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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앰 댓 상권 맨 마지막 글입니다. 아이 앰 댓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 온 구도자들과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와의 대화를 녹음했다가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구도자들은 인간 지성의 정점에 선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수행자라서 추켜세우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인간(구도자 포함)은 어리석고 인식의 한계가 있지만 대부분 이렇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하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 세상 모든 것이라고 믿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흔히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만은 아닙니다. 물질 너머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직 물질 너머를 본 적이 없는 인간으로써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이것은 인식확장의 문제이고 체험의 문제입니다.
선가禪家의 모든 이야기들.. 그리고 깨달은 모든 이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모든 경전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 말은 "나는 그것이다"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모든 구도자들의 궁극적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고 하는 그 놈으로 인해서 세상 만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올린 아이 앰 댓을 지금까지 읽어오신 분이 계신다면 약간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 혼란은 몸과 마음에 대한 자기동일시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질문들과 답들이 오가고 있지만 이 모든 질문의 끝에는 "나는 누구인가?"가 자리하게 될 것이고, 니사르가다타 마라하지는 수 많은 대답을 하고 있지만 그 대답의 끝은 "나는 그것이다"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수행이라는 것의 최종적인 지점은 "나는 그것이었구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행위로서의 결론은 아니고 실존적인 체험에 기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내가 붓다라고 상상하거나 붓다라고 여긴다고 해서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제부터는 '아이 앰 댓' 하권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평안한 밤들 맞이하시길..
아이 앰 댓 상권 55. 모든 것을 포기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문: 지금, 이 순간 선생님의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M: 비체험의 상태지. 하지만 그 속에는 모든 체험이 담겨 있지.
문: 선생님께서는 타인의 마음과 가슴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체험을 공유할 수 있으십니까?
M: 아니야. 그런 일을 하려면 특별한 수련을 쌓아야 해. 난 밀을 파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빵과 과자에 대해선 잘 몰라. 밀죽 맛조차도 모를거야. 그러나 곡식으로서의 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나는 모든 체험의 원천을 알고 있어. 그러나 체험이 취할 수 있는 무수한 특별한 형태는 잘 몰라. 그리고 알 필요도 없어. 그때그때 생활에 필요한 조금의 일들은 우연히 알게 되는 것이고.
문: 선생님이라는 특정한 존재와 저라는 특정의 존재는 창조주(브라마)의 마음속에 공존합니까?
M: 보편자는 개별자를 몰라.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개인적인 일일 뿐이야. 개인은 시공 속에 존재하면서 이름과 형상을 지니고 시작과 끝이 있지만, 보편자는 모든 인간들을 포함하며 절대자는 모든 것의 뿌리에 있으면서 모든 걸 넘어서 있다네.
문: 저는 전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 의식과 선생님의 개인의식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입니까?
M: 꿈을 꾸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문: 서로에 대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M: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고 있는 짓이라네. 모두가 "타인들"에 대해 상상을 하면서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지. 찾는 사람이 연결고리인 것이지 다른 건 없어.
문: 의식의 점들인 우리들 사이에는 틀림없이 공통의 요소가 있습니다.
M: 그 점이라는 건 바로 자네의 마음속에 있는 거야. 자넨 자신의 세계가 마음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자네가 타인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자네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우선 자신의 마음을 알도록 해. 그리하면 타인의 마음이라는 문제는 전혀 생기지 않게 될 거야. 왜냐하면 타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자네야말로 마음들 사이의 공통 요소이며 유일한 연결점일세. 존재는 곧 의식이며 "내가 있음"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야.
문: 최고의 실재는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 자넨 지금 "나는 지금 물건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한데, 그렇지만 공간이 나한테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 않으면 "난 우유와 차, 커피 소오다가 필요해. 그렇지만 물은 필요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
최고의 실재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그러나 자네가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아무 소용없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런 이점이 없어.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어.
탐욕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그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니 말이야. 이점이라는 생각 자체가 그에게는 낯선 개념이야. 그는 끌어모으는 것을 싫어해. 그의 인생은 끝없이 자신에게서 빼앗아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이지.
문: 만약 궁극적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무런 이점이 없다면 왜 그 고생을 한단 말입니까?
M: 고생을 하는 건 뭔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는 아무런 말썽도 생기지 않아. 적은 것을 포기하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어.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면 모든 걸 얻을 수 있지.
그때, 인생은 원래 그러해야 할 모습. 즉 고갈되지 않는 원천으로부터 순수한 빛을 발하는 상태가 되지. 그 빛 속에서 세계는 꿈처럼 나타나게 된다네.
문: 만약 저의 세계가 꿈에 불과하고 선생님께서 그 일부라면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꿈이 실재가 아니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실재가 거기에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까?
M: 꿈은 꿈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거라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거기에 머무르려는 자네의 욕망이야. 내버려 두라구. 그 꿈이 자네의 것이라는 생각을 그만두게.
문: 선생님께서는 꿈꾸는 사람이 없이 꿈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제가 저 자신을 저의 달콤한 의지와 동일시하는 것을 당연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꿈꾸는 자이며 동시에 꿈입니다. 꿈을 멈출 자는 누구입니까?
M: 꿈은 그냥 펼쳐지게 내버려 둬. 그건 도리가 없어. 그렇지만 꿈을 꿈으로 보고, 꿈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잖아?
문: 지금 여기에 제가 선생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제가 꿈을 꾸고 있고 선생님께서는 제가 꿈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지켜봅니다.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입니까?
M: 자네를 깨우려는 뜻을 가진 것이 연결고리야. 내 가슴이 자네가 깨어나기를 원하고 있어. 내 보기엔 자네가 꿈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런 근심을 끝내려면 꿈에서 깰 수밖에 없다는 걸 내가 안다구.
꿈을 꿈으로 볼 적에 잠이 깨거든. 그렇지만 자네의 꿈 자체에 대해선 난 관심이 없어. 난 자네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야. 지금 자네 꿈에 대해 확정적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고 꿈을 좋다거나 행복하다거나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없어.
상상과 믿음을 멈추라구. 인간적 상태의 온갖 모순과 불일치. 호위와 고통을 보고서 그것들을 넘어설 필요를 느껴 보게나. 무한한 공간 속에 하나의 작은 의식 원자가 떠 있고 전체 우주가 담겨져 있다네.
문: 참되고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꿈속에 여러 가지 애착이 있습니다. 잠을 깨면 그것들이 사라집니까?
M: 꿈속에서 자넨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에게 그러지 않지만, 깨고 나면 자신이 사랑,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네. 개인적인 사랑은 아무리 강렬하고 순수하더라도 반드시 구속을 낳게 마련이지. 자유 속의 사랑은 모두에 대한 사랑일세.
문: 지나치다 만나는 사람을 사랑할 수야 있지만,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M: 자네가 사랑 그 자체가 되면 시간과 숫자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 하나를 사랑하면서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각각을 사랑하는 거라네. 하나와 모두는 배타적인 것이 아닐세.
문: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비시간적인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그것은 과거와 미래가 선생님께 열려 있다는 뜻입니까? 라마의 스승인 바쉬슈티무니를 만나 보셨습니까?
M: 그 질문은 시간 속에 있고 시간에 관한 것이로군. 자넨 다시 내게 꿈의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있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환상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지 시간 속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세.
자신을 바쉬슈타라고 불렀던 사람은 바쉬슈타를 알았어. 난 모든 이름들과 형태를 넘어서 있고 바쉬슈타는 자네의 꿈속의 하나의 꿈일세. 그러니 내가 어찌 그 사람을 알 수 있나? 자넨 과거와 미래에 대해 관심이 너무 많군.
그것은 곧 지속되고자 하는 갈망, 즉 소멸에 대비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기인한 거야. 그리고 자기가 지속되기를 바랄 때에는 타인들이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타인들의 생존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지.
그러나 자네가 생존이라고 부르는 것은 꿈의 생존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보단 차라리 죽음이 낫지. 죽을 때에는 깨어날 기회라도 있잖아.
문: 선생님께서는 영원성을 알고 계시니까 생존에 관심이 없으시지요.
M: 그 반대야. 모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영원성이지. 모든 집착은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야. 왜냐하면 만물이 일시적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두려움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는 연습한다고 생기진 않아. 그것은 자신의 참존재를 알 적에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야. 사랑은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은 사랑이 아니야.
문: 그러면 무집착을 얻는 길은 없는 것인가요?
M: 얻을 게 없어. 모든 망념을 쉬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아야 해.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집착을 벗는 것이야. 모든 갈애는 부족감에서 생기는 거야. 인간이 이미 구족한 존재라는 것을 알 적에,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요 또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욕망이 쉬게 되는 것이야.
문: 제가 저 자신을 알려면 자각을 연습해야 합니까?
M: 연습할 게 없어. 자신을 알려면 자신이 되는 것이야. 그리고 또 자기 자신이려고 할 때는 내가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라는 상상을 멈추어야지. 그냥 존재하라구. 자신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하라구. 뭔가를 찾느라고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
문: 만약 제가 깨달음을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M: 이미 지금 여기에 있는데 무엇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돼. 자신의 자아. 본성을 바라 보라구. 자넨 지금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좋아하지.
모든 상상의 추측을 그만 두라구. 그것이 모두야. 시간에 의존하지 말라구. 시간은 죽음이야. 기다리는 사람은 죽어요. 그리고 삶은 지금, 이 순간에만 있다네. 나에게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지마. 그런 건 오직 자네의 마음속에만 있으니까.
문: 선생님도 돌아가시게 되지 않습니까?
M: 난 이미 죽었어. 육신의 죽음은 내 경우에는 아무런 차이도 낳지 못해. 난 시간과 관계없는 존재야. 난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기억도 없고 미래에 대한 상상도 없으니까 말이야.
이름도 형상도 없는 곳에 어떻게 욕망과 두려움이 있을 수 있나? 욕망이 없어지면 시간도 없어지는 거야. 난 안전해.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야.
물론 자네의 몸 자체는 복잡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보호가 필요해. 그러나 진정한 자네는 그런 게 필요없어. 일단 자신의 불가침의 존재를 깨달으면 평안을 얻게 되지.
문: 온 세상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평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M: 세상이 고통을 겪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만약 자네가 세상을 돕고자 하면 자네가 먼저 도움의 필요를 넘어서야 해. 그리되면 자네가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 모두가 세상을 훌륭하게 돕게 돼.
문: 행동이 필요한 곳에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쓸모 있을 수 있습니까?
M: 행동이 필요한 곳에서는 저절로 행동이 생겨나. 사람은 행위자가 아니라 진행되는 일을 알고 있는 자야. 그의 존재 자체가 바로 행위이지. 창이라는 것은 벽이 없는 것이며, 그 없음으로 해서 공기와 빛을 주는 것이야. 모든 정신의 내용물들, 즉 모든 상상과 노력을 비워버리면 그 장애물 없음이 바로 진실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해 준다네.
만약 자네가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으면 그와 떨어져 있도록 해. 만약 자네가 감정적으로 도와주는 데에 얽히게 되면 실패하게 되네. 아주 바삐 움직이며 자애로운 자신의 기질에 흐뭇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되는 건 아니야. 사람이 정말 도움을 받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때이지. 나머지는 모두 쓸모가 없어.
문: 도움의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습니다. 뭔가를 해야 합니다.
M: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해봐. 그러나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한계 없는 것은 오직 본성일 뿐이야. 자네 자신이라면 무한히 줄 수 있어.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줄 수 있을 뿐이야. 오직 자네의 자성만이 무한하다구. 돕는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야. 심지어는 먹고 마실 때조차도 사람은 육신을 돕고 있지 않나. 본래 면목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
자네는 주는 일 그 자체로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고갈되지도 않아. 슬픔과 고통을 보며 그것과 함께 그냥 있어. 행동 속으로 돌진하지 마. 배움도 행동도 진정한 도움이 되진 못해. 슬픔과 함께 머무르면서 그 뿌리를 보라구.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참으로 돕는 것이야.
문: 저는 죽을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M: 시간이 없는 것은 육신의 문제이지 자네가 아닐세. 시간과 공간은 오직 마음속에만 있어. 자넨 아무런 굴레가 없어. 그냥 자신을 잘 이해하라구. 자네 자신이 곧 영원이니까.
아이 앰 댓 상권 - 끝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