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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옥 <꿈속의 사랑>
사랑해선 안 될 사람
1910년(순종 3년) 7월 30일, 청도에서 재밌는 일이 발생한다. 아침인지 저녁나절이었는지 본 바 없으니 알 수 없으나, 한 부잣집에 갑작스레 김법순이란 자가 행차하시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씀이, “댁네 여종 푼수를 나한테 양도 좀 해 주시지 않겠나?”
집주인이 아래위로 쓰윽 훑어보아하니 젊은 놈이 행색이 번드르한 것이 천상 양반 꼴인데 내 여종 푼수의 용도가 자못 궁금타. 상대 표정을 슬며시 ‘스캔’하면서 묻는다.
“어디다 쓸라꼬요?”
“머, 어쩌다가 그 아이랑 눈이 맞아서….”
카, 요 맹랑한 것 좀 보소.
“얼마 줄 낀교?”
“알아보이 시세가 한 50냥이라 카든데.”
집주인이 얼른 머리로 주판알을 튕겨보니 상황은 제 편이라, 척하면 착이다. 김법순의 안구가 흔들리고 있잖은가? 요놈 요놈 딱 보니 똥줄 탔네 . 내 이런 날이 올 줄 진즉 알았다. 푼수 그 년이 좀 골골해서 자주 드러눕긴 했지만 행색이 반반하고 꼬름하여 탐내는 놈들이 한둘 아니었거등. 생원댁 강쇠놈, 참봉댁 삼식이 그놈도 얼매나 껄덕댔는가 말이다.
“어르신, 1년 새경 다 드리끼요. 푼수를 저한테 주소.”
“택도 없는 소리.”
머슴놈들 새경이 되어봤자 열냥쯤 되려나? 어림없는 수작이다. 몇번 거절했더니 발걸음 딱 끊고 오지 않기에 그때 줘버릴 걸 하고 아주 쬐끔은 후회하던 중이었다.
고로! 김법순 니놈은 인자부텀 내 ‘호갱’이다.
“머라 카능교? 골골대는 아아 치료한다꼬 3백냥이나 들었는데 50냥? 고마 가 보소.”
돌아서는 주인을 법순이 막아선다.
“얼마믄 되는데?”
거의 가을동화 원빈 포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양반이랍시고 말이 참 짧다. … 하지만 참는다. 돈이 걸린 일 아닌가?
“젊은 양반 사정도 딱한 것 같으이 그라믄 약값만 내놓고 데려 가소.”
인심 쓰는 척 구라를 치는데, 상대가 1백냥 정도로 후려칠 걸 예상한 금액이다. 그런데 이런 등신이 다 있나? 다 주겠단다. 맘 바꾸기 전에 얼른 계약서 쓰기를 종용한다. 사랑에 눈이 먼 김법순에게 3백냥이 대수랴? 쿨하게 돈 ‘척’ 꺼내놓고 양수양도 계약서를 쓰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수표手標
이 문서를 작성하는 까닭은 내가 귀댁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金分手와 정약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
그녀는 어려서부터 중병이 있었고 또 귀댁에 하인으로 팔려간 이후에도 병이 여전하여 세 차례나
치료를 받아 약값만 3백냥이 들었다고 들었다.
이제 내가 그녀를 데려가는 대신 그 약값을 대신 내드리려 한다. 3백냥 전액을 정확하게 지불하면서
다시 그녀에게 질병이 도지거나 기타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후회하여 도로 물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 문서를 작성하고 김푼수와 함께 수형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 사실을 증명한다.
융희 4년 음력 7월 30일 隆熙 四年 陰曆 七月 三十日
표주 청도 사는 김법순 標主 淸道 金法淳
푼수가 어느새 한자로 분수分手가 되었다. 내 사랑을 어찌 천박하게 푼수라 부르랴. 그는 서명 대신 자신의 왼손과 사랑하는 여인 푼수의 손 테두리인 수형을 나란히 그려 넣었다. 작고 아담한 그녀의 손이 애처롭다.
“계산 끝났으이 내 이만 가리다.”
“무르기는 절대로 없니더, 아시겠는교?”
“허! 양반을 어찌 알고, 지금 농락하자는 수작인가?”
아, 저 양반 기세 좀 보소. 점잖게 한 마디 남기고 대문을 나선다.
자그마한 보따리를 두 손에 품은 푼수가 옛주인에게 목례 간단히 올리고 법순을 졸래졸래 따라나선다. 언제 머슴놈들한테 선물이라도 받았나? 꽃신까지 꺼내 신었다. 법순의 뒤를 밟는 푼수의 심정이 복잡다난하다. 서럽고, 고맙고, 미안하고,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핑크빛 나날을 생각하면 콩닥콩닥 가슴이 설렌다.
병색 완연했던 그녀의 볼이 실로 오랜만에 발그레해진다. 맘속으로 기와집 여러 채 지었다 허무느라 발걸음도 늦어진다.
“빨리 안 오고 머하노?”
법순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심한 듯 채근한다.
“따라가고 있니더. 거기가 너무 빨리 걸어서….”
‘거기’라, 가시버시끼리나 하는 표현이다. 아이고 이쁜 것! 법순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과연 법순의 심정은 즐겁기만 할까? 그 또한 마음 복잡하기로 따지자면 푼수 못지않다. 재물이라면 사족 못 쓰는 부모님은 당장 거품 물고 나자빠질 테고, 아! 생각만 해도 육시럴, 욕이 절로 나오는 마누라는 들어서자마자 ‘푸쳐핸섭Put your hands up’ 자세로 얼굴을 긁으려 들 것이다. 그쯤이야 날렵한 몸으로 슬쩍 피할 수 있다. 최익현선생의 도플갱어인 숙부만 생각하면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그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수표의 날짜는 당연히 음력일 터이고 이는 양력 8월 22일에 해당하니,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이 한일합병조약을 조인한 직후일 수 있다. 삼강오륜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깐깐한 성격의 평생 유생 작은아버지가 법순의 소행을 보고만 있을 리 없다.
“천하에 막 돼 먹은 놈! 나라가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는 걸 모리고 그 짓거리를 하나? 종년 하나에 머 3백 냥? 그 돈이믄 나라 구하는 데 얼매나 요긴하게 쓰일 끼고. 어허, 인자 우리 집안도 다 망했다.”
최소한 이런 비난성 멘트는 숙부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법순이 할 말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임금이 언제 백성들한테 물어보고 나라일 처리했나? 지들이 알아서 잘 하다가 왜 어려울 때만 백성 찾나? 또 첩 거느리는 건 양반의 권리요, 사랑이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망이거늘, 참혹하고 위급한 전장에서도 남녀가 사랑을 하고 아이까지 낳지 않느냐? 하늘님도 못 막을 일이 남녀 간의 사랑 아니냐?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게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의 홍상수도 갖은 욕을 먹고 있는 판에, 때는 고작 19세기 후반이다. 사실, 김법순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정체를 조목조목 알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 젊은 양반이었는지, 그의 숙부가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숙부의 존재조차 불투명하다. 증빙자료라고는 고작 그가 남긴 위의 실재 계약서 달랑 한 장뿐이다. 실제로 남아 있는 걸 내가 직접 보고 적어 왔다.
그럼에도 내맘대로 유추하여 재주를 부려본 것은 남녀간의 사랑에서 볼 수 있는 무모함과 위험성 그리고 그 까닭에 대한 설을 풀기 위함이다.
달이 잘못했네
문득 하늘을 보니 달이 차오른다. 위험하다. 무릇 사랑은 대부분 달빛의 농간이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무슨 죄가 있냐고? 모르시는 말씀. 남녀 특히 여자에게 주는 보름달의 영향은 지대하다.
이태백의 눈에는 토끼가 방아나 찢는 곳 정도로만 보일지 모르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궤도를 유지하는 균형추이자 바다와 여자의 몸을 부풀리는 신비한 동력원이다.
여성의 월경주기가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28일 정도와 대체로 일치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만월만 되면 음기가 가득하여 여자는 임신하고자 하는 본능이 극에 달하고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본디 남자와 달리 이성理性에 충실한 여자들도 달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대책 없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남자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쉽게 받아들인다.
늘 발정 상태, 생식활동 5분대기조 남자가 그 기회를 놓치랴. 그나마 몇 안 되는 자제력은 엿 바꿔먹고 불륜이든 패륜이든 내일 없는 사랑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무모하고 위험한 사랑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이 기울면 비로소 자기가 홀렸다는 사실을 알지만 늦다.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줄줄이 소개해 온 영화 《연인》 《색계》 《봄날은 간다》 《흑인 오르페》 등에서의 사랑이 무모하고 위험했던 것 또한 달빛의 농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보름달이 잘못했네 뭐."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법순이 푼수를 처음 만났던 날도 아마 음기 가득 찬 보름날쯤이었을 게다. 초생달에 남자가 더 조심해야 한다. 그때 껄떡거렸다가는 ‘미투Me too’ 대상이 되기에 딱이다. 달에는 사람의 마음을 고양시키는 기운이 있다. 만월이면 울부짖다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늑대에 대한 서양식 전설은 그 사실을 전제한 우의寓意다.
영어 lunatic이라는 단어도 그런 믿음으로 탄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의 소설 『IQ84』에서 그런 식으로 어원을 밝히고 있다.
“insane(정신이상의, 비상식적인)은 아마 천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야. 그에 비해 lunatic은 달(luna)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빼앗긴 것. 19세기 영국에서는 말이지, lunatic으로 판정 받은 사람은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한 등급 죄값을 감해줬어. 그 사람의 책임이라기보다 거부할 수 없는 달빛의 홀림에 빠졌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야. 달이 인간의 정신을 어긋나게 한다는 것을 법률적으로도 인정했던 거야.”
lunatic과 흡사한 단어도 있다. moonstruck이다. 사전적 풀이로 ‘미친’ ‘감상적 공상에 빠진’ ‘멍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 심리에서 예기치 않은 사랑에 빠진 남녀를 그린 《문스트럭moonstruck》이라는 영화도 나왔다. 매력 있는 앙상블 코미디 영화다.
달은 변덕스럽다.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기묘한 마력도 있다. 매일 모양이 바뀌고 때로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서 달은 전적으로 낭만과 마법의 원천이다. 사람들은 밤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기이한 열병을 앓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급속하게 호감을 느끼고 상대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던진다. 사랑의 시작이다.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경리직원 로레타(여성밴드 Sonny & Cher 출신 셰어Cher 분)은 지겹도록 사귀었던 조니가 청혼하자 별 생각없이 관성적으로 수락한다. 그놈의 정 때문에. 이탈리아인답게 오로지 ‘아모르’를 결혼의 최상의 조건으로 여기는 그녀의 어머니 왈,
“얘야, 조니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결혼은 하는 게 아니란다.” 하신다.
철없는 딸 셰어는 속으로 ‘뭐래?’ 하고는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셰어가 결혼준비를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 조니가 의절 상태에 있는 친동생 로니(니콜라스 케이지 분)가 시칠리아에 있으니 잘 설득해서 결혼식에 참석토록 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뭐, 설득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의사전달 정도야 가능한 것 아닌가? 그러겠노라고 한다.
로니를 찾아간 셰어, 그를 설득하다가 그만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 동침하고 만다. '꿈속의 사랑'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를 범한 것이다. 이튿날 정신을 차린 셰어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마침 그날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비추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세어는 로니에게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한다. 그러자고 철썩 같이 약속했던 로니가 글쎄 얼마 후에 뉴욕에까지 날아와서는 그녀를 오페라 공연에 초대한다. 셰어는 의지와 싸운다. 결연하게 싸웠지만 결국 그녀는 극장에 나타난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섹시한 드레스를 걸치고 염색까지 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말이다. 그녀는 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왜? 그 날도 그놈의 빌어먹을 보름달이 교교히 비치고 있었거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사랑, 이념 따위에 냉소적인 사내가 있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이 제 나라도 아닌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듯이, 사내 또한 미국인으로서 왕년에 스페인 내전과 에티오피아 독립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젊은 날의 바이런처럼 그 역시 정의감이라는 횃불을 훨훨 태우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아프리카에 북서쪽 끝 대서양과 지중해를 모두 접하고 있는 모로코의 주요도시 카사블랑카Casablanca에서 온갖 잡놈들을 상대하는 술집 주인으로 살아간다.
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점령당한다. 나치는 수도를 프랑스 북부 비시Vichy로 옮기고 1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필리프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한 괴뢰정부인 비시정권을 세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도 비시정권의 통제 하에 들어간다. 프랑스는 이미 출국금지 상태였지만 모로코는 그나마 좀 사정이 나았다. 날로 심해지기는 했지만 프랑스 국적이 아니라면 까다로운 심사만 거치고 출국이 가능했다.
자연, 국제도시 카사블랑카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달아난 유럽인들이 체류하면서 미국으로 갈 기회를 잡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막장, 마지막 비상구가 되었다. 사내는 카사블랑카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국 놈 릭네 까페Rick’s Cafe American’을 경영하고 있다.
카페는 늘 외국인들과 거간꾼, 도박꾼, 술꾼이 모여 밀담을 나누거나 술주정하는 인간들로 붐빈다. 이주 프랑스인들의 반나치 지하단체와 이들을 감시하는 비시정권 경찰들도 들락거린다. 카페 주인인 사내는 누구에게도 살갑게 대하지 않지만 척을 지지도 않는다. 정의니 국제정세니 하는 담론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 왜? 사랑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사내 또한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다가 독일 침공을 피해 카사블랑카로 흘러들었다. 그는 파리에서 조그만 음악 카페를 경영하면서, 어느 날 조우한 일자Ilsa라는 프랑스 여자와 꿈같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의 파리침공이 다가오자 그는 카페를 정리하고 일자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일자는 기별도 없이 약속장소인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았고, 카페 피아노 연주가 샘과 함께 파리를 떠나 닿은 곳이 카사블랑카였다. 시간이 되자 떠들썩했던 카페도 문을 닫는다. 텅빈 가게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사내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샘이 <As time goes by>를 연주한다. 사내가 벌컥 화를 낸다.
일자와 함께 즐겨 들었던 곡이었다.
냉혈한 같았던 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진다. 그런 거다. 지나친 냉소는 그가 지독한 감성주의자라는 반증이다.
그런데 그 일자가 카사블랑카에 나타났다. 그것도 릭의 카페에, 더 환장할 노릇은 남편이라는 자와 함께였다는 점이다. 일자가 부탁한다. 레지스땅스 지도자인 남편 빅터가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좀 알아달란다. 힘들면 자기는 남겨 두고 남편만이라도 보내 달란다.
빌어먹을! 샘이 <As time goes by>
첫댓글 처음에는 너무 길다 싶어 팽계쳐버렸는데
두 번째 읽기 시작을 하니 단번에 다 읽었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