻤습니다. 반성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상하고, 얼마나 인정이 많고, 또 얼마나 눈물이 많은지, 신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며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사제, 사제서품 이후 단 한 번도 식복사를 두지 않고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제, 미사 시작 1시간 전, 가장 먼저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는 사제, 조금의 돈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 찾아나서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의 돈도 쓰지 않는 사제, 죽기 살기로 자신의 축일행사를 마다하는 사제, 떠나갈 때 모든 것 그냥 두고, 모든 것 나눠주고 손가방 두 개만 챙겨서 떠나는 사제, 전철 잘 운행되는데 자가용은 무슨 자가용이냐며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제... 오늘 그 훌륭한 선배 신부님들로부터 다시 한 번 사제로서의 깨어있음이 무엇인지 잘 배웠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걱정은 내 몫이 아니야 -민경철 신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행동들인데 괜한 오해를 받고, 독기 서린 말마디에 -신금재- 지난 주일에 어머니 칠순 잔치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초대장을 만들고 케이크를 주문하느라 마음이 분주했고, 바로 전날에는 꽃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꽃가게를 여러 번 다녀와야 했다. 잔칫날, 어머니와 성당 노인회를 함께하는 분들을 초대해서 점심식사를 했고 가까이 지내는 교우들도 참석해서 기쁨을 나누었다. 즐거워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무척 기뻤다. -김웅태 신부- 오늘은 연중의 가장 마지막 날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의 하느님 -박상대신부- “늘 깨어 기도하라.”(36절) 이것이 한해 전례달력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위함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인자(人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가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매일미사의 복음을 묵상한 바에 의하면 인자의 재림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묵시적(?示的)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둑(마태 24,43; 루가 12,39)이나 덫(35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 하지 말라. 잘 못 골랐다간 낭패를 본다. 그러므로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인자의 재림은 준비된 ‘바로 그 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가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20), 인자의 재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다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 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독서와 복음말씀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발췌된 성서를 읽음으로써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는 누구에게나 그를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서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으로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정형(定形)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Α)요,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