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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생활선이다 (청아스님) 1
생명불교의 실천 목표
지난번 우리가 이제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같이 생각해 보았는데, 첫 번째로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불교, 즉 "생활실천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불교가 속해 있는 그 사회에 정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제반 정신 분야에서, 불교가 뒤쳐져서는 안됩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 내의 정신만 추구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다른 정신 활동 분야를 모르면, 결국 그 사회의 정신 문화계에서 뒤떨어져 결국에는 역사 속에 파묻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래서 그 사회에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분야를 다 이끌어 가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과학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성립되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점차로 불교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함께 동의하고 동참할 수 있는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가정이나, 사회 혹은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나 사찰만 잘 되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나와 더불어 모든 만물만생이, 생명이 함께 다 이익이 되고 잘 살게 되는 그런 방식으로 실천 수행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모든 생명이란 건 지구에 있는 생명만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생명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불교가 이러합니다. 즉, 원래 불교가 생활실천불교요, 현대과학불교요, 우주생명불교입니다. 그냥 이름을 현대에 맞는 용어로써 새롭게 쓴 것 뿐입니다. 이렇게 이 세가지 목표를 세워서 함께 실천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행 방법
그러면 오늘은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하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에 관하여 한 번 토론을 해 보죠. 그렇다고 옛날에 없던 것을 완전히 새로 하자는 건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도 다 있었고 그 시대 시대마다 사회 현상과 사람들에 맞춰서 이름을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저렇게 불렀을 따름이지, 뭔가 완전히 다르거나 새롭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인도에는 혹은 어느 나라이든지 간에 정신 수행을 하는 그런 방법들은 많이 있었어요. 그것들이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예요. 그래서 부처님꼐서 인도에 태어나셔서 깨달아 부처님이 되시기 전에, 이런 수행 저런 수행 많이 해 보셨어요.
이 집단에 가서 배워보고, 또 다른 집단에 가서 또 배워 보고, 그렇게 여러 번 하면서 그래도 만족이 안되고 충족이 안되니까, 이제는 스승없이 홀로 해야겠구나 해서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시다가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지요. 이런 사실을 간단히 보면, 그전에도 혹은 그 당시에도 많은 수행 방법들이 있었다 라는 것은 사실이예요. 그리고 어느 정도 부처님께서도 그걸 두루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처님의 수행 행적을 보고, 몇 가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수행 방법을 말할 때 당연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 이외에 다른 정신 수행 집단들의 수행방법들을 단지 배타적으로 취급하여서는 아니 되며, 각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불교 내부에서의 여러 종파들의 각각 다른 수행 방편들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떠한 정신 수행 단체에 있어서도 다른 수행 집단의 수행 방법을 탓하고 교정하는 것을 수행 방편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또한 그렇게 하셨습니다.
둘째, 수행 방편은 말 그대로 방편이고 방법, 즉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수행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가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모든 생명, 즉 방편과 이름을 떠나서 모든 중생과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이익되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수행 방편과 인연이 되어 그 수행 방법으로 수행을 시작하고 그 수행 방법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모두 이루면 그 수행 방법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은 변하지 않되, 목적을 향한 노력은 끊임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여러 수행 집단에서 수행하시면서 그 수행 집단의 좋은 제안을 마다하시고 목적을 향한 노력을 계속하시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무리를 이루어 어떤 수행 방법을 목적인양 고집하고 무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행자가 머무는 것은, 수행 목적을 위행 "수행 방편"을 포기하고, 먹고 살기 위한 "생활 방편"으로 취하게 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자가 무리 중에 대다수를 차지하고 이들에 의하여 그 무리가 운영된다면, 이러한 무리는 "수행을 위한 무리"라고 하기보다는 "생활은 위한 무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에 주의할 점을 부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듯이 어떤 수행 방편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모두 이루었을 때"라는 점입니다. 다른 이유들, 즉 단체 행동에 적응하지 않은 경우, 섣불리 자신의 사량으로 잘못 판단 결정한 경우, 혹은 수행 방편을 따라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 경우, 단체 내에서 자신의 위치의 유불리(有不利)를 따지는 경우 등등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 정당하거나 당당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깊이 생각할 점은 수행 목적과 수행 방편의 상관관계입니다.
예를 들면, 최종 수행 목적을 성취하는데 과연 몇 가지의 수행 방편이 필요한가?
즉, 수행의 단계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 방편이 필요한가?
아니면 하나의 최종 수행 목표에 오직 하나의 수행 방편만으로 충분할 수 있는가?
더욱 근본적인 점은 과연 방편이 꼭 필요한가? 뒤집어 말하면, 적절한 방편이 없다면, 수행 목적은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인가?
수행자는 자신이 택하고 있는 방편을 따라 수행하면서 이와 같은 점들을 깊이 그리고 진실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하여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절한 방편은 수행 기간을 단축시킨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범위에서 불교내의 여러 수행 방편들을 토론하고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견을 수렴하여 보겠습니다.
여래선
부처님께서 계셨을 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주신 수행 방편, 혹은 중국의 불교가 중국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 중국 조사들의 선수행 방법을, 이것을 조사선이라 하는데,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도에서 행하여졌던 선수행 방법을 사람마다 조금씩 정의 내리는 게 다르겠지만 주로 이러한 것을 '여래선'이라 그래요.
여기서는 어떤 방편이 주로 있느냐 하면, 현재 한국 불교에 그 흔적이 남아 있거나 부분적으로라도 행해지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예를 들면, 가장 쉽게 간단히 말씀드리면, 가부좌를 하고, 하나, 둘, 셋 이렇게 숫자를 마음속으로 계속 세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숫자를 세는 당체를 알아차리면서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집중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그런 방편이 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앉아서 숫자를 헤아리는 것 이외에 호흡, 즉 들숨 날숨의 현상으로 콧구멍 혹은 배에 집중하는 것, 걸어가면서 걸음걸이에 집중하는 것, 앉아 있거나 움직이면서 신체의 일부분 혹은 신체 바깥의 어느 점에 집중하는 것 등등의 방법이 있는데, 이것을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에 적용할 수 있으므로 일상선 혹은 생활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음을 좀 더 직접 다스리는 것으로, 예를 들면, 부정관이라고 하는 방편은 '아,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피와 구름, 똥과 같은 것의 집합체로서 깨끗하지 않다, 더럽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서, 이것을 영상이라고 하죠. 자기 스스로 그 생각과 매우 친밀해져서 육신에 대한 애착을 놓을 수 있게 되므로, 육신의 애착에 의한 마음의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어떤 특정한 집착을 놓게 하는데 좋은 방법들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을 참 좋아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좋아하는 사람도 실제로 보면 아주 얇은 두께의 피부 속에 피와 고름, 그리고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는 그런 몸뚱이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집착을 놓게 되고 갈망하는 마음을 쉬게 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비슷하게, 무상관이 있고, 또한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배양하는 이타관과 자비관 등이 있습니다.
이제는 생활선이다 (청아스님) 2
묵조선과 간화선
그 다음에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서 중국화가 되면서, 거기에서 부처님과 똑같이 깨달음을 얻으신 조사스님들이 행하고 가르쳐 준 방편, 그분들의 말씀, 그분들의 깨달음을 이룬 방편들, 이것들을 여래선과 대비하여 총괄적으로 조사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조사들의 가풍을 쫓아서 여러 가지 종류가 생기는데, 지금 우리에게 가장 말이 많이 되고 있는 것이 '묵조선'과 '간화선' 이예요. 묵조선은 가만히 앉아 쉬어가면서 자기 내면을 비춰 보는 거예요. 默자는 묵묵할 묵자이고, 照는 비출 조자이니까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묵조선의 병폐, 즉 좌선에만 의존함을 지적하여 대혜스님이 주창한 것이 간화선이예요. 看은 '볼 간' 자이고 話는 화두(話頭)할 때 화자로 '말할 화' 자예요. 화두를 본다 이소리예요. 화두라는 것은 깨우친 조사스님들이 공부인과의 대화에서 선지(禪旨)가 들어 있는 말씀으로 공안(公案)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화두는 약 천칠백 개 정도 있는데, 이중 하나를 택하여 참구하여 깨닫는 거죠. 그래서 간화선을 화두선이라고도 하죠. 이 간화선에서는 묵조선과 달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즉 걷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모든 행동과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히 있는 모든 때 화두의 의심 덩어리를 품고 참구하여 자성을 깨우치는 것으로 생활선을 지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제방의 선방이나 도량에서 참선 수행을 한다면 주로 이 간화선을 하고 있다고 봐야죠. 그런데 묵조선에서의 주된 병폐는 대혜스님이 지적하였듯이 치우친 좌선이지 묵조 자체는 아니라고 봅니다. 마음의 허덕거림을 쉬고 내면을 반조하는 묵조의 가르침은 분명 그 반조에 머물러 깨닫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묵조선의 병폐는 치우친 좌선인데, 오늘 우리나라의 선방에서는 간화선을 한다 하면서 오히려 좌선을 강조하는 면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루의 1/3 이상을 혹은 1/2 이상을 좌선을 하니까요. 더군다나 승가나 재가나 오래 좌선을 하면 할수록 즉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오래할수록 수행이 더욱 뛰어나다는 이상한 생각, 즉 비간화선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염불 및 기도 수행
또 다른 수행의 예를 들면, 대부분 초하루나 보름 사찰에 가면 기도하죠. 정근을 약 20분 내지 한 시간 정도 하죠. 도량에 따라서 '관세음보살' 혹은 '지장보살'을 한다든지, 또는 석가모니불 혹은 아미타불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예불하고 정근하면서 절을 하고, 대부분 사찰들이 그렇게 해요.
1년 내내 무슨 백일기도 들어가고 그 기도 끝나면, 무슨 49일 기도 들어가고, 또는 1,000 일기도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절에서 하는 기도를 접수하지 않으면, 뭐가 허전하고 해야 할 일을 안한 것 같고 또는 기도하는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면 이것은 무슨 수행법이냐 하면 염불 수행법이라고 그래요.
'염불선'인데 부처님 명호나, 혹은 보살님들의 이름을 지극 정성으로 소리를 내면서 마음으로 계속 염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염하느냐? 불보살의 근본 마음이 곧 나의 근본 마음이요. 불보살의 뜻이 곧 나의 뜻이요, 불보살의 大願이 곧 나의 대원이요, 불보살의 行이 곧 나의 행이요, 불보살이 곧 나이요. 내가 곧 불보살임을 곧장 보고 믿어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즉, 수행 목적을 곧장 자신의 근본 마음속에 합일시키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상생활에서 항상 이와 같이 마음으로 행하면서 닥치는 모든 것, 즉 좋은 일 나쁜 일 모든 일을 나의 근본과 둘 아닌 불보살에게로 돌려놓고 나아간다면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염불선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을 108배, 1,000배 혹은 3,000 배를 하면서 기도를 하거나 혹은 염불을 하면서 기도를 하기도 하며, 혹은 부지런히 염주 알을 돌리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각자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견성성불이 그 바람이요, 아픈 사람을 병이 낫는 것이요,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그것을 빨리 극복하는 것이요, 수험생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바로 그 바람들일 것입니다. 여기에 자력이니 타력이니 하는 말들이 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간절함만 있을 뿐, 바라는 주체나 이루는 주체가 따로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며, 되고 안 되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바로 각자의 자성불과 일체 불보살이 둘 아니게 하나로 통하여 간절한 바람이 법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감사하게 돌려 놓고,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않은 대로 돌려 놓고 나아간다면, 일상 생활의 모든 일들을 이와 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실천해 간다면, 이를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는 참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경 및 주력 수행
그 다음의 예는 경전을 계속 읽는 거예요. 경전을 계속 읽으면,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부처님의 마음도 알게 되어, 언젠가는 부처님처럼 깨닫게 된다 라고 믿고 해요. 그래서 예불 때에도 항상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을 함께 독송을 하죠. 혹은 금강경이나 지장경 등을 그런 방법으로 하기도 하죠. 그런데 경전을 독송하는 데 몇 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글자 이면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경전의 한 구절씩 그 뜻을 알아가다 보면 깊은 이치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 그 이치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게 되고, 또한 남을 위하여 그 이치를 설명하고 실천해 보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천하다 보면 그 이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더욱 깊이 믿게 되고, 이러한 믿음과 이해가 더욱 세밀하게 실천해 가는 추진력 혹은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일거수일투족 모든 일을 이러한 이치의 실천 및 점검 과정으로 해 간다면 생활 속의 참다운 '간경 수행'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수행으로는 한 페이지 정도 되는 다라니 예를 들면 천수경 내에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 를, 혹은 한 두줄 되는 진언 , 예를 들면 '광면진언' 같은 것을 가지고 자꾸 외우고 읽고 하는 수행이 바로 주력 혹은 진언 수행이라고 합니다. 진언 혹은 주문이라고 번역하는 짧은 내용의 문장들 내지는 구절을 다라니 혹은 만트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진언이나 다라니는 대부분의 경전 속에 있으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진언 수행은 간경 수행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러나 우리나라에서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수행자는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라니나 진언의 뜻을 모르더라도 그 소리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간단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범어로 된 경전들이 중국에서 번역될 때 중국의 번역가들이 나름대로의 어떤 내규를 세워놓고 공동 번역 작업을 하였는데, 그 내규 중의 하나가 바로 다라니나 만트라를 뜻으로 번역하지 못하고 음역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 이유는 분명 다라니나 만트라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범어 경전에서는 만트라나 다라니나 경전의 다른 부분이나 게송이나 모두 똑같습니다. 즉, 똑같은 글로 기록되어 똑같이 읽고 외우고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범어 경전에서는 똑같이 취급되는 부분들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이러한 차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어 경전을 마치 경전의 원본처럼 취급하면서 중국 번역가들이 번역상 만든 내규를 지금까지 마치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라니나 만트라의 내용들이 함축적이고 시적이며 깊은 이치를 그대로 드러낸 내용이므로 반드시 뜻으로 번역되어 그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어쨋든 진언의 번역이 뜻으로 되었든지 음역으로 되었든지 간에, 즉 그 의미를 이해하고 외우든지 그냥 소리만 외우든지 간에 간경 수행은 이해를 바탕에 두었다고 한다면, 진언 수행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 듭니다. 즉 다라니나 진언을 절실하게 일심으로 집중하여 외우면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일상생활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서 할 수 있다면, 이를 생활 속의 참다운 진언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가 곧 다라니요 진언이 아닐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활선이다 (청아스님) 3
깨달음의 순간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는 생활선이 되기 위하여, 집에서 오래 있지 않고 직장도 다니지 않고 절에만 자주 다니고 절에 오래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며, 절에서 하는 것, 즉 예불이나 염불 간경 혹은 좌선을 집에서 직장에서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죠. 그러면 깨우친 스님들의 깨우친 순간을 한번 역사적으로 살펴보죠.
염불하다가 깨우친 스님도, 그리고 경을 줄줄 외우다 깨우친 스님도 자주 보지 못했고,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좌선하고 있다가 깨우친 스님들도 극히 드물고, 주로 스님들이 깨우치는 순간을 보면 마당 쓸다가 깨우치고, 한암스님의 경우에도 오도송이 여기 우리 법당 주련에 걸려 있듯이, 부엌에서 불 때다가 홀연히 깨우치고, 마당 쓸다가 돌이 굴러가는 소리에 깨우치고, 혹은 잠자다가 옆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에 깨우치고, 선지식과 대화중에 깨우치고 그러죠.
우리가 상상하듯이 폼 잡고 멋있게 근엄하게 앉아 있다가 깨우친 사람들 많이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수행 방편은 수행의 한 형태를 잡아 주는 것이지, 실제적으로는 자기 일상생활에서 24시간 100% 온전히 수행이 되어야 깨우친다는 소리예요. 스님들도 그렇고 재가 불자들도 그래요.
우리가 늘 생활하는 대로 하고, 하루에 딱 한 시간 혹은 하루에 여덟 시간 딱 떼어 가지고 그때만 정진하고, 그 시간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수행과 별개의 생활을 한다 이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애들이 학교 가서 몇 시간 수업 받고 나면 집에 와서 가방 던져 놓고 전혀 딴 짓 하다가 먹고 자고 다음 날 다시 가방 챙겨서 학교에 간다 이거예요. 그런 애들은 공부 잘할 수 없죠. 우등상 받기 힘들죠. 학교가서 열심히 하고, 집에 와서 비록 놀면서도 항상 공부가 떠나지 않고 학교생활과 가정생활이 서로 연결되어야 우등상을 탈 수 있겠죠. 학교생활 따로 집에서 생활하는 것 따로 완전 따로따로 노는 애들은 결국은 학년이 높아갈수록 공부에서 뒤쳐지게 되어 있어요. 이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그 수행 방법을 알고 익혀서 하루 종일 24시간 연속시켜야 된다는 뜻이거든요.
수행 방편과 몸의 기능
그러면 하루 24시간 수행을 할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이냐를 논의하여 보죠.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 혹은 '지장보살' 을 혹은 경전이나 다라니나 진언을 소리내어 하는 수행을 주장하면, 하루 종일 전화 받고 전화로 얘기 하고 혹은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접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수행 못 하잖아요. 그리고 그냥 가만히 좌선하는 것도 하루 종일 운전하는 사람들이나 종일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되는 사람들은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직업을 가지고 뭐를 하든지 간에, 혹은 설거지를 하든 아니면 TV를 보든 아니면 버스를 타고 있든 운전을 하고 있든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수행 방법이 지금 현대 사회에서는 필요하다 이거예요. 옛날처럼 단순하게 자기 먹을 것 자기가 스스로 자급자족해서 살던 그런 시절이 아닙니다. 더 바쁘고 다양하고 복잡한 시절에 어떻게 하면 하루 24시간 중에서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계속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아까 전에 말했던 여러 수행 방편들은 사람의 감각 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과 생각하는 기능에 주로 기반을 둬요. 한번 보세요. 예를 들어 여래선에서 숫자를 헤아리는 것, 호흡하면서 들숨 날숨에 혹은 배에 집중하는 것, 코끝을 바라보는 것, 앉은 자리 앞에다 점 하나 찍어 놓고 바라보는 것, 걸음걸이를 바라보는 것, 어떤 한 생각을 영상화하여 집중하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화두선이 성행을 하고, 발전을 하고, 오래 지속한 이유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여섯 가지 감각 기관 중에서 제일 발달된 기능이 생각하는 기능이죠. 화두 하나를 제대로 받아 품으면, 화두 의문이 가득차서 다른 기능들과 생각들도 묻혀버릴 정도로 화두가 커져 버려요. 이런 이유로 화두선이 수승하다 할 수도 있죠. 이와 같이 여러 수행 방편들을 살펴보면 몸의 어떤 기능에 의존하여 집중하는가를 알 수 있는데, 물론 어떤 수행 방편도 몸의 기능에 의존하여 머물러 있으라고는 가르치지는 않지만, 우수한 몸의 기능을 의존하는 방편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몸의 기능을 의존하는 방편보다 보편적으로 수승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이것 또한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질 수 있죠. 어떤 사람은 깊이 생각하는 것이 귀찮고, 그냥 고성염불이나 정근기도 하고, 절 몇 번하고 간단하게 왔다 갔으면 좋은 사람은 몸의 간단한 기능에 의존하는 방편이 오히려 수승할 수 있겠죠. 그래서 자기가 수행했다 생각하고 자기 생각에 만족하면서 자신을 이끌어 가겠죠.
어쨌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 사회를, 우리의 모습이자 현실이니까, 살펴 보면, 설거지하고 TV 보고 혹은 음악을 듣고 혹은 걸어가면서 전화 통화하거나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죠. 시험공부를 하거나 뭘 하든지 간에 현대 사회에서는 몸의 기능의 거의 전부를 쓰면서 살고 있어요. 그렇게 복잡하고 다양하게 살아요. 부분적으로도 쓰지만 몸의 여러 다른 기능의 부분들도 함께 쓰면서 산단 말이죠. 옛날의 단순한 생활 방식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죠. 그러므로 어느 한 기능에만 의존하는 어떤 방편을 가지고 수행하게 되면, 일상생활에서 몸의 다른 기능을 쓰게 될 때 그 수행이 상대적으로 생활에서 떨어지고 멀어지게 되요.
예를 들면, 물론 바쁜 중에도 단 10분이나 30분이라도 짬을 내어 몸과 마음을 쉬고 좌선 수행을 하도록 할 수 있다면, 도움이 된다고 누구나 동감을 하죠.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일 년 열두 달 수행 스님들보다 더 늦게 자고 더 일찍 일어나서 돈을 벌고 일을 해도 자식 키우고 먹고 살기가 빡빡한데 언제 그렇게 편안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 이거예요.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좌선 수행이 생활선으로 되기가 어렵죠.
생활선
그래서 몸의 여섯 가지 기능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들어가는 그런 수행 방법이 뭐냐 이거예요. 이제까지 토론한 것을 정리해 보죠.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냄새 맡게 하고, 맛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당체, 즉 눈, 귀, 코, 혀, 몸 생각 자체를 하게 하는 그 근본처로 곧장 들어가라 이거예요.
그 근본에서 육근을 작용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TV를 보면서도 TV를 보는 것에 방해받지 않고, 설거지를 하면서 방해받지 않고, 고객들과 얘기하면서 혹은 전화하면서 방해받지 않고 똥 누고 밥 먹고 걷고 책 읽고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방해받지 않고 어떤 직업이나 어떤 행이나 뭐를 하든지 간에 바쁜 현대 생활에서 육체적인 몸의 기능 일부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몸의 모든 기능들을 다 관장하는 그 근본으로 곧장 들어가면 된다 이 소리예요. 그렇게 하면 몸의 기능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일상 생활로부터 방해받지 않고도 하루 24시간 계속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생활에서 실천하는 생활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근본처를 어떻게 들어가느냐? 거기에서 보게 하고 듣게 하고 생각하게 하니까, 생각하고 보고 듣는 것 모조리 그곳에서 나왔으니까 나온 곳에다가 놓아라.! 생각하는 것, 보는 것, 듣는 것이 올라오면 올라오는 즉시 놓아라 이겁니다. 어떻게 놓는가? 믿고 놓아라. 그 근본처가 참 주처임을 믿고 놓는 것입니다. 이 참 주처가 바로 참나요. 본래 성품이요, 자성이요, 자성불이요, 주인공입니다. 다시 어떻게 놓는가? 그냥 놓아라. 따지지 말고 조건 없이 그냥 놓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붙는 생각이나 의문조차 함께 놓아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놓을 뿐, 끊임없니 놓아 갈 뿐,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놓는 것 조차 놓아 갈 뿐, 어떤 것도 붙지 않고 그리고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근심이 있다든지 혹은 생각이나 번뇌나 감정이 나올 때 혹은 불안감, 공포나 의문이 생길 때, 나오는 그 근본처가 있다 라는 걸 믿고 거기다 막바로 밀어 넣어라 이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일상생활은 생활대로 그대로 해 나가시면, 따로 시간 내고 하실 필요 없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이 정신 수행을 할 수 있다 이 소리예요. 예를 들면, 책을 읽을 때에도 책을 읽는 몸, 즉 눈과 두뇌의 기능을 그대로 진행시키면서 그렇게 책을 읽게 하는 근본처로 막바로 들어가서 하면, 책 읽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마음 수행을 이어서 할 수 있어요. 얼마나 좋아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움직임을 하더라도 그것을 하게 하는 근본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선을 이름해서 '생활선' 이라고 합시다.
생활이 곧 불법
그러므로 '생활실천불교'에서 구체적 수행 방편은 뭐냐? '생활선' 이다. 생활선은 어떻게 하느냐? 일상 생활의 모든 활동을 영위하는 몸의 여섯 가지 기능을 관장하는 근본 자성에 막바로 맡긴다. 이것이 생활선이다. 그럼 왜 생활선이라 하느냐?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이 곧 佛이요, 法이요, 修요, 行이요, 參이요, 禪이요, 敎요, 學이요, 생활을 떠나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전에는 왜 생활선을 하지 않았느냐? 앞에서 토론하였듯이 이전의 모든 수행 방편이 실제로 생활선입니다. 단지 일부 후학들이 형식이나 외형을 보고 좇아 생화에서 조금씩 벗어났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해야만이 생활과 수행이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서로 화합되어 발전이 되는 거예요. 아니면, 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든지 수행을 좀 뒷전으로 미루든지 하겠죠. 일상 생활과 정신 수행이 우유에 물 탄 듯 그대로 자연스럽게 융합되는 방편이 바로 이 생활선입니다. 이렇게 하면 몸의 기능들도 순조롭게 화합이 되고, 발전이 되어, 몸도 건강하고 가벼워지고, 마음은 스스로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지고 밝아지죠.
몸의 기능의 어떤 한 부분을 의존하여 수행하며, 그 의존하는 기능을 벗어나는 계에서 공부가 매우 더디고 어려워집니다. 보통은 훨씬 10년은 넘어 걸려요. 그러니까 보게 하고, 듣게 하고, 하게 하는 당체를 막바로 맡겨 놓고 나아가면 이것이 곧 즉방문卽放門이요, 경절문徑截門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생명불교, 청아스님 법문녹취편집
위빠사나 - 생활선(生活禪)
항상 깨어 있음(생활선;生活禪)
수행자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 까지 항상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주시하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직 잠자는 시간에만 어쩔 수 없이 그 노력이 멈출 뿐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일찍 일어나며, 또한 잠에서 깨어날 때도 '잠이 깬다'라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주시하지 못했다면 곧 주시하지 못했음을 알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동작들부터라도 주시해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행주좌와 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의 동작으로 확장된다.
초보수행자는 자세를 바꿀 때나 움직일 때 마치 병약자가 행동하듯이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평소보다 좀더 천천히 움직임으로써 동작에서 오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자세히 주시할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면 그만큼 많은 대상을 놓치게 된다.
먼저 잠자리에 일어나고자 할 때는 '일어나려 한다' 라고 그 의도를 주시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팔다리의 움직임, 머리를 들면 '듦', 일어나 앉으면 '앉음'등 모든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한다. 특히, 세수나 목욕을 할 때는 움직임이 많고 빨라지므로 그 세세한 동작들을 주시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 뒤에 옷을 입고, 잠자리를 정돈하고, 문을 여닫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에도 모든 움직임과 느낌을 가능한 세밀히 주시한다.
만약, 걸을 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일어날 때, 먹을 때, 볼 때, 들을 때, 등에 주시가 정확하지 않다면 좀더 천천히 움직여 단계적으로 주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1)?
방문자 : 직업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사람들을 만날 때에 감정조절이 정말 힘이 듭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승님 : 세상살이에서 제일 힘든 것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크든 작든 어떤 사건이 매일 벌어지고, 거기에서 오만가지의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일어나는 오만가지의 감정에 끌려가지 말고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놓치지 말고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감정, 사건과 현상들이 일어날 때에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내가 일으켰다고 착각하지 말고, 상대방이 일으켰다고 해서 네가 했다고 착각하지 말고,
연기법에 의해서 저절로 펼쳐지는 현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에서 일어났는가?‘ 의 결론은 ’내가 했다 네가 했다 착각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은 쌍방간의 연기 작용으로 저절로 펼쳐지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명제가 여러분의 의식에서 항상 살아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선의 백미입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2)?
방문자 : 구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미안함이 늘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감정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힘들 때가 많습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승님 : 책임감이나 죄의식 같은 것들은 개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그릇된 관념 즉 착각에서 생기는 망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세상사에 대한 책임감과 가족, 사회, 직장에 대한 책임감 등... 죄의식이 있어요. 내가 실수를 해서 이웃이나 직장 동료 또는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 죄의식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자유의지로 했다는 착각에 의해서 생기는 망상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을 세밀하게 봐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생활선입니다.
책임감이나 최의식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냥 바라보면 됩니다. 바라만 보고 있으면 공부를 아주 잘하고 있는 겁니다. 경계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차분하게 관찰할 수만 있다면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산속에 들어가서 도 닦아서 될 일이 아닌 거예요.
삶 속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사건을 겪으면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봐야 합니다. 이게 진짜 공부입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3)?
방문자 : 생활선을 할 때에도 알아차리면서 좌선이나 행선에서처럼 생각, 소리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까요?
스승님 : 생활선을 하라니까 자동차, 꽃, 돌멩이 하면서 관찰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위빠사나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방법입니다. 위빠사나는 테크닉이 아닙니다. 위빠사나에서의 생활선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것을 ‘내가 했다 네가 했다 착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앉아서 호흡, 감각,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진짜 위빠사나를 하기 위해서 관찰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 사건, 일 들을 관찰한다는 의미는 ‘내가 했다 네가 했다‘는 착각 없이 보는 위빠사나를 하라는 것이지, 일어나는 생각과 좌선 행선을 할 때처럼 일어남, 사라짐, 생각, 생각으로 이름 붙이며 관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선에 있어서의 핵심 열쇠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 생활을 하다가 누구와 싸웠어요. 화가 나서 싸울 때에는 못 챙겨서 내가 했다는 착각으로 찝찝하더라도 끝나고 나서는 바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화가 누구한테서 일어나는가?, 누가 싸웠는가?’ 그것을 관찰하면 여러분이 그 동안 공부를 해 왔으니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4)?
방문자 : 아무래도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세상에서 벗어나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님 : 내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지금 현재 있는 그 자리가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공부처 입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백날 도를 닦아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삶 속에서 사람들하고 부대끼면서 이루어지는 생활선이야말로 참 공부예요. 사실 공부가 거기서 다 됩니다. 생활속에서의 경계가 진짜 공부입니다.
그래서 생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생활 속에서 부대끼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 속에서 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어떠한 상태에 있다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하는 것, 그것이 최선입니다.
마하라지선생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에서 담배파는 일을 계속 하면서도 명상을 쉬지 않고 했습니다. 스승을 만나고 나서는 손으로 담배를 말고 있을 때나 담배를 팔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근원적인 질문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참나는 누구이가?’ ‘이 생각이 누구에게서 일어났는가?’ ‘이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계속 했다는 겁니다. 그랬으니까 배움이 짧은 마하라지 선생이 3년 만에 깨달은 것입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5)?
방문자 : 생활선을 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을 보니까
제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승님 :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더럽고 치사한 온갖 감정을 들여다보면 참 싫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고상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도 그 속을 뒤집어보면 그놈이 그놈입니다. 다 똑같아요. 지질한게 다 똑같습니다. 자기는 뭐 통 큰사람처럼 아닌척해도 에고는 다 지질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봐야 합니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하고 지질한 게 올라와도 내가 일으켰다는 착각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본래 없는데 어떻게 내가 일으킵니까? 개체로서의 나라는 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감정과 반응은 어떻게 일어난 겁니까? 상호 연기작용에 의해서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했다는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연기법칙은 나한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쌍방에게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을 일으킬 수 있는 주체라는게 본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아주 단순하게 보면 됩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6)?
방문자 : 하지만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알아차리려고 하면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승님 :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선을 어려워합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관찰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지금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업무를 보면서 그것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 생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의식이 떨어져서 계속 관찰을 하고 있어야 하니까 일의 속도가 굉장히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의 능률이 안 오르니까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생활인들은 위빠사나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일반적인 위빠사나에서는 생활선을 좌선이나 행선할 때의 알아차림이 생활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으로 가르치는데 일상생활을 하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몰입을 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처리가 다 끝난 다음에는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몰입해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알아차림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7)?
방문자 : 바쁘게 생활을 하다보면 알아차림을 자꾸 놓치게 됩니다. 삶 속에서 생활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승님 : 일상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이것이 누구에게서 일어났는가‘를 챙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활선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매순간을 다 알아차리려고 애쓴다고 처음부터 다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생각과 말과 행위를 그 순간에는 내가 일으켰다고 착각을 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 마음이 고요해지면 바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는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고 연기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를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그렇게 챙기다 보면 알아차리는 간격이 점차적으로 좁아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신없이 속았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차리게 되지만 늦게라도 계속 알아차리다 보면 알아차리는 간격이 자꾸 좁아져서 어느 순간에는 생각이나 감정이 뜨면서 동시에 다 보이게 됩니다.
출처 : 해공명상센터[http://cafe.naver.com/hk10/1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