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무예신보와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本國劍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는 바로 무예도보통지의 本國劍 밑에 적혀 있는 몇 글자의 한자와 승정원일기 정조 6년(1782년) 8월 23일의 기록이다
먼저 무예도보통지의 本國劍 밑에 있는 몇 글자의 한자를 살펴보되 이와 더불어 本國劍이 과연 新羅로부터 유래되어 新羅劍이라고 일컬어 질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논하고자 한다.
‘본국검(本國劍):모양은 쌍수도와 비슷하며 신라때부터 전해온 우리나라의 칼. 속칭 신검 및 신라검이라 하며 그 무예는 신라의 황창이 소전(所傳)이라고 한다’
(우리검도의 원류-해동검도의 실체 학민사 박종률 지음)
‘.....화랑의 도중(徒衆)은 일찍이 수 천명의 수로 忠과 信을 구비하고 또한 신라의 이웃은 왜국인, 즉 그 무검기(武劍器)는 반드시 서로 전한 것(相傳之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황창랑으로 인하여 본국검의 기원이 밝혀졋는데..........’
(武道論 도서출판 대한미디어 김정행 김상철 김창룡 공저)
‘본국검 24반 무예의 보병무예 중 하나. 본국검은 우리나라에서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칼로 속칭 신검(神劍) 혹은 신라검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모양은 쌍수도와 비슷하다. <<무예도보통지>>에 이 무기를 이용한 무예가 본국검으로 규정되었다’
(인터넷 Daum 백과사전)
위 인용문 중 인터넷 Daum 백과사전의 신검을 한자로 神劍이라 표기한 것은 新劍의 오류인 듯 하다, 각종 단체 및 서적등에서 본국검을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검법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근거는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 설명부분의 ‘增○俗稱新劍’이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新劍의 新을 신라의 略字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미 논문(본국검의 기원에 관한 연구-허인욱) 및 서적(독행도-칼의 역사와 무예, 학민사, 한병철 한병기 1997 pp64~68)을 통하여 논하여진 바대로 ‘新劍’이라 함은 ‘신라의 검’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신라를 두 글자로 표기하는데는 新羅라고 표기를 하고, 한글자로 표기 할 때는 新이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무예도보통지가 발간될 때 쓰여진 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보자
..........我東奏議, 旣不續付於原編, 而別作一篇, 則羅、麗奏議, 不必零瑣收聚, 斷自本朝, 恐合事宜.............(정조 11권 5년 4월 7일)
........우리 나라의 주의(奏議)는 이미 원편(原編)에 이어서 붙이지 않았으니 따로 1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신라·고려 때의 주의는 자질구레한 것을 거두어 모을 필요 없이 끊어서 본조(本朝)로부터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我國之音, 㝡近於中國。 而羅、麗以來, 旣無翻解之方, 每患通習之難(정조 16권 7년 7월 18일)
.........우리 나라의 어음(語音)은 가장 중국의 것에 가까웠었는데, 신라와 고려 이래에 이미 번해(翻解)하는 방법이 없었기에 매양 통습(通習)하는 어려움이 걱정거리였습니다. 오직 우리 세종 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睿智)로 혼자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여 창조(創造)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화인(華人)들에게 물어 보더라도 곡진하고 미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문장으로 볼 때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질 당시 조선에서는 新羅를 한글자로 표기 할 때는 羅를 사용하고 高麗를 한글자로 표기할 때는 麗를 사용한바 무예도보통지의 ‘增○俗稱新劍’에서 新劍은 新羅劍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는 新劍이라는 표기는 있을지언정 新羅劍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