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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보내며(요1 2:7-11)
* 2017년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12시간 정도만 지나면 파란만장했던 한해가 또 지나간다. 언제나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파란만장하지 않은 해가 없다.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내는 한해는 언제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그런 다양한 경험 속에서 어느 것을 기억하고 어느 것을 간직하느냐에 따라 한해에 대한 평가와 규정이 달라질 것이다.
* 개인적으로 순천에 살면서 두 번째 해를 맞는다. 재작년 12월 말에 상사면에 마련된 보금자리에 이삿짐을 풀고 짐정리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송구영신 예배와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고 하늘씨앗교회에서의 사역을 시작하며 있었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작년 이맘때에도 1년 전을 생각하며 비슷한 느낌이 들었지만, 올해는 1년에 다시 1년이 축적되어 양이 늘어난 만큼 추억할 분량이 늘어났다.
*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많이 있었다. 첫 해에는 여러분들이 봐주셔서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올해는 서로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도 하고, 감춰두었던 단점이 드러나기도 하면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서로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언제나 순조롭지만은 않다. 특히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일상다반사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는 삐걱거리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냥 방치해두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내내 몇몇의 교인들을 만났다. 그동안은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초청한 분들과만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만나자고 요구했다. 삐걱거리는 이유에 대해 듣고 싶어서였다. 어떤 분은 따끔한 충고도 해주시고, 어떤 분은 너무 걱정 말라며 따뜻한 위로도 해주셨다.
* 다 감사하고 소중한 말씀이란 생각이 들었고, 깊이 간직하면서 앞으로 목회하는데 참조할 생각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여러분 한 명 한 명 만나 이러저런 얘기를 듣고 싶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사생활까지 시시콜콜하게 다 알 정도로 너무 가까울 필요는 없지만, 아무 상관 없는 남남처럼 대면대면하게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목사와 교인 간의 거리를 좀 좁히자는 것이다.
* 지난 몇 달 동안 이러저런 생각이 많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불쑥불쑥 제기하면서 여러분을 걱정시킨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교회의 변화와 발전을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인데, 의도와 상관없이 원하지 않는 오해와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방향이나 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방법과 절차에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겠다. 올바른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매끄러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원치 않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법이다. 그럴 때마다 낙담하고 절망하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물론 같은 실수를 거듭하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진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완성을 향해 나가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설교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나 신학적 설명보다 목사의 반성문으로 들어주기 바란다.
* 지난 주일 한겨레에 “이렇게 했더니 애를 망쳤다” 교장선생님의 엄마 반성문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엄마반성문>은 올해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다. 9월에 초판을 찍은 뒤 석 달 만에 5만부 이상이 팔렸다. 이 책에는 ‘전교 일등 남매 고교 자퇴 후 코칭 전문가 된 교장선생님의 고백’이란 긴 부제가 달려 있다. 기사의 중요 부분은 전교 수석을 하던 남매가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고 부모와 대화를 거부하는 극한적 상황을 헤쳐 나온 경험담이다.
* 지은이는 이유남 명신초등학교 교장인데 이 교장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신문기사나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교장은 아이들이 대화를 거부하자 처음에는 자신이 뭘 잘못한 걸까 모르겠어서 당황해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일이 영화 필름처럼 쫙쫙 떠오르면서 죽 회상이 하게 된다. 자신이 아이들을 야단치고 소리치고 아이들은 주눅 들어 있었던 일이 생각나면서, 아이들이 진짜 힘들었겠구나를 그때 처음 실감한다.
* 이 교장의 집에는 ‘에스케이에스케이’(sksk)란 말이 법도처럼 있었다고 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란 뜻이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할 때 자식과 ‘원수 되는 말’을 쏟아낸다. “너는 잘하는 게 뭐야?” “너는 왜 맨날 그 모양이니?” 하면서…. ‘맨날, 언제나, 한 번도, 절대로, 결코’가 들어가는 모든 말들. 이 교장은 이런 말들이 당사자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 그때 이 교장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준 것이 일방적인 지시나 가르침이 아니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게 대화하는 방법인 ‘코칭’이었다. 코칭은 “모든 사람은 온전하며 모두가 특별하다” “모든 사람은 해답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인정, 존중, 지지, 칭찬’을 통해서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하는 소통의 기술이다. 그러나 이 방법이 처음부터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코칭 방법을 배워 새롭게 대화를 시도한다고 아이들이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어서, 아이들과의 관계가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았다. 왜 아이들하고 대화가 안 되냐 하면, ‘내가 이만큼 하면 얘가 이만큼 변할 거다’ 하는 기대를 하고 대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코칭을 배워서 내가 원하는 뭔가를 애들한테 얻어낼 거야’ 생각하면 애들이 금방 알아차린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 이 교장의 말대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변화이다. 내가 변하지 않고 코칭 스킬 좀 배워서 써먹는다고 아이들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장은 아이들이 자퇴하고 방문 닫아걸고 있을 때,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을 만나면 ‘너희 엄마들은 진짜 좋겠다. 이렇게 학교를 잘 다녀주고 있으니’ 싶은 생각이 들었고, 학교 와주는 것만 해도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그러면서 자신의 애들도 학교 잘 다녀준 적 있고, 엄마한테 칭찬받으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칭찬 한 번 못해주고 열심히 해도 인정해주지 않은 사실이 미안해 생각에 아이들 방문 앞에서 눈물 줄줄 흘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진심 어린 반성이 아이들의 마음을 열었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 이 교장의 인터뷰에서 특히 공감했던 부분은 ‘못하는 걸 잘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잘하는 걸 더 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더라는 고백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아이가 못하는 걸 더 잘하도록 해서 팔방미인을 만들려고 애쓰는 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 방식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담처럼 ‘너네 나라는 신이 안 준 능력을 개발하려고 애쓰는 이상한 나라다. 왜 신도 안 준 걸 인간이 개발하려고 하냐?’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 “아이가 가진 능력을 끌어내주는 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동안은 ‘얘가 뭘 못하나?’만 신경 쓰면서 지적질을 하고 있었던 거”라는 고백을 읽으며 나도 목사로서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지적질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부임 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많아 알게 모르게 실망한 부분이 있고 그런 실망이 설교나 대화를 통해 드러났을 것이다. 그래서 상처받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 그래도 이 교장이 자녀들에 대해 나중에 깨달은 것처럼, 우리 교회가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점이 더 많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정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단점이 없는 교회나 조직은 없을 것이고,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늘려가는 것이 교회의 발전과 변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의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거나 서툴렀던 점을 인정한다.
* 새해에는 새로 구성되는 운영위와 이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 지난 금요일에는 두견님의 카페 에이프론에서 인디 그룹 ‘포리스트’의 공연이 있었다. 노래나 시도 좋았지만 '노래를 꽃씨로 숲을 만드는 포리스트'라는 안내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그냥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모습을 쓸쓸하고 처량하다. 그런데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푸근하고 안락한 느낌이 든다.
* 나는 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산에 오르는데 정상에 오르기 전에 거쳐야하는 숲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의 평안함을 느낀다. 가끔 유독 멋지게 자란 소나무나 삼나무를 보면 쉬어갈 겸 부등켜 안아보기도 하고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 많은 나무들이 종류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지만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 산에서 멋진 숲을 만나면 우리 교회도 이런 멋진 숲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교회는 숲이 되기 위해 모인 나무들의 집합체라고 믿기 때문이다. 폴 투르니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교회는 세상에 세운 하나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 두 그루로는 숲이 될 수 없듯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이다.
* 정성수 시인의 '숲이 되지 못한 나무'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숲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이 된다는 것을 / 작은 나무 몇이 서는 / 아름드리나무 혼자서는 / 절대 / 숲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숲 밖에서는 몰랐다. // 동구에 서서 한철 동안 / 푸른 그늘 넓게 펴도 / 천년을 풍광의 배경이 된다할지라도 / 혼자 서 있는 나무는 / 숲이라 불러주지 않는다. 그저 / 한 그루의 나무일 뿐.
* 우리가 아무리 멋진 아름드리나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나 교인도 혼자서는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숲에는 크고 우람한 나무만 존재하지 않는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무도 존재하고 똑바로 자라지 못하고 구불구불한 나무도 존재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똑똑한 사람 미련한 사람 모두 모여 만들어나가는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이다.
* 그리고 이 공동체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몫이다. 대나무가 많은 숲은 대나무 숲이 되기도 하고 소나무가 많은 숲은 소나무 숲이 되기도 한다. 물론 대나무 숲이라고 대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소나무 숲이라고 소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숲에 특정 나무가 유독 많을 때 그 숲의 이름을 그 나무의 이름을 따서 부르곤 한다. 우리 교회는 어떤 숲으로 불리울까.
* ‘노래를 꽃씨로 숲을 만드는 포리스트'라는 안내 문구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하나님나라라는 숲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하늘씨앗들은 하나하나가 그런 숲을 구성하는 소중한 나무들이다. 김훈의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이라는 소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무들은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나무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저마다의 존재를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서도 숲이라는 군집체를 이루고 있었다.”
* 우리 교회가 너무 붙어있지도 않고 너무 떨어져있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저마다의 존재를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서도 서로 고립되지 않고 유지되는 숲과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7절에서 요한은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옛 계명을 써 보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그 말씀입니다”라는 말한다.
* 그리고 이어 8절에서는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새 계명은 그분에게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7절의 옛 계명과 8절의 새 계명은 언듯 보면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하며 읽으면 다른 것이 아니다. 새 계명이나 옛 계명이나 사실은 같은 것인데, 다만 시간이 지나 이전에 듣고 아는 것은 지금 여기에선 옛 계명처럼 여겨질 뿐이다.
* 새 계명 같지만 이미 들어 다 아는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세월에 마디가 생겨 지난해와 새해가 구분이 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소중한 가치는 시간이 지난다고 새것과 옛것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계명은 바로 사랑이다. 서 우리가 알던 것이라 옛 계명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여전한 새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반면 “자기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앞에는 어떤 올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 2017년의 마지막 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숲속의 나무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개별적으로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기 바란다. 나도 부족하나마 지금보다 더욱 노력해 우리 교회가 아름답고 따뜻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