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2혁사>(1) : 가면극의 구성과 비판정신
1. 가면극의 무대는 서구식 극장무대와 달리 일상의 공간이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라면 무엇이든 가면극의 무대가 된다. 가면극은 보통 해가 지면 공연이 시작되어 한밤중이나 새벽까지도 이어진다고 한다. 불빛에 반사된 가면의 모습은 낮과는 다른 인상을 드러낸다. 가면의 형태가 좌우 불균형하거나 일정 부분을 과장하는 것은 시선과 위치에 따른 조명적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극적 장치의 하나이다. 가면극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서사적 전개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각각의 내용은 구분되는 과장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표현된다.
2. 과장을 독립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배제하고 갈등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야기를 통한 극적 환상에 몰입시키지 않고 현실의 갈등과 모순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에 곧바로 접근하게 하여 풍자의 강도를 높여준다. “독립적으로 보이는 각 과장들의 연쇄는 조선 후기 당대 사회의 가장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3.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고 분리되어 표현되는 상황을 즐기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적인 과장은 별개의 이야기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어떤 특별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것은 당시 민중의 삶을 옥죄는 불편한 진실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비록 풍자와 유머 그리고 해학의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그것은 결코 허위와 거짓이 아닌 실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가면극의 내용은 이런 모순적 불행을 결코 심각한 위기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시선과 집단적 유희를 통해 삶을 지속하는 에너지를 얻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주눅들지 않는’ 민중의 강인한 삶의 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4. 가면극에 나타나는 갈등 상황과 비판대상은 크게 3가지이다. 먼저 노장으로 대표되는 초월적인 권위에 대한 비판이다. 가면극에서 오랜 수행을 닦은 스님인 ‘노장’은 각시나 소무라는 젊은 여인을 만나 너무도 쉽게 파계한다. 노장은 도를 잃었지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현실에 대한 지혜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노장의 파계는 현실에서 실패한다. 목중에게 멸시받고 취발이라는 현실의 강력한 상대를 만나 낭패를 당하고 각시나 소무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노장이 지닌 초월적인 관념이 허망하다고 비판하고, 목중이나 취발이가 지닌 세속적 사고의 승리를 구가”하는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삶이 결코 특별한 도를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못지않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5. 가면극에서 가장 냉혹한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양반이다. 신분적 특권으로 평민들을 괴롭혔던 조선 사회의 계급적 위선은 가면극 무대에서 여실하게 밝혀진다. 가면극에 등장하는 양반들은 제대로 된 양반이 아니다. 대부분 불구자이거나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양반은 하인이나 평민들에게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 한다. 이러한 양반의 권위에 말뚝이로 대표되는 민중은 겉으로는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현실적인 항거와 조롱을 통해 양반의 허세를 폭로하고 그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면극에서 양반을 풍자함으로써 신분적 특권을 비판하고, 양반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줌으로써 평민의 항거가 정당하게 성취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6. 노장과 양반이라는 권위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가면극의 주된 풍자가 된 대상은 ‘영감’이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과 희생 요구의 주체는 대부분 ‘영감’으로 상징되어지는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가장의 권위를 앞세워 ‘할미’로 표현되는 처를 학대하고 첩을 얻어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여성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대부분의 가면극에서는 ‘할미’가 죽는 것으로 설정되어 나온다. 그것은 견고한 관습과 제도 속에서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가족제도의 모순을 명확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감’은 노장이나 양반만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보통의 평민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감이 반성하거나 뉘우친다면 용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7. 가면극은 농촌의 ‘마을굿’에서 기원하였지만, 점차 도시로 확산되면서 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풍자와 비판의 시선을 던지게 된다. 가면극의 형식적 전개는 서사적 형태를 제거하고 단편적인 상황표현에 중점을 둠으로써 극적 환상을 없애는 대신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부여한다. 가면극에 표현된 풍자 상황과 대상은 분명 당시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통해 현실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힘을 부여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가면극은 토인비의 역사철학을 적용한다면, 그들에게 가해진 ‘도전’에 대한 일상의 ‘응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체념하지도 않는 민중의 끈질긴 정서와 힘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자 무대였다.
첫댓글 -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할 수 있게 만든 비상구. 슬픈 민초들의 삶은 이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