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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작업 중 담배피는 인물.
`화이트팽`으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은 1904년 일본군을 따라 러일전쟁을 취재하면서 조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담배는 조선시대 최고의 인기 기호품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사진 캘리포니아 디지털 도서관
이들 집안 중 병자호란 때 주전파를 대표했던 김상헌의 형, 김상용의 후손들(장동 김 씨)은 특이하게도 대대로 담배를 금지했다고 <임하필기>는 설명한다.
담배는 광해군 14년(1622)에 왜에서 들여온 뒤 단 번에 인기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김상용의 딸에게 장가 온 장유(1587~1638)도 담배를 입에 달고 사는 지독한 애연가였다. 그는 이정구, 이식, 신흠과 더불어 '한문 4대가'로 불렸던 대학자이다.
그런데 장인 김상용은 사위가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병적으로 싫어했다. 김상용은 임금에게 주청해 '요망한 풀(담배)'이 유통되지 못하게 했으나 시중에서 담배가 근절되기는 커녕 더욱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김상용은 후금이 쳐들어오자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한다.
그러나 이듬해 적에게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한다. <임하필기>는 "김상용이 담배를 무척 싫어한 데다 그가 불 속에서 숨지자 장동 김 씨 집안에서는 대대로 담배를 금기시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기술한다.
사진2. 한문4대가로 불리는 장유 초상.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이자 효종비 인선왕후의 아버지인 그는 골초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는 누구이며 최고의 작품은 무엇일까.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초 안견을 제일로 쳤다. 궁중 화사였던 안견은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고 있는 불후의 명작 〈몽유도원도〉의 작가이다. 안견은 중국의 명작들을 보고 반복해 그리는 방식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중종때 권신 김안로(1481∼1537)가 쓴 <용천담적기>는 안견을 두고 "곽희를 모방하면 곽희가 되고 이필을 모방하면 이필이 되며, 유융도 되고 마원도 되어서 모방한 대로 되지 않는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산수가 가장 뛰어났다"고 했다.
사진3. 1664년(현종5) 함경도 길주목에서 실시된 과거를 묘사한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과거장의 모습을 유추해볼수 있는 그림이다. 연산군때 능지처참 당한 김일손은 수재로 과거에서 형들의 답안을 대신 써줘 합격시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에 따르면, 사실 안견이 가장 아꼈던 작품은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청산백운도〉였다. 안견은 항상 이 그림을 가리키면서 "내 평생의 정력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했다.
대제학을 지낸 성현(1439~1504)도 <용재총화>에서 "내가 승지가 됐을 때, 궁중에서 간수하던 안견의 〈청산백운도〉를보았는데 참으로 뛰어난 보물이었다. 요새 사람들은 모두 그의 그림을 금옥처럼 사랑하고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4. 안견의 사시팔경도.
조선 최고의 화가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하는게 큰 유행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대 명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안견의 작품을 소장하는게 유행이었다. 한훤당 김굉필(1454 ~ 1504)은 안견의 병풍첩을 소장했다.
남명 조식(1501~1572)이 이 병풍첩에 발문을 썼다. <남명집>에 따르면, 조식은 발문에서 "그린 지 백년이 지났지만 묘한 솜씨가 어제 와 그린 것 같다"고 했다. 이 병풍첩은 김굉필이 연산군 때 처형되면서 가산과 함께 적몰되어 도화서에 보관됐다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김굉필의 손자인 초계군수 김립에게 돌아갔다.
김굉필과 그의 스승 김종직, 김일손 등 절의를 앞세운 영남 사림들은 성종의 특별한 총애로 대거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지만, 연산군 4년(1498)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로 참혹한 화를 면치 못한다.
사초에 세조의 정권 탈취를 비판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게 빌미가 됐다. 제문을 직접 쓴 탁영 김일손(1464~1498)은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아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였고 사림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다. 윤근수의 <월정만필>은 "김일손이 수재였고 자신의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고 서술한다.
"탁영은 청도에서 자랐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경상도의 향시에서 늘 그가 장원이었다. 두 형인 준손과 기손도 탁영의 손을 빌려 모두 초시에 합격했다. 전시(과거의 마지막 관문)에서 탁영은 두 형의 책문(답안)만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그의 형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다음 과거 때 장원하려는 속셈이었다. 두 형이 모두 과거에 올랐고 준손은 장원이 되었다. 다음 과거 때 전시 시험관이 탁영의 문장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싫어해 2등을 주었다."
김일손은 과거에서 수석하지 못한 것을 늘 억울해했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1471~1527) 역시 과거에서 차석을 했다. <월정만필>은
"남곤이 과거방이 붙은 날 동년들과 함께 광화문 밖으로 나가는데 한 사람이 '네가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느냐. 중국에서는 소동파가,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모두 차석이었으니 이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유감으로 생각지 말라'고 하였다. 남곤이 하인을 시켜 누군지 물어보니 그가 바로 김일손이었다"고 적었다. -계속-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11.장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었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실록 밖의 인물評2]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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