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연 이틀 봄비가 내렸다. 바람도 잠든 사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며 나비 춤사위처럼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너울지며 흙을 적셔 주고 초목을 쓰다듬으며 내렸다. 소리 없는 봄비는 웬만한 수량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던 싱글 지붕조차 잠에 취하게 만들었다. 결국 가끔 커튼을 들추고 활동 마루 표면의 동정을 살핀 후에야 봄비의 정체를 가눔 할 수 있었다. 봄볕이 좋은 날 마루판 전체에 오일스텐을 입혀 놓지 않았다면 이 또한 어림없는 분별력이었을 것이다. 미리 오일스텐을 흠뻑 먹은 외국산 소나무 판재는 봄비를 내리는대로 모아 놓았다가 일정량이 모아지면 마루판 틈새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견고하게 밀착된 마루판과 판 사이에 잠시 생긴 고인 물 위로 드러나는 불규칙한 물결의 흔들림을 통해 봄비를 가눔 할 만큼 봄비는 산분을 감추며 내렸다. 오일스텐인 칠 덕분에 방수가 되어 마루판에 고인물이 생겼고 봄비 방울이 일키는 파문을 통해 봄비를 가눔 해 볼 뿐이었다.
바람이 없는데도 나뭇가지마다 매달렸던 꽃잎들이 보슬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바람이 없으니 휘날리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린 것이다. 왜 날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걸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본능의 힘은 미풍도 스스로 만들어 활로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꽃이 지면 서럽다 하며 서러운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은 인식의 장난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편협의 소산인 줄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숲에 본질을 알고 있는 한, 꽃 다음에 이어지는 연둣빛 생명의 성장통은 꽃과 견줄 수 없는 깊고 깊은 심오한 아름다움이 넘쳐 난다. 자라는 생명에게 여러 개의 매듭이 주어진다. 꽃은 유혹의 잔치를 벌여 수태로서 의미를 찾지만 생명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성장통 매듭이다. 유아, 소년, 사춘기, 청년, 중년, 장년, 노년기로 이어지는 삶의 매듭은 희로애락의 기운을 다 담고 있다. 한 묶음으로 엮어 놓으면 바로 인생의 꽃이 되는 것이다.
밤 사이 휘리릭 흩어져 버린 벚꽃잎, 담(潭)에 떨어져 맴이라도 돌며 멋 진 몽환의 아름다움을 끌어 오겠지만 잔디 위에 떨어진 점점은 퇴락의 상징적처럼 느껴졌고 초록색 평상 위에 떨어진 꽃잎은 6월에 찾아오는 검붉은 버찌 열매가 남기는 검붉은 반점을 추인하려는 의도였다.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꽃의 눈치를 미리미리 받아 놓았다면 삶의 허망함도 반이상 줄여 놓았을 것을... 영원한 꽃으로 착각한 사유의 어눌함이 곳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나를 참 부끄럽게 한다.
속도감 있게 지는 꽃이 벚꽃이라 하지만 자라리 지려면 한순간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그럴려면은 모진 바람이 필요한데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 바람이 4월을 안고 있는 한, 피고 지는 일은 절기에 맡겨두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