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신채호 선생부터 김좌진·이범석 장군까지 독립투사들 거쳐간 기지… 지금은 흔적만 남아…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00리(274㎞) 길을 달려온 사내가 초여름 햇볕 아래 드러누운 평원을 바라봤다. 곳곳에서 장정들이 초가를 짓고 길을 내고 있었다. 부녀자들이 낫을 휘둘러 잡초를 벴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시(蜜山市) 쓰리와였다. 33세의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이강(李剛·1878~1954) 등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5만달러를 들여 항일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옥수수·감귤 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동포 1000여명이 조국 독립을 위해 모은 돈이었다.8일 오후 2시, 서울 구로구의 비영리복지단체 '인간의 대지' 사무실에서 만난 이 단체 이태복(李泰馥·59·전 보건복지부 장관) 대표는 동북아시아 지도를 펼치고 한 지점에 손가락을 찍으며 "오는 17일 항일유적기념비를 세울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미산시 쓰리와였다."미산은 지도에도 안 나오는 작은 도시예요. 중국 동포 인구가 2만명쯤 됩니다. 도산이 기지를 세우기 전까지 쓰리와는 정말 허허벌판이었을 거예요. 이 외딴 마을이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이 대표가 세울 기념비는 인근 산둥성(山東省)에서 공수한 가로 1m, 세로 2m짜리 대리석에 쓰리와가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는 지난해 7월 쓰리와를 처음 방문한 뒤, 지인들과 함께 기념비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백방으로 노력해왔다."일제시대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미산이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역사학자들 말고는 별로 없어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는 것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미산은 구한말까지 '펑미산(蜂蜜山)'이라 불렸다. 물산이 풍부해 '산에 벌(蜂)과 꿀(蜜)이 넘쳐난다'는 지명이 붙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큰 담수호인 싱카이호(興凱湖·4380㎢)가 기름진 평야에 젖줄을 댔다.그러면서도 외진 땅이 미산이었다. 지금도 옌지(延吉)에서 미산까지 가려면 차로 13시간이 걸린다. 일본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않고 인적도 드물었다. 러시아가 가까워 만약의 경우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다.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조선은 외교권을 뺏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을 다스렸다. 완전한 망국(亡國)은 시간문제였다. 도산은 장차 독립운동을 펼칠 기지로 미산이 최적지라고 판단하고 1909년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회원을 이곳에 파견해 쓰리와 지역의 광활한 벌판(2430에이커·297만4806평)을 사들였다. 1911년부터 본격적인 기지 건설에 들어가 초가 500채를 짓고 도로를 냈다. 농기구와 소를 사고 독립군이 타고 다닐 말도 구입했다.한국인 2000여명이 조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황무지에 논밭을 일구고 벼·옥수수·감자·콩을 심었다. 동명학교 교사들이 아이들과 청년들을 가르쳤다. 독립군 부대도 들어섰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명화(51) 책임연구위원은 "미산은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항일투쟁기지였다"며 "도산 안창호·단재 신채호 선생은 물론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청산리대첩을 이끈 김좌진·이범석 장군도 미산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다.도산 평전을 집필할 만큼 도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이 대표는 지난해 7월 쓰리와에 다녀왔다. 만주 마적 떼의 기습에 부하들을 잃은 서일 장군이 곡기를 끊고 자결한 언덕,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이 세운 마을 한싱동(韓興洞) 등을 둘러봤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군량미 마련을 위해 경작하던 논에도 갔다."그 논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이 지금도 '홍범도 도랑'이라고 불립니다. 독립운동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알리는 표시가 어디에도 없었어요. 국내 젊은이들과 현지 동포들이 미산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안타까웠어요."국내에 돌아온 이 대표는 "미산의 역사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지인들을 설득했다. 목원대 강용찬(62) 교수, 부경대 류청로(57) 교수, 경북대 류진춘(62) 교수, 중앙대 홍성종(53)·홍연표(53) 교수 등 지인 11명이 흔쾌히 힘을 보탰다. 기념비 제작비 1000만원을 마련한 이 대표는 우리 동포인 미산시 고맹군(56) 부시장과 김정득(68) 전 수로국장을 통해 미산시 정부에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올해 6월 초 미산시 정부가 "기념비 건립을 허가하는 것은 물론, 기념비를 세울 땅도 주고 주변 경관도 다듬어 주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중국 정부도 일본강점기 만주의 주된 항일독립세력이 조선 사람들이었고 그 거점이 미산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했다.미산에 운집했던 독립군들은 친일단체였던 일진회(一進會)와 일본·러시아 헌병대의 탄압을 피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기념비에는 도산이 재미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기지를 세운 과정, 붓과 벼루를 버리고 기꺼이 총칼을 잡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정이 한문과 한글로 새겨진다.오는 15일 지인들과 함께 쓰리와로 출발하는 이 대표는 "미산의 역사를 박아넣은 기념비를 내 손으로 세운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설렌다"며 "그 옛날, 그 외딴 땅에 들어가 피땀 흘리며 싸운 선조에 대한 빚을 조금은 갚는 것 같다"고 했다."앞으로 기념관도 세우고, 미산을 거쳐 간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비석도 세우고 싶습니다. 이런 사업은 원래 국가가 앞장서서 해야 하는 일이니까, 정부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요."
첫댓글 밀산뿐 아니라 독립 운동의 자취가 있는 곳, 애국 선열들이 피뿌린 곳에는 모두 우리의 감사함이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