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겸의 「기상예보」 감상 / 최형심
기상예보
김백겸
하늘 흐리고 안개 낀 숲엔 우울이 내려와 있음
구름에 갇힌 빛살들
허공에 날개 자국을 긋고 가는 멧새
모두 표정을 남기고 있지 아니함
길 잃은 고아처럼 서서 플라타너스는 적막을 날리고
풀씨로 흩어진 슬픔은 북북동에서 북북서로 방향을 바꿈
폐부로 흘러드는 저기압의 음모
백마일 밖 한랭전선은 풀잎들의 잠 뿌리 뽑을
폭풍을 몰고 오는 중임
지금은 모든 사랑이 위험함
외투를 걸친 우리의 꿈
방독면을 쓴 채 큰길로만 다님
골목마다 비수를 품고 매복한 어둠
시간들의 휘파람이 대꼬챙이로 눈 찔러 오는 저녁
지금은 모든 생각이 위험함
문 닫고 굳게 빗장을 지른 거리의 불빛
창틈을 엿보는 소문과 함께
얼굴 까맣게 죽는 지금은
모든 그리움이 위험함
찬비가 내림
우산을 들고 사람들은 사람을 비껴감
낯선 총을 멘 겨울의 척후병들이 요소요소 서 있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시베리아 삼림을 막 빠져나온
러시아의 절망도 보임
공중엔 바람의 채찍 가득해
두려움에 야윈 나목들의 어깨 더욱 가늘고
겨울잠에 젖어 봄날을 꿈꾸는 개나리 새 눈
소롯이 숨결에 싸여 있는
한 개비 성냥으로 남겨논 최후의 불꽃임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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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반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지금 봐도 세련된 이 작품은 동서냉전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념대결이라는 “한랭전선”이 “폭풍을 몰고” 오자 사람들은 “굳게 빗장” 걸어 잠급니다. “골목마다 비수를 품고 매복한 어둠”으로 가득하고 “시베리아”에서 온 “겨울의 척후병들이 요소요소”에 서 있습니다. “찬비가” 내리고 “공중엔 바람의 채찍” 소리뿐이지만 누군가는 숨죽여 “봄날을 꿈꾸”었나 봅니다. 작은 “불꽃”들이 모여 마침내 영원할 것만 같았던 긴 냉전의 시대를 끝내고 말았으니까요.
최형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