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던의 <하느님 나라>
1. 예수의 선교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는 선교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따르라’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에 이르기 위한 강한 열망과 믿음과 실천을 요구하는 표현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유대교 내부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된 중요한 표현이었다. 유대인들은 신이 지상을, 특히 유대인들을 백성으로 삼아 통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는 때론 신이 다스리는 영역을 가르키거나 신의 통치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나라를 빼앗긴 고난의 시기 동안 ‘하느님 나라’는 ‘포로의 귀환, 갱신된 약속, 새 성전의 건설, 시온으로 야웨의 귀환, 환란의 절정기, 우주적 혼란, 사탄의 패배, 최후의 심판’와 같은 주제와 함께 등장한다. 이런 용법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유대인들의 희망과 기대가 응집된 특별한 은유적 표현이란 점을 확인하게 된다.
2.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말했을 때, 어쩌면 그것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는 그들이 공유하고 있던 변화와 희망의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하느님 나라’는 모순적인 묘사 속에 등장한다. 즉, ‘하느님 나라’가 앞으로 도래할 나라인가, 아니면 이미 현존하고 있는 나라인가에 대한 표현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속하는가 아니면 현재에 속하는가’는 많은 신학자들의 논쟁 주제였다. 제임스 던은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던은 구체적인 복음서의 사례를 분석하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은유적 표현은 직접적인 언어적 개념과는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는 점을 밝힌다. “하나님의 왕권은 왕권이 통상 환기시킨 견지에서 이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는 그것은 ‘직접적으로 주제넘게, 서술적이지 않으면서 실재를 묘사하는 차원에서 다르게는 묘사될 수 없었던 것을 묘사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3. 던은 ‘하느님 나라’의 미래적 의미 ‘임하게 될 나라’에 대한 성서의 표현을 추적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선교 시작 단계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미래적 시제로 표현된다. 주기도문 속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표현도 이러한 점에서 일치한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적 의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와 같은 ‘팔복 선언’에 등장하는 ‘종말론적 역전’ 표현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4. 예수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많은 신학자들에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용이다. 일부 학자는 예수의 심판 경고가 선교에 실패한 후대 초기 교회의 좌절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던은 앞으로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 일어날 심판에 대한 경고는 예수로부터 기원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의 제자들이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세례자 요한의 심판 설교에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철저한 심판 강조의 취지를 예수 전통에 개입시켰어야 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예수의 심판 경고와 동시에 뒤따르는 보상과 하늘잔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기대가 담겨있는 표현이라는 것이 던의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던은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지 (....)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와 같은 ‘위기의 비유’들로 통해 임박한 나라(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로서 또는 아직 도래할 것으로서 또는 거론된 자들에게 충분히 영향을 줄 것으로서 일관되게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5. 그러나 복음서 속에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다는 수많은 표현이 남아있다. 마가복음의 “때가 찼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인정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시작 단계부터 ‘하느님 나라’는 현재에 존재하고 또한 앞으로 도래할 것이라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현존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찰할 수 있는 표적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요, 또 보라 그것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말지니, 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6. 예수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성공은 신의 권능이 세상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증거이며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씨뿌리는 사람, 씨앗, 겨자씨, 누룩’과 같은 사례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실현된 기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종말론적 의의를 지닌 정점의 사건, 옛 전통에 대한 무언가 새로운 돌파, 삶을 바꾸는 취지의 예기치 않은 발견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무관해 보이는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통치의 현존하는 실재 등등에 대한 같은 어조를 우리는 듣는다.”
7. 그렇다면 이런 모순적인 표현이 예수에 관한 증언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던은 두 사람의 신학자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현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크로산은 하느님 나라를 ‘지배 계층에 수탈당하고 저항하는 소작농 사회’의 배경 속에서 ‘평등주의적 회복’을 구하는 의미로 해석했으며, 라이트는 유대인들의 오랜 ‘추방과 귀환’이라는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하나의 거대 서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성격에 접근하는 것은 거기에 따르는 분명한 증거가 없을뿐더러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해방식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환기시키는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 속에는 수많은 다원적 가치와 개념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유대의 역사와 시간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단일한 하나의 상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8.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표현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희망과 기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아마도 도래할 그 시대, 하늘이 땅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들을 말하는 대안적 통로였다.” 예수 또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구체적 개념이 아닌 은유적 표현으로 ‘하느님 나라’를 암시하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인간의 희망과 기대에 대한 독려와 방향제시였다.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는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희망’에 대한 복합적인 맥락이 다원적 차원에서 작동되고 있는 점을 보여준다.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미래의 약속이면서 현재의 우리를 변화시키고 중요한 가치에 전념하게 만드는 토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 나라’의 모순적 성격은 오히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측면을 묘사하는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첫댓글 - 인류의 가치 실현이라는 주제가 아직도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