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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長川齋의 창건 연혁
관산하면 천관산, 위씨하면 장천재가 연상된다. 관산과 천관산과 장천재는 위씨와는 뗄 라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아마도 특정한 산(山)과 특정한 성씨(姓氏)간에 이미지가 겹친 상징성(象徵性)은 천관산과 장천재와 위씨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위씨가 관산과 인연을 맺으면서 대대로 내려온 생활방식이자 문중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존재공의 지제지(支提誌)도 그런 문중의 전통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그럼 위씨 문중의 상징인 장천재는 언제 창건됐을까. 첫째 천관산과의 인연은 참봉공이 당동의 탐진 최씨와 혼인하면서 비롯된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앞에서도 살핀바와 같이 참봉공이 1483년에 태어났으니까 17~20세 안팎이라 추정할 수 있다. 결국 1500년 전후로 참봉공의 연치는 10대 후반이나 20대일 것이다. 따라서 장흥 위씨가 관산의 보금자리인 당동의 배산(背山)인 천관산과 인연을 맺은 시점은 16세기 시작과 맞물린다.
강릉 참봉공이 처가에서 살았음은 일찍이 알려진 사실이다. 장인장모가 돌아가셨거나 살아 계실 때 손위의 형 진수와 함께 사셨던 어머니 평산 신씨도 당동으로 모셨을 것이다. 이유는 아버지 습독공의 묘소가 평화 다산등(茶山嶝)에, 어머니는 천관산 영은동(靈隱洞)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부모가 함께 사시다 돌아가셨다면 묘소를 따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장천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언제 수리했는지 등에 대해 선조 3인의 기록을 대조해 보기로 하자.
1) 聽禽․詠而齋․茶嵒의 기록
첫째는 청금공(聽禽公․1578~1652)의 기록이다.「제장천당(題長川堂)」이란 한시는 지금까지 족보나 장천재 연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즉『長川流水白雲中, 新築仙宮第一重, 戱躍當時盤石古, 讀書之處竹林空, 幾年兄喜弟尤喜, 可見心同亦同, 存沒如今皆老鬼, 誰尋洞裏靑童』과『長川先墓白楊邊, 新築瓊宮第一顚, 洞裏仙枝皆棣萼, 溪邊苔石摠羊眠, 忽思弟泣兄笞日, 郤噫從師總角年, 萬事如今存沒處, 難逢當日(3字缺)』이란 내용의 2수(首)의 한시이다.
청금공은 또 23세 때인 1600년(庚子) 11월에도 장천당에 관련된 글도 있다. 유고집 권2에 있는「上巡相書」는 장흥부를 시찰한 순찰사 상국(相國)합하에게 올린 것이다.『(전략)…俾結茅茨數間以爲講學之所其地乃長川洞娥溪之麓其上天冠名山…(하략)』이라는 내용의 대목이다. 천금공의 한시와 상국에게 올린 글로 보아 장천당은 1600년대 이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초가지붕이었으며 용도는 강학장소였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둘째는 영이재공(詠而齋公․1704~1784)의 글이다. 그는「부계당기사(俯溪堂記事)에서『(전략)…其始則堂未曾有而只結草廬數加而己我王考少時恒居處於而省掃焉其後小拓其制而瓦以覆之至康熙乙酉春增其廊而修之…(하략)』의 내용이다. 이는 부계당이 띠로 덮은 오두막이었는데 아버지 삼족당(三足堂)이 항시 거처하며 살피고 청소했다. 그러다 을유년(1705)에 기와를 덮고 규모를 늘였다는 것이다. 이후 갑진년(1724), 정묘년(1747)에도 중수했다.
셋째는 다암공(茶嵒公)의 부계당(俯溪堂) 중건기사를 보자.대강 그 처음에는 당(堂)이 없었고 다만 초가집 수간일 뿐이었는데 나의 왕고(伯勛․1738~1851)께서 항상 여기서 거처하면서 묘를 쓸었다. 그 뒤 그 제도를 넓혀 기와를 덮었으며 1705년(乙酉) 봄에 이르러 꾸미니…(하략)했다. 또 즉휴루기(則休樓記)에는 웅천공의 시묘 이후 제종이 합의해 크게 지여 묘각과 서당을 겸하여 부계당이라 불렀다는 요지의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중건기사 말미에 다음의 내용이 부연되어 있다.금년에 부계당을 개건(改建)하게 되어 집을 헐었는데 문드러진 문서를 들보 속에서 얻었다. 좀이 침식하고 먼지가 끼어 자형(字形)을 거의 판독하기 어려웠다. 지금에 와 옛날을 보니 눈물이 가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봉독하였으며 그 실적을 채록하여 후손들이 보는 자료로 삼노라했다. 그 자료가 곧 영이재공의 그 처음에는 당이 없었다.는 것과 1747년 등 3번의 중수기록들이다.
장천재(長川齋)의 창건연혁은 매우 애매모호하다. 웅천공(熊川公)의 장남 동식(東寔․1640~1708)의 행장을 보자.(중략)…1656년(丙申)에 공이 17세 때 아버지(웅천공)가 타계하자 장천동 선영 상록에 장례를 치르고 띠로 얽은 기둥 세 개의 초막을 짓고 2년간 시묘의 장소로 삼았다.-(중략)-복을 벗은 뒤에 중(僧)을 불러 지키게 하였으며 그 뒤에 승사(僧舍)를 철거하여 규모를 넓혀 짓고 기와를 덮었다고 한다. 그게 장천재의 역사란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행장으로만 보면 장천재를 창건한 주인공은 휘 동식(東寔)이다. 그가 17세 때 웅천공이 타계하자 초막을 짓고 시묘를 마치고 1658년 승사를 철거하고 규모를 넓히고 기와를 덮었기 때문이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버지가 타계할 때가 만으로 16세의 소년이 아무리 조숙했다고는 하나 18세에 제각을 지었다니 상식이 통하겠는가. 이런 엄청난 사업을 했으면 직계종손인 영이재가 족보를 만들면서 면주에 기록하지 않았는가.
또 다른 모순이 있다. 다암공의「중건기」와「측휴루기」에는 영이재의「부계당기사」를 인용해서그 처음에는 당이 없었다. 웅천공의 시묘(동식) 이후 제종이 크게 지어 묘각과 서당을 겸해 부계당이라 했다고 한 말이다. 이 글도 장천재의 창건시기를 웅천공 시묘 이후의 시기에 맞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언제 누가 주동이 되어 창건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웅천공의 친형인 청금공이「장천당」제하의 한시에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까.
2) 長川齋의 전신은長川堂?
청금공의 한시만 보면 언제「장천당」이 신축되었는지 시기를 알 수 없다. 문제의 한시에는 신축시기를 짐작할 근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순상(巡相)에게 보낸 글에는 1600년(庚子) 이전에「강학소(講學所)」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다만 편지에서 지칭하는「강학소」가 당동(堂洞)의 수각(水閣)인지 아니면「장천당」을 가리킨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장천재」이전에「장천당」이란 강학소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다암공처럼「장천재」창건시기를 웅천공 사후로 보는 것은 석연치 않다. 청금공이 23세 때 이미「장천당」이 있었다는데 웅천공 탈복이후라면 1658년에 지은 것이니 이보다 60년 전에 지어 졌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청금공은 3형제 중 가장 장수했다. 1578년(戊辰)에 태어나 1662년(壬辰) 85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니 당시로는 장수한 것이다. 중제 웅천공은 1656년(丙申), 계제 반계공은 1640년(庚辰)에 타계했기에 그렇다.
여기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영이제공과 다암공이 왜 청금공의 기록을 보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두 분 모두 당대의 문장들이다. 그리고 영이재공은「부계당기사」를, 다암공은「장천재중수기」와「축휴루기」를 쓰셨다. 영이재공은「長春臺序」에서는 백증조(伯曾祖)인 청금공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장천재의 창건을 다루는 부계당기사에서는 그와 관련된 청금공의 글을 인용하지 않았다. 연혁의 혼란은 여기서 비롯된다.
다암공은 중수기에서 집을 철거할 때 들보 밑에서 나온 영이재공의 부계당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오래되어 판독하기 어려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부계당기사는 영이재공의 문집에 실어 있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영이재의 부계당기사에서 웅천공 타계 후에 제종의 협의해서 승사를 헐고 장천재를 건축했음을 인용했다. 그러나 영이재공의 부계당기사에는 웅천공 묘소의 위치를 밝혔을 뿐 승사철거, 제종협의 등의 내용은 없다.
3) 五德時代 전후에 創建
이제 진사공(鯤․1515~1582)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1515년에 태어났으니 20세 안팎인 1535년쯤에 광주(廣州) 이씨와 혼인해 69세 때 타계했다. 그 안에 할머니 평산 신씨, 아버지 강릉참봉, 어머니 탐진 최씨가 돌아가시자 할머니(평산 신씨) 묘역 계하에 모셨다. 더나가 친아버지(진수)는 용산 봉황동에 모셨지만 생모(진수의 배위)는 영은동에 모셨다. 그래서 영은동에는 할머니, 양부모, 친어머니 등의 묘소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시묘는 대물림으로 했을 것이다. 아들은 부모를 위해 시묘를 했다면 여막(廬幕)은 줄곧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당곡진사공이 타계한 후로는 아들 오덕(五德) 가운데 모두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시묘살이를 했을 것이다. 오덕의 아들들인 廷望․廷瞻․廷獻․廷龍․廷灝․廷鳳․廷喆․廷赫․廷勳․廷烈․廷鳴 등 11명이다. 이들도 조부 또는 아버지 내외분이 돌아가셨을 때 묘막을 짓고 시묘를 했을 것인데 이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관산 입향 5세대인 23세 동자(東字) 항렬(行列)대에 장천재를 지었다면 이전 4세대는 아무 일도 안했는가. 4대의 재세(在世)기간으로 치면 최소 120년 이상의 역사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시묘(侍墓)를 위한 공간은 참봉공 때부터 있었음이 분명하다. 재력 또한 참봉공과 진사공 때가 가장 풍족했으리라. 오덕이 분가하고, 다시 22세가 분가할 때는 후손은 많아 먹고 교육시키느라 제각을 지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장천재창건을 웅천공 이후가 아니고 오덕(五德)시대 전후이다. 만회재공(晩悔齋公․1583~1657)의 유서를 보자.-(중략)- 내가 평일에 비록 군(郡)이나 현(縣)을 역임하였으나 일찍 가인의 생업에 뜻을 두지 않아 사소한 세업을 전급함이 적어 보잘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장차 기한(飢寒)을 면치 못할 것이나 어찌하겠느냐고 탄식했다. 현과 군수와 국사(國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벼슬아치가 자식들의 기한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만회재공은 바로 웅천공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3세 연하의 종제이다. 웅천공은 현감을 지냈으나 그 기간이 극히 짧다. 예나 지금이나 국녹(國祿)을 먹고 사는 벼슬아치의 생활은 일반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거의 40여 년간 관직생활을 했던 만회재공이 재산을 모으지 못했다면 친인척의 경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더구나 웅천공의 장남은 당시 연치 17세의 소년이었음을 감안하면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상과 같이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장천재의 창건은 승려들이 기거했던 암자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창건역사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도 처음에는 장천재라 부르지 않고 장천당이라 했다. 처음에는 초가(草家)였으나 나중에 기와를 얹었다. 그런 연후에 묘각(墓閣)과 서당(書堂)을 겸했다는 요지로 요약되고 있다. 이 같은 전후사정에 따라 장천재의 창건연혁은 훨씬 이전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장천재는 여러 번 중수한다. 기록상으로는 최초의 중수가 1705년(乙酉)이라 한다. 초가를 46년 만에 보수했다는 말도 그리 신빙성이 없다. 2차 보수는 1724년(甲辰), 3차 보수는 1747년(丁卯), 4차는 1873년(癸酉)에 지금의 형태로 중건했다. 그 후 105년 만인 1978년(戊午) 9월 21일자로 전라남도지방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됐다. 이로 인해 1991년(辛未) 전남도비를 들여 재직실을 신축하는 등 보수공사를 해서 오늘에 이른다.
장천재는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장흥 위씨 관산파는 장천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자제들의 강학하는 장소였으며, 문중회의를 개최하는 장소로 이용한다. 존재공은 17세 이전부터 여기서 학업을 닦고 훈장으로 청소년을 가르쳤다. 장천재는 문중의 어른들이 내로라는 시인묵객들과 수창하며 접대하고 제야(除夜)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리고 족보편찬소(1916) 등 허다한 문중행사와 방촌의 마을 행사를 거행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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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聽禽遺稿 : 권2 顔巷居第重修上梁文 11) 기묘대동보 : 편제록 p. 92 12) 기묘대동보(1999년) : p. 227 通德郞公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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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 長川齋의 전신은 “長川堂?”에서
“1578년(戊辰)”을 “1578년(戊寅)”으로
“1662년(壬辰)”을 “1662년(壬寅)”으로
“여기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영이제공”을 “여기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영이재공”으로
“축휴루기”를 “즉휴루기”로
“제종의 협의해사”를 “제종이 협의해서”로
수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