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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오영록 시인
아침 일찍 웹서핑을 나섰다. 서핑이라야 여기저기 문학 사이트에서 시를 읽는 것이다. 문득 이 시는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가 많았다. 여기에서 시란 무엇인가? 정말 늘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어떤 사물과 환경 속 에서 느끼는 나만의 독특한 감정이나 느낌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독자에게 상상의 범주 내에 있어야 상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색다른 나 만의 발견과 사유가 생겼을 때 그것을 시로 써야 한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단어의 조합은 정말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시를 쓰다보면 좋은 시 감동이 전해지는 시도 있고 그 렇지 않은 시도 있겠지만, 정말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사고의 깊이가 있어야 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다. 그 사고란 무엇인가. 단순히 지식 이나 지성 같은 것이 사고의 깊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감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나는 자세의 낮춤이라고 생각한다. 자세를 낮춘다는 것은 넓은 시야를 확보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러 각도에서 사물을 관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당연하고 빤한 평소의 눈높이만을 이야기 한다면 독자는 그 빤함에 지루함을 느끼고 말 것이다. 조금만 한발자국만 비켜서서 사물을 바라본다면 사물의 새로운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시인의 시선 이며 새로운 발견이 되는 것이다. 늘 빤한 이야기만 한다고요. 정말 한 발짝 비켜서서 사물을 바라보셨나요. 그리고 그 사물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셨나요 그 사물이 하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사물에 말 걸기를 시도는 해보셨나요. 이것도 다 훈련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사물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기도 하고 사물이 시의 완결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시인은 그저 사물이 하는 말만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사물이 하는 말로 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색다름이며 낯설게 하기 입니다.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은 그 한 발짝을 옆으로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면에서 바라보기만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비켜서면 그동안 내가 보았단 측면의 새로움이 산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입니다. 일반 독자들은 늘 정면만 바라봤지만, 살짝 비켜서서 보는 것이 시인의 눈입니다. 그렇다고 사물의 뒷면을 이야기 한다면 독자는 공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허니 아주 조금만 일상을 측면을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 그 어던 사물도 시의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것도 독자에게 공감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을 내가 먼저 감동을 해야 독자도 감동을 할 것입니다. 내가 감동하지 않는 것을 독자에게 감동하라고 하면 독자에 대한 고문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시가 어쩌면 독자를 고문하는 바람에 작금의 시단이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자신이 시를 쓰기 전에 감동하고 써 놓고 감동하고 울고 웃고 해야 독자도 따라 울고 웃고 하지 않을까요. 시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감동이 미소가 울컥함이 짜릿함이 없을 때는 그저 묵묵히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오늘은 내가 먼저 감동하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누구도 감동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괜한 시간낭비 정력낭비 나무낭비 전력낭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감동이라는 것은 의외로 쉽습니다. 낮아지기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감동도 쉽게 오고 기쁨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늘 시인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 다. 오만과 자만 그리고 불만은 가급적 삼가는 것, 그리고 인애와 자애 사랑으로 사물을 바라보기입니 다. 당신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뇨~ 노력하고 있습 니다. 늘 깨어 있으려 선자의 걸음을 놓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정답은 최선의 노력이겠지요.. 오늘도 장문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조비와 조식 - 칠보시
삼국지연의에 보면 조조의 아들 셋이 있다. 말이 조비와 둘째 조창 그리고 셋째 조식이 있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조창은 용감하고 무예를 겸비하였으나 권좌를 노릴 위인이 못되었지만, 셋째 조식은 달랐다. 학문이 깊은 데다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조비는 조식을 죽일 생각으로 칠보 시라는 것을 하여 죽이려고 했다
조비는 조식에게 소 두 마리가 싸우다가 한 마리가 밀려 구덩이로 떨어지는 모습의 그림을 보여주며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그 그림을 묘사한 시를 짓되 "두 소가 싸워서 한 마리는 우물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말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제약을 걸었다. 제대로 시를 짓지 못하거나 조건을 어기면 사형을 시키겠다고 했다. 조식은 즉시 걸옮을 떼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두 덩이의 고기가 길을 가 지런히 가는데
머리엔 볼록한 뿔이 달렸구나
서로 철산 밑에서 만나
홀연 서로 싸움이 벌어지네
한 고깃덩이는 토굴 속으로 쓰러진다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운을 다 쏟지 못한 탓이로구나
조식은 정확히 일곱 걸음째에 시가 끝났다고 하는데 조비와 조식의 권력 싸움을 어느 정도 빗댄 의미가 숨겨져 있다. 조비는 조식의 재능에 감탄했지만 일곱 걸음을 너무 늦게 떼었다는 핑계로 다시 자신과 조식의 둘의 관계인 형제를 묘사하는 시를 지으라면서 형이나 형제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도 아닌 그냥 말이 떨어지는 즉시로, 그러자 조식은 즉시 다음 시를 읊기 시작했다. 흔히 이 두 번째 시가 칠보시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에는 걸음을 걷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 시는 콩을 삶는 것에 대한 시라고 해서 자두시라고 부른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솥속의 콩이 울고 있구나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어찌 이리 급하게 삶아대는가
다른 세설신어에는 실린 시는 약간 다르다
콩을 삶아 국을 끓이고
가마 밑에선 콩깍지를 태우니
솥속의 콩이 울고 있구나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어찌 이리 급하게 삶아대는가
이는 한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한 핏줄인 자신(콩), 형 (콩대/콩깍지)이 지나치게 핍박하고 있음을 묘사한 시며, 그 뜻을 알아들은 조비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뉘우치는 마음을 품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결국 조비는 조식을 죽이지 않는 대신 수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끝냈다.
보면 알겠지만, 저 두 시 모두 은근히 자기를 높이고 형 조비를 까는 내용이 들어있다. 앞의 시는 대놓고 '내가 경쟁에서 밀리긴 했지만 그게 내 능력이 딸려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암시하고 있고, 뒤의 시는 조비의 소갈머리가 좁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래도 정말로 '형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형제간에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냐'라고 하소연하는 내용도 포함한 절묘한 시다. 조비도 저런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자기를 까는 걸 알지만 다른 의미도 알아채고 감동해서 살려준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인가? 얼마나 숙성해야 좋은 시가 되는가? 이 칠보시를 본다면 즉흥적 감정의 단상이 아닌가? 시를 오래 생각하거나 오래 주물럭거린다고 좋 은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칠보에 이런 명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땅에 곡식이 잘 자라듯이 씨앗이 발아되려면 알맞은 수분이 필요하듯이 시인은 항상 시를 쓸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식은 칼 앞에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조식은 늘 시와 함께 살았다. 그런 이유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은가? 시란 이런 것이다.
환삼덩쿨을 산삼이라고 벅벅 우긴다고 거름을 주고 약을 뿌리고 기도를 한다고 그것이 산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환삼덩굴 잎도 산삼 잎과 비슷하기는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옥토로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거름이다. 적당한 수분이 있어야 한다. 좋은 햇빛이 들어야한다. 이것은 각자가 얼마큼 시를 사랑하는가에 달려있다. 어느 교과서에도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는 않다. 그저 이런 것일 거라는 것 정도이다.
위 시를 보면서 이번달 아버지라는 시제를 시를 짓는 다면 어떻게해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끌고가야 시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시를 높이려면 아버지라는 언어와 존경한다는 말과 따르고 싶다는 말과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시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는 관념어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조식이 콩과 콩대를 가져와 형과 자신을 이입시켰듯이 다른 사물을 가져와 나와 아버지의 관계, 아니면 아버지와 가족 아니면 아버지를 상징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도입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금기시할 것은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의 최고였습니다 하는 이런 당연한 말이 들어간다면 이것이 바로 산문이 되는 것이다.
늘 시와 산문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이유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러므로 누구의 시를 백 퍼센트 다 소화했다고 하는 것은 자만에 불과하다. 전후 사정을 다 빼고 이 시를 읽는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소화할 수 있을까? 기승전결이 있으니 처음에 독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두는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 독자가 내 손아귀에 들어온 다음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던 패대기를 치던 독자는 꼼짝없이 당하는 것이다
독자가 들어도 지도하지 않았는데 혼자 엎어치기에 축에 어퍼컷을 날리고 있다면 이것은 광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머리채를 잡는 순간 다시 도망칠 수 있으니 살짝만 열어두시기 바란다. 다 아신다고 생각하시는 순간 그것이 바로 허점이라는 사실도 아셔야 한다. 시는 자만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고 탐해야 하는 것이 시일것입니다. 오늘도 주저리가 깁니다.
* 내용 중 일부는 차용했습니다
시란 무엇인가(269) 시제에 대한 시대적 변화
오영록
제목에 대한 시대적 변화(269)
오늘은 시의 제목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또 시간을 냈습니다. 예전에는 명사형 제목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변했나요.. 네네 문장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도 명사형 시제다 안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명사형 시제가 적당한데 궂이 문장형 시제를 택할 이유는 없지만, 요즘 추세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명사형 시제는 명료하여 시의 내용을 자칫 설명문으로 읽힐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장형 시제를 쓴다면 그것을 어느정도 커버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신춘문예시들을 한번 보겠습니다.
2024년 시들입니다.
솟아오른 지하 (경상일보 황주현)
채렴을 읽다(경상일보 시조 문윤정)
어시장을 펼치다(서울신문 시조 강성재)
해변에서(국제신문 박유빈)
휠체어의 반경(국제신문 시조 조은정)
면접 스터디(문화일보 강지수)
푸날라우 베이커리(오륙도 신문 신재화)
특별하다는 것(오륙도 신문 시조 전이안)
시운전(매일신문 강지수)
무겁고 가벼운(매일신문 장인회)
산벚꽂 피는 달(불교신문 김제이)
알비노(전북일보 최형만)
달로 가는 나무(경인일보 김문자)
달을 짜다(강원일보 황영기)
둥근 물집(한라일보 우정인)
민달팽이 길(한라일보 시조 천윤우)
엄마는 외계인(전북도민일보 최서정)
감정 일기(광남일보 송상목)
미싱(영남일보 성욱현)
감자밭에서 왜 양을 세니(한경신문 이사과)
펜치가 필요한 시점(부산일보 김해인)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박동주)
벽(조선일보 추성은)
스마일 점퍼(조선일보 조우리)
여기 있다(경향신문 맹재범)
// 그냥 뭐뭐 대충 보이는 대로 이정도이다. 단순 명사로 시제를 지은 시가 몇편이나 되는 가? /// 신춘문예는 시의 정석이다. // 이것을 고집하는 이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시는 시대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요즘 시경 300수를 읽어보시라. 당대 최고의 시라는 그 300수 중에서 읽을 것이 있는가? 오늘도 긴 시간을 허비했다. 시인인 나를 위해서~~ 진수성찬을 차렸다.
시와 제목의 거리는 멀수록 좋다. 예전에 처가집과 뒷간은 멀어야 좋다는 말과 똑 같다. 너무 가까우면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시와 제목의 관계도 그렇다고보면 된다. 연애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너무 다 보여주면 금세 실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트려 놓으면 이 또한 연애의 법칙처럼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적당한 거리가 얼마큼일지는 많이 아주 많이 쓰다보면 그 거리는 자연스레 터득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밀당의 거리만큼 멀어야 하는 것이다. 향수를 너무 가까이서 진하게 맡으면 머리가 아픈 것처럼 적당한 거리라야 향기로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냥 무턱대고 향기가 진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은은하게 맡을 수 있는 시와 제목의 거리가 중요하다. 시인들은 그것을 잘 알면서도 시 코구멍밑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령 코밑에 제목을 붙였으면 시의 향기를 은은하게 감출줄 알아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의 뚜껑은 활짝 열어놓고 턱밑에다 대 놓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슴 두근거리던 연인들도 다 알고 나면 설렘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그래야 시가 팽팽해진다.
새들의 무덤 혹은 태양의 후예 / 오영록
새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미리 안다지
그 시간이 되면 태양을 향해 있는 힘껏 날아간다지
세상에 깃털이 부러지고 다 빠져 알 새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날아가 드리어 태양으로 든다지
그것이 새들의 운명이라지
울고 웃고 날고 하는 것은 그날을 위한 연습에,
훈련에 불과하다지
온종일 울었던 것은 뼛속을 비워 몸무게를 가벼이 하는 것이었다지
그것은 우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노래였던 거지
그렇게 영혼까지 맑아진 날개만이 본향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저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날고 노래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지
그래서 죽은 새를 볼 수 없었던 거지
어쩌다 보였던 것은 영혼이 맑지 않았거나
몸이 무거워 태양에 도달할 수 없었던 거지
그렇게 태양으로 들었던 영혼들은 다시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하지(夏至) 즈음 야밤 다시 회귀한다는 거지
그것이 날개들의 탄생이지
여름밤 은하수처럼 반짝였던 것이
회귀하는 새들의 눈빛이었던 거지
여름밤 회귀하는 영혼들의 반짝임을 보면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박수해야 한다는 거지.
* 나는 적당하게 띄운다고 했는데 너무 냄새가 나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