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신화 60
세월의 흐름은 유수와 같아서 차갑게 느껴지던 바람은 따뜻하게 바뀌
었고 겨우내 얼어있던 산과 들과 강은 따뜻한 봄 햇살을 받고는 새로
운 생명들이 태어남을 알리는 듯한 즐거운 웃음소리로 사람들의 얼어
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 짐은 물론이고 은은히 흘러나오는 꽃향기
에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일체의 번민과 근심걱정 마저도 향긋
한 내음의 봄바람을 타고 사라져 버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날씨의 영향이 사람들의 걱정과 근심 등을 잠시나마 달래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여기에 그러한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은 보는 이
로 하여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
할 정도로 근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러한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연신 힘없는 한숨을 내쉬며 멍한 표정으로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아.. 운이는 대체 어찌된 걸까.. 휴.. “
여인은 바로 옆에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
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화린아! 또 정원에 나와 있었구나? “
“아! 오라버니 나오셨어요? “
“그래! 화린이 네가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항상 이곳에 나와
있었으니까 말이야. 흠.. 또 운이 걱정하고 있던 거야? “
화린이라 불린 여인.. 그렇다. 바로 이들이 사천으로 떠났던 추남과
화린이었던 것이다.
화린은 말 없이 힘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거림으로써 대답을 대신
했고 추남도 그런 화린의 마음을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
기에 말없이 화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화린아.. 너무 걱정하지 말어. 운이가 어떤 아이니? 아무 일 없을 테
니까 걱정하지 말아. 갑자기 사라져서 반년이 넘게 소식이 없다고는
하지만 곧 우리 앞에 보란 듯이 멀쩡하게 모습을 보일 거야. 반드시 운
이는 무사할 거야. “
“하, 하지만.. “
화린은 추남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추남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눈빛을 마주 대하고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정원을 바라보았고
한참 후에야 추남이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화린아 우리 이렇게 풀 죽어 있지 말고 운이 녀석 보란 듯이
맛있는 것도 많이먹고 재미있게 놀아야 하잖아? 응? “
화린은 일부러 즐거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추남의 행동을
보고는 옅은 웃음을 지어주며 그녀 역시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났다.
“그래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풀죽은 모습으로 있다가 만약 운이가
나타나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
“그래! 잘 생각했어. 참! 오늘 마침 화운문의 본문에서 파견한 제자들
이 사천에 도착한다고 하던데.. 같이 구경가지 않을래? “
“좋아요. “
강운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그 동안 추남은 화린과 더욱 가깝게 지내
며 흠모의 정을 키워 왔었지만 그것을 화린에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었다. 강운의 생사가 불분명한 이 때에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기에
는 너무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도 늘 강운의 일이 걱정되긴 했지만 화린은 그 도가 심해서 자신
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지금처럼 멍한 눈빛
으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화린이 다시 기운을 내고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다
면 그것은 추남으로서는 강운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다음으로 기쁜 일
이라 할 수 있었다.
화린과 함께 밖으로 같이 나간다는 생각에 추남은 기쁜 표정을 숨기
지 못하고 얼굴에 함지박한 웃음을 지으며 외출할 간단한 준비를 마
치고 화린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추남과 화린이 묵고 있는 곳은 사천 제일루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사천에서 만큼은 제일가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객잔이었다.
성주는 물론이고 가끔씩 황실에서 직접 파견 나오는 고관대작들이 들
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천 제일루는 자신들이 사천 제일의 객잔임
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만약 일반 사람들이 속사정을 알았다면
웃음거리를 자아내게 만들 충분한 소재거리가 되었겠지만 사천 제일루
는 그런 이유가 없다 하더라도 그 음식맛과 시설수준 만으로도 충분
히 사천 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화린이 내려오기를 기다릴 동안 추남은 점소이에게 차를 시켜서 차에
서 흘러나오는 그윽한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던 중 옷
을 갈아입고 간편한 궁장차림으로 내려오고 있는 화린을 보고는 쿵쾅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그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말았
다.
“아! 뜨, 뜨거워! 으윽! “
그 동안 계속 객잔에만 머물러 있다가 모처럼 만에 바깥 외출을 하게
된 화린은 오늘 하루만큼은 강운에 대한 걱정을 접고 추남과 함께 있을
작정이었다.
추남이 화린에 대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는 하지만 화
린은 여자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추남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고 있음
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고 그녀 또한 결코 추남이 싫지 만은
않았던 터라 지금까지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다만, 지금은 강운이 행방불명된 상황이었기에 추남이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고 해도 화린은 추남의 그런 마음을 받아들여줄 심적 여유가
없었다.
뜨거운 차를 한꺼번에 들이마심으로써 식도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던 추남은 화린이 그런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되자 재빨리 표정을 원상복귀 시켰다.
“허, 허흠! 화린이 내려왔구나. “
“후훗! 예.. 오라버니.. 그런데 좀 괜찮으신가요? “
추남은 화린이 이미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
설픈 동작으로 딴청을 피웠다.
“응? 내, 내가 뭐.. 흠!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러니? “
“아니요.. 괜찮으면 됐고요.. 후훗! “
추남의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화린은 연신 입을 가리고 웃음을
지어댔고 비로서 추남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화린이 모두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화린이 저토록 즐겁게 웃을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화린아 나갈 준비 끝났으면 서둘러 나가자. 이미 사천으로 몰려든
무림인들은 모두 화운문의 제자들을 보기위해 몰려나갔을 거야. “
“그래요. 저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길래 천하의 무림인들이 그들을
떠 받들고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
그 동안 추남과 화린은 사천으로 오는 내내 화운문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떠들어 대는 무림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 강한 무림인들이 너도나도 일방적으로 어떤 한 문파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은 비단, 무림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 또한 예외이지
않았다.
추남과 화린은 오늘에서야 그 동안 궁금했었던 의문점들을 풀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운문이 사천 땅에 발을 딛게 되었으니 사천이야 말로 마교로부터 가
장 안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바뀔 수도 있는
그런 위험천만한 곳이었기에 추남과 화린은 앞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묵언으로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결코 강호의 분쟁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사천 땅으로 온 것도 강운을 찾기 위함이지 결코 강호의 일에 끼
어들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추남과 화린이 사천 제일루를 벗어나 거리로 모습을 드러내자 과연 거
리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에 사람들이 있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문제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하나하나의 사람들이 모두 병장기를 소지하고 있는 무림인이라는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