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오케스트라 11년째 이끄는 바이올리니스트
아이들에 맞게 악보 편곡 지휘하는 방식도 새로 개발
1년 40여차례 연주회 가져
미국·홍콩서 초청하기도 23일 첫 단독 콘서트
'온누리 사랑챔버' 손인경씨
12일 오후 6시40분쯤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 선교관 2층 연습실에 20명의 아이들이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플루트를 들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한 아이가 손뼉을 쳤다. 또 다른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아다녔다. 앞뒤로 상체를 흔들며 "아~" 하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도 있었다. 발달장애(자폐증)·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손인경(44)씨가 방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제자리에서 악기를 들었다. 손씨가 손을 들어 지휘를 시작했다. 지휘봉 없이 손으로 주먹을 쥐기도 하고 손바닥을 펴보이기도 했다. 엄지와 검지를 붙이거나 새끼손가락만 들어 올리기도 했다. 손씨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손 모양으로 어느 음을 연주해야 할지 알려준다"고 했다. 이들은 장애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온누리 사랑챔버' 단원들이다. 1999년 손씨가 창단해 올해로 11년째이다. 손씨는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친다.
손씨는 미국 스탠퍼드대 음악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예일 음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외에서 연주활동을 하던 손씨는 1999년 4월 예술의전당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씨가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협연하는 모습을 보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소아마비를 가진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만(Perlman)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음악가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어요. 몸이 불편한 아이들에게 음악으로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손씨는 자신이 다니던 온누리 교회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교회 사람들에게 계획을 밝히자 1주일 후에 5명이 모였다. 손씨는 "신체장애를 가진 아이들만 가르치려 했는데 모두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왔다"며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사양할 수 없어 어떻게든 해보기로 했다"고 했다.
▲ 12일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손인경씨가 장애를 지닌 아이들로 구성된
온누리사랑챔버 단원들에게 연주를 가르치고 있다. 온누리사랑챔버는 23일 오후 7시 30분
강남구 세라믹팔레스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갖는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아이들을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다. 5분도 집중하지 못했다. 손씨가 아무리 반복해서 설명해도 아이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연습실을 뛰쳐나가거나 바닥에 떼굴떼굴 구르고 악기를 던지려 하는 아이도 있었다. 손씨는 "지적장애에 대한 이해 없이 보통 아이들과 똑같이 가르치려다 보니 생긴 문제였다"고 했다. 손씨는 책과 인터넷으로 공부하며 발달장애 아이들은 나름의 규칙이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배웠다. 손씨는 "아이들이 연습할 때 틀렸다고 중간에 지적을 하니까 혼란스러워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가르치는 법을 택했다"고 했다.
손씨는 "부드럽게 켜라"는 말 대신 활을 켜는 손을 간지럼 태우며 부드럽게 밀어줬다. 현악기에서 현을 누르지 않고 활로 켜서 나는 4개 음만으로 연주가 가능하게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악보를 편곡했다. 손씨는 지휘할 때 아이들에게만 통하는 암호도 만들었다. 음을 길게 끌어야 할 때는 "멀리 멀리"라고 말하고 악보에 쉼표가 있으면 "숨!"이라고 했다. 쉼표를 모르는 아이들도 크게 심호흡하며 한 박자 쉬어 갔다.
아이들이 차츰 바뀌었다. 연습 1시간이 넘어도 집중하게 됐다. 연주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무엇보다 연주할 때 웃으며 즐겼다. 연주할 때 갑자기 뛰쳐나가는 아이도 없었다. 창단 1년째 교회에서 첫 연주를 했다. 단원은 5명에서 12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연주회가 무사히 끝나고 손씨와 아이들 부모,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부둥켜안고 울었다.
손씨는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다"고 했다. 창단 초기부터 클라리넷을 배운 이완(26·발달장애 3급)씨와 첼로 연주를 하는 김어령(27·지적장애 2급)씨가 음악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현재 단원은 65명까지 늘었고 이들 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도 30여명이나 된다. 교회와 보육원·소년원·양로원 같은 시설을 돌며 1년에 40여 차례 연주회를 갖는다. 미국과 홍콩, 괌에서도 초청 연주회를 가졌다.
비올라 연주자 연제민(23·발달장애1급)씨 어머니 최금애(49)씨는 "10년 전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던 제민이가 이제는 손 선생님 손끝 하나에도 반응을 보인다"며 "일상생활에서도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이고 배려할 줄 알게 됐다"고 했다. 2001년부터 첼로를 연주한 이상용(22·발달장애2급)씨 어머니 박기화(55)씨는 "처음엔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고 자주 짜증을 냈는데 지금은 시선 처리도 자연스럽고 자신이 무대에서 박수받는 사람이 된 데 대해 행복해 한다"고 했다.
온누리사랑챔버는 오는 23일 오후 7시30분 서울 강남구 세라믹 팔레스홀에서 '밀알 음악회' 초청 공연을 갖는다. 교회가 아닌 외부 콘서트홀에서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65분간 연주하는 첫 단독 콘서트다. 비발디의 '사계' 같은 난이도가 높은 곡도 연주한다. 이 콘서트를 위해 몇 달간 강도 높은 연습을 해 왔다. 이날 연습도 밤 9시30분이 돼서야 끝났다. 손씨는 "벅찬 도전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이뤄낼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손씨는 "아이들이 나중에 직업 실내악단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손씨는 "각자 다른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며 화음을 내게 됐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과도 화음을 만들려 한다"고 했다.
< 조선일보, 2010. 1.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