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m 넘는 4개의 봉우리를 넘다, 수도산
1. 일자: 2023. 6. 3 (토)
2. 장소: 흰대미산(1018m), 양각산(1150m), 시코봉(1237m), 수도산(1317m)
3. 행로와 시간
[심방마을(11:01) ~ (아홉사리재) ~ 흰대미산(11:47) ~ 양각산(12:46) ~ 시코봉(13:33) ~ (점심) ~ 수도산(14:33) ~ (수도암 갈림길, 단지봉 방향) ~ 구곡령(15:14) ~ 심방마을(16:14) / 12.4km]
< 수도산 산행을 준비하며 >
몇 번을 미룬 끝에 수도산에 가기로 했다. 기대하지 않고 옛 예비기록을 살피다 수도산을 발견했다. 2011년 12월 기록이다. 지금보다 더 산에 미쳐 있을 때다. 어렴풋한 기억들이 살아난다.
수도산은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의 경계에 솟은 산으로 예전에는 불령산이라 불렸다. 조용하고 아늑한 육산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암릉이 적당히 있지만 사철 등산하기가 좋다. 천년고찰 청암사와 수도암은 ‘불령동천’이라는 깊은 계곡, 올망졸망한 산마을 풍치가 기막히게 어울린 수행도량이다. 정상에는 3m 높이의 돌탑이 있고, 가야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장관을 이룬다. 인근에는 오도산, 비계산 등 거창의 산들이 도열해 있고, 덕유산 향적봉이 가깝게 보여 정상 동서남북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이라 한다.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하면서 장호 선생의 한국백명산기에 소개된 정보를 추가로 살펴보니, 수도산의 인상은 보다 확실해 진다. '한국 불교의 담백함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산으로, 깊고 호젓하면서 어둡지 않고 들앉아 있으면서도 후미지지 않는 곳이다. 중후하여 믿음직스러울망정 겁이 안 나고 그 높이가 느껴지지 않아 안방 같은 따스함을 풍겨준다.’ 그 높이에 비해 험하지 않다 한다.
가야할 길의 대강을 살핀다. 들머리는 고도 675m의 심방마을이다. 1.5km 고도 350m를 치고 오르면 흰대미산이다. 주 능선 따라 고도 150m를 이기고 2km를 걸으면 양각산이다. 수도산까지는 시코봉을 거쳐 100~150m 오르내림을 지나 4km쯤 가야 한다. 이후 심방마을까지는 5.2km 거리다. 누적고도가 968m이니 만만한 오르내림이 아닐 것이다. 풍광이 뛰어나고 육산이란 말에 희망을 가져본다. 13km 내외 5시간 30분 산행을 예상한다.
< 희망사항 >
흰대미산 1019m, 양각산 1158m, 중간에 거치는 시코봉이 1237m, 그리고 정상인 수도산은 1317m로 하루에 해발 1000m가 넘는 산 4개 를 걷는다. 부실한 몸 상태에 고산을 오를 생각에 주저한다. 옛 기록이 망설이는 마음에서 가자는 쪽으로 힘을 보탠다. 10년 넘는 시간이 흘러도 산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가야할 코스가 다를 뿐이다. 이전은 청암사를 기점으로 수도산에 오른 후 원점회귀 하는 코스였으나, 이번은 심방마을을 출발하여 흰대미산~양각산~시코봉~수도산을 오른 후 원점회귀 한다. 거리도 꽤 길다. 초여름 더위와 돌길을 이겨내고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다시 살짝 든다. 시작 고도가 700미터에 육박하고 육산이라는 점이 또 용기를 준다.
산을 다니면서 마음 속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장호 선생이다. ‘깊고 호젓하면서 어둡지 않고 들앉아 있으면서도 후미지지 않는 곳이다. 중후하여 믿음직스러울 망정 겁이 안 나고 그 높이가 느껴지지 않아 안방 같은 따스함을 풍겨준다.' 이 진정한 산의 고수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표현력에 감동하며 닮고 싶다. 늘 현장에 답이 있음을 알기에 수도산에 올라 그가 느낀 바를 나도 경험해 보아야겠다.
(여기까지는 산행을 준비하며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다르리라.)
< 거창 가는 길에 >
지난 주와 같은 버스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사당에서만 1km를 걸은 것 같다. 들머리 심방마을은 거창에 위치해 있고, 구불구불 산길을 꽤 돌아 당도했다.
차 멀미를 약하게 했다. 스틱을 챙기고 산으로 향한다.
< 심방마을 ~ 양각산 >
마을 어귀에서 도로 따라 가다 산길로 들어선다. 산객의 출입이 잦지 않은지 등로가 희미한 곳이 꽤 있다. 스틱에 의지해 어렵사리 아홉사리재에 올라선다. 수도지맥과 접속했다. 한고비 넘겼다.
이곳에서 흰대미산까지는 500m 거리이지만 제법 까칠한 오르막 구간이다. 무척 힘겨웠지만, 모처럼 산다운 곳에 왔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흰대미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탁월했다. 막힘 없는 360도 파노라마 전경이 인상적이다. 정상석에는 흼덤이산이라 써 있다.
이어지는 길, 수도산으로 향하는 주 능선 위에 선다. 덕유능선이 곁에 있고, 멀리 산들의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양각산까지는 고도 차는 150m 수준이지만 오르내림이 있어서인지 몹시 힘겹게 느껴졌다. 올려다 보는 눈에 봉우리 두 개가 서 있다. 양각산, 두 개의 봉우리가 소의 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km를 걷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암릉과 절벽 구간도 많았다. 체력이 예전만 못함을 무쩍 느낀다. 그래도 올라온 흰대미 능선과 우측의 봉긋한 초점산, 대덕산까지의 풍경이 근사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 양각산 ~ 수도산 >
시코봉 가는 길은 짙은 숲이 참 좋다. 숲 그늘에 드리운 햇살도 곱다. 바람도 간간이 분다.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부서지는 숲을 벗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봉우리 앞 암릉을 넘어사자 시코봉이 지척이다. 큰 바위에서 걸음을 멈춘다. 삼각대를 세
운다.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다. 머지 얺아 시코봉 도착한다. 고도가 1200미터 중반대로 높아졌다. 정상석 위에 있는 조각품은 포도였다. 은퇴하고 귀향하여 김천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 생각이 났다. 봉우리 옆 그늘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꿀맛이다. 가야할 수도산 뒤로 가야산의 정상 '불꽃'도 제법 솟아올라 보인다. 트랭글이 봉우리 부저를 울리지만, 신선봉은 우회해 나아산다. 등로는
정상 바로 전 말고는 비교적 평탄했다. 수도산 정상의 파노라마 풍경은 왜 수도지맥이 산꾼의 로망인지를 증명한다. 사방 막힘이 없다.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산 풍경에는 수도~가야 종주능선이 선명하고, 올라 온 양각지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제 덕유산과는 꽤 멀어졌다.
< 수도산 ~ 심방마을 >
정상 주변을 서성인다.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일행의 모습을 당겨본다. 바위에 앉은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져 부러웠다. 오늘 베스트 사진이라 여겨진다.
하산 길 초입에서 잠시 헤맨다. 받아온 트랙 탓이지만 이내 제 길을 찾는다. 심방마을까지는 고도 차가 700m 이상이라 긴장했는데, 비탈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1045m 고개에서 우틀해 내려가니 계곡과 만난다. 돌 많은 길을 한참 걷다 계곡을 건너니 불쑥 임도가 등장한다. 도로를 따라 4km 이상 길게 내려왔다. 오면서 드는 생각, '수도암을 날머리로 잡으면 거리도 줄고, 굳이 이 긴 포장도로를 걷지 않아도 될 텐데..... 이유가 있겠지. 모든 게 내맘같지는 않다.
< 에필로그 >
'그럼에도' 란 말은 매력적이다. 여러 활용이 있지만, 희망의 여운이 강하다. 오늘 오랜 만에 꽤 높은 산을 길게 걸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먼 버스 이동에 지쳤지만, 초반 오름이 벅찼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산행이었다.
걷는 행위는 정직하고 평등하다. 내 두 발로 걷는 행위는 오늘도 용감했다. 변화는 둥지를 벗어나 낯선 곳에 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수도산에 선다면 그 시작점은 청암사와 수도암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