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 (密敎, Vajrayana)에 대해서
요약
불교 유파. 현교(顯敎)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비밀불교·진언불교라고도 한다. |
설명
불교 유파. 현교(顯敎)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비밀불교·진언불교라고도 한다.
밀교의 연혁
인도 대승불교의 말기인 7세기 후반에 갑자기 융성한 유파로, 대승불교의
《반야경(般若經)》
《화엄경(華嚴經)》과
중관파(中觀派)
·유가행파(瑜伽行派) 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여기에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밀교의 독립은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등 근본경전의 성립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많은 밀교계(系)의 경전이 있었으며,
따라서 밀교의 뿌리는 멀리 베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즉, 베다시대에 만트라(mantra;진언)를 외고 양재초복(攘災招福)을 빌었으며
그 후 만트라를 신성시하는 사상도 나타났다.
원시불교의 교단에서는 치병(治病)·연명(延命)·초복 등 세속의 주술이나 밀법은 엄금하였으나
그 뒤에는 이들을 인정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대승불교시대에는 대승경전 속에 다라니[陀羅尼(타라니);dh?ran?]·비디야[明呪(명주);vidy?]가 해설되고 독립된 밀주경전(密呪經典)도 이루어졌다
밀주경전에는
공양법·결계작단법(結界作壇法)·
호마법(護摩法)·
인계(印契)·다라니·
만다라 등도 해설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불교의 본류가 아니고 잡부밀교라고 하였다.
그 뒤 650∼700년경에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밀교적 실천에 의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를 순수밀교라고 하고
이 때부터 밀교가 독립한 것으로 본다.
전설에 의하면 진언밀교는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스스로 깨달은 비밀법을 금강보살에게 전수하고 그것이
용맹(龍猛)·
용지(龍智)에게 전해졌다고 하나 역사적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인도밀교는 그 뒤
진언승(眞言乘)·
금강승(金剛乘)이라 불리며 수세기 동안 발전했으나
점차 본래의 성격을 잃고 힌두교의 성력파(性力派) 등의 설(說)을 도입한 좌도밀교(左道密敎),
즉 탄트라불교가 되어 13세기 초까지 전해지다가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괴멸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다라니와 주술적 요소를 내포한 밀교적 경전이 동진(東晉)시대의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
담무란(曇無蘭) 등에 의해 번역되어 남북조(南北朝)·수(隋)·당(唐) 초까지 단속적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입은 8세기 초엽부터 중엽에 걸쳐서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가 차례로 당나라에 찾아가
선무외가 《대일경》을,
금강지가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비로소 조직적인 밀교경전이 갖추어졌다.
또한 불공(不空)이 스리랑카에 가서 밀교를 배워 와
80여 부의 밀교경전을 비롯한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밀교를 대성시키고
현종(玄宗)·숙종(肅宗)·대종(代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중국의 밀교는 당나라 조정의 권력을 배경으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당대 말에 점차 쇠미해졌다
한편 인도밀교는 8세기 말에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티베트에 전해져,
얼마 후 민족종교인 브라만교와 합하여 라마교가 되었다.
그 뒤 라마교는 1042년 아티샤의 개혁 이후 몽골과 중국 동북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에는 헤이안[平安(평안)]시대에 당나라에서 밀교가 전래되어 공해(空海)에 의해 진언종이 개창되었다.
밀교의 특징
① 불타관(佛陀觀)으로는 대일여래를 본불(本佛)로 하고 많은 부처·보살·명왕(明王)·천(天) 등을 모두 대일여래의 화현(化現)으로 보는 범신론적·통일적 불타관을 구성하였다. 또한 이를 직관적으로 표시하는 방법으로서 여러 부처의 집회를 도식으로 나타냈는데 이를 만다라(曼茶羅;mandala)라고 하며, 만다라에는 금강계(金剛界)만다라와 태장계(胎藏界)만다라가 있고 이를 합하여 양계(兩界)만다라라고 한다. 이 밖에 부처·보살·명왕 등의 일존(一尊)과 그 권속을 표시한 것을 별존(別尊)만다라라고 한다. 또한 대일여래를 보문총덕(普門總德)의 본존으로 하고 부처·보살·명왕 등을 일문별덕(一門別德)의 본존으로 하여, 일존을 숭배하더라도 결국 대일여래의 신앙으로 통일된다. 이를 일문즉보문(一門卽普門)이라고 한다.
② 이들 제존(諸尊)을 믿을 때에 진언·다라니를 왼다. 진언은 진실을 의미하며 제존을 찬탄하고 또는 제존에 귀의하는 비밀어로, 명주(明呪)라고도 한다. 다라니는 총지(總持)라고 번역되며 특정 문구에 따라 종교상의 깊은 의미를 일념(一念)으로 통일하는
의미이지만, 나중에는 진언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진언다라니라고 하였다. 이 진언다라니를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외면 신비한 힘이 생겨 번뇌를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밀교를 진언밀교·진언다라니종(宗)·진언종이라고 하는 것은 진언·다라니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③ 제존을 믿을 때, 인계(印契;mudr?)를 맺도록 되어 있다.
④ 제존에 대한 공양법이나 호마법·관정의식(灌頂儀式)을 시행하며, 이들에 대한 많은 의식법규가 있다.
⑤ 인간에게는 각각 본유본각(本有本覺)의 정보리심(淨菩提心)이 있다고 믿고, 보리심을 일으켜 삼매야(三昧耶)계율이라는
밀교 특유의 계율을 지키면서 십선계(十善戒)를 실천할 것을 강설하고 있다.
⑥ 즉신성불을 강조하고 삼마지(三摩地;sam?dhi)의 실행으로 즉신성불할 수 있다고 강설하고,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
아자관(阿字觀)·
월륜관(月輪觀)·
삼밀묘행(三密妙行) 등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밀교는 대승불교의 정통사상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종교형태를 이루어 왔다.
요약하면 밀교는 교상(敎相;교리)과
사상(事相;실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교상과 사상은 수레의 양바퀴 또는 새의 양날개와 같다고 하고,
이 양면의 조화 위에서의 종교체험을 존중하여,
이미 고정화·이론화한 대승불교를 대신하고 새로운 실천적·신앙적 불교로서 성립·발전해 왔다.
또한 밀교는 독자적인 밀교미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한국의 밀교
한국에 밀교가 들어온 시기는 삼국시대로,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8세기부터 순밀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후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성
한국 밀교의 특징은 실천면이 강조되었고,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진언지송(眞言持誦)만을 존중하였다.
특히 타종의 교학과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
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 소산으로서 성립부터
무리없이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밀교는 특히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1298년(충렬왕 24)에 원참이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많은 밀교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의식에서도 밀교화된 정토관계 진언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석실(石室)은 실제로 이 신앙을 널리 펴는 데 힘을 기울였던 고승이다. 한국의 밀교와 정토는 이와 같이
신앙·교학·사상·역사의 측면에서 원융(圓融)한 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밀교와 선
밀교와 선은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도선(道詵)은 밀교의 여러 가지 작법의식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고려시대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고,
고려 말에는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선과 밀교의 융섭이 더욱 발전되었는데,
《능엄경(楞嚴經)》은 《금강경》과 함께 선종의 소의가 되는 경으로서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운수단(雲水壇)》 《설선의(說禪義)》 등의 의식집을 편찬·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선과 밀교의 관계가 교학·의식은 물론 신앙 속으로까지 융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