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신명기 6장 1-9절
제목 : 쉐마 이스라엘
일시 : 2018/5/14
1. 너무 너무 너무 유명한 구절이고 본문이다. 여기저기서 쉐마 교육을 말한다.
2. 주목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하나, 한 분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자,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다, 는 명제를 들으면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또는 종교적으로. 그러면 골치가 아파진다.
존재라는 말이 등장하고, 다원주의/다원적 맥락이 나타나야 한다. 신 존재 증명도 언급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독선적이다는 단골 메뉴이고 말이다.
3. 오직 한 분이라는 명제가 주장되는 맥락을 유념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텍스트 내의 문맥이고, 그 텍스트가 가리키는 바, 역사적 맥락이다. 이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고 말이다.
신명기 6장 1-9절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상들의 하나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시고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번성하게 하실 하나님 등이다.
4. 일단, 협소한 텍스트를 벗어나서 좀 더 큰 맥락에서 보도록 하자.
출애굽과 민수기 사건이다. 특히 출애굽이다. 애굽의 종교는 다신관이다. 신들이 정말 많다. 그리스를 생각해도 좋고, 일본을 떠올려도 되겠다. 아니면 우리 전통을 기억해도 되고 말이다.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신들 중에 오직 야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 분, 엘샤다이, 곧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알려졌던 하나님, 그러나 자기 이름을 야웨로 명시적으로 계시하신 하나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광야를 동행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입히시던 하나님!
자, 이제 명약관화해졌다.
한 분이라는 것은 노예인 이스라엘의 편든 신이 딱 한 분이라는 말이다.
아니면 나와 보라고 해~~
없다, 없어, 야웨 하나님 외에는 단언컨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한 분이시다!
철학적으로 또는 어렵게 말하면 존재론적으로 신은 단일하다거나 유일하다거나 하는 맥락 이전에 본래적 의미가 그렇다는 말이다.
5. 구약 신앙에는 하나님을 만신들 중의 최고의 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다른 신들은 다 가짜다, 라는 의미에서 참된 신은 딱 한 분, 야웨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둘을 동시에 봐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말하든, 역사적 구원 경험이라는 맥락을 놓치고 보면, 하나님은 그야 말로 독선적인 신이 되고 만다. 그렇지 않다. 약자와 빈자를 사랑하는 유일한 신이시다.
6. 그 신은 어떤 신인가?
앞에서 말했다. 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이 흐른다는 것은 유목하기 좋다는 말이고, 꿀이 흐른다는 말은 산림이 우거졌다는 말이다. 하여간에 농사짓기 참으로 좋은 지역이라는 말이다.
이를 땅 한 뙤기 없이 사는 가난한 농군이요 목자들에게 더 없이 복된 소식이고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런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7. 다시 묻는다. 그 신은 어떤 신인가?
명령과 규례와 법도, 곧 토라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신명기가 강조하는 것은, 저것들은 우리를 번거롭게 하고 구속하고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장구히 살 수 있게 하는 것들이다. 저걸 잘 지키면 오래 오래 잘 살 것이고, 저걸 어기면 금방 쫓겨나서 다시 노예살이할 것이다.
우리의 안녕과 복지에 관해 너무 관심이 많으신 참 좋은 하나님!
8. 율법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서 보았고, 뒤에서도 볼 것이다. 바로 십계명이다. 공의와 정의(미슈파트와 체다카)이고 인자와 샬롬(헤세드와 샬롬)이다.
9. 그러면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 묵상이다.
이스라엘을 향한/위한 하나님의 배타적 사랑이 하나님은 하나다, 라는 선언과 출애굽 은혜이었다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타적 헌신과 충성은 그분의 말을 잘 새겨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언가 의무를 주고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싶어 안달복달인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율법, 곧 성경을 날마다 때마다 묵상하는 것이다.
10. 어느 장소에서도 가르치고 묵상하라.
집, 길, 침대, 손목과 이마, 집 대문, 성문 등등
요지는 어디서나, 이다.
11. 이것을 본인만 잘 믿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신앙이 전승되어야 한다. 그래야 길이 길이 살 거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신앙 교육이다.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한다.
식탁에서도, 침대에서도, 거실에서도 자녀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과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고, 위기와 시련이 닥칠 때, 하나님의 이야기로 그 고난을 해석하고 뚫고 나가는 동력을 발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요즘, 나는 각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너무 등한시 한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학교 가기 전에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고, 식사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는 것, 그런 사소해 보이는 것을 사소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것부터 해야 한다.
12. 오늘 본문에서 놀란 것이 있었다.
5절의 마음, 뜻, 그리고 힘에 관한 것이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의 저자인 스탠리 존스는 저것을 지, 정, 의로 해석한 바 있다. 약간 어거지이기는 하지만,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이번에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주석을 보고, 그래서 패트릭 밀러의 것을 찾아 보고 알게 되었다.
마음은 ‘네페쉬’이고 문자적 의미는 목구멍인데, 주로 영혼으로 번역된다.
뜻은 의지와 방향에 관한 것이다.
놀라웠던 것은 ‘힘’이었다.
영어로 strength인데,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주석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그런 힘이 아니다.
한번 물어보자.
당신은 언제 힘이 나는가? 없던 힘도 생기는가?
그렇다.
돈이다. 돈이 많아지면 죽던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
돈이 힘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 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골 때리는 것은 칼빈의 주석이었다.
‘네가 가난해 질 정도로 너의 부와 소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뭐 그렇게 되어 있다.
13. 종종 묻는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을까?
마음이 있는 곳에 돈이 있을까?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놀랍게도 말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다.
14.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교회를 사랑하는가? 교회가 공동체라고 여기는가? 교회에 관심이 많은가? 돈, 즉 헌금을 얼마나 어떻게 하는가,를 말하라. 돈이 따라가지 않으면서 말만 하는 사람들, 그 입 다물라!
15. 너무나 유명해서 너무나 익숙했던 본문을 다시 읽으니 새롭고도 두렵다.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좋고도 좋도다.
첫댓글 아 얼마전에 이 본문으로 설교했었는데 목사님 묵상 참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