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설(地動說) : 신 중심 사상 종말
천동설(天動說)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다른 모든 천체가 정지해 있는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학설이고, 지동설(地動說)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우주관입니다.
1600년 2월 17일 '지구가 둥글다.' 하여 수도원 신부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1548~1600)가 분형 (焚刑)당합니다. 니콜우스 코페르니쿠스가 (1473-1543) ‘지구는 둥글다.’ 하고 지구의 지동설을 주장합니다. 그때 모든 지식인들 특히 천주교에서는 이들을 미친놈이라 하고 반역자라 하였습니다.
지구가 돈다면 바다물이 거꾸로 쏟아질 것이질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에서 조르다노 브루노를 옥에 가두고 나중에는 그를 생화장시켜서 죽였습니다. 그에게 마지막 회개를 종용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명한 말이 “나는 죽어도 지구는 돌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제기 했으나 당신의 여건으로는 그 주장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를 부동의 존재로 인식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의 사상을 발전시켜 천문학 집대성이라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는 부동의 존재이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점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일부 내용과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한 이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학설이 중세 기독교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므로 한 단계 더 발전한 '천동설'로 확립되어 유럽 사회에서 불변의 진리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크게 발전하고 천문관측의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천동설이 모순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 건입니다.
1543년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태양을 비롯한 다른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은 이 생각은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로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란 책입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비스와 강변에 있는 토룬에서 출생했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부친은 그가 열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천주교의 대주교였던 숙부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열여덟 살에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천문학에 심취했고, 3년 후 르네상스 운동의 발원지인 이탈리아로 건너가 볼로냐 대학과 파도바 대학에서 법률, 의학, 신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이시기에 그는 '천동설' 이론에 조금씩 의문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기독교 신학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반박하는 자유로운 사상과 과학적 사고는 종교의 속박을 받았습니다. 이에 코페르니쿠스는 플라우엔부르크에 작은 천문대를 짓고 그곳에서 30년 동안 남몰래 천체를 관측했습니다. 그 결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탄생한 것입니다.
1514년에 자신의 이론을 담은 소책자를 발간했으나 주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데 그쳤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교회 고위 성직자들에게 그 이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60세가 될 때까지도 자신의 학설을 당당하게 발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1533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일련의 강연에서 "태양 중심설"의 주요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교회가 그런 자신의 행보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코페르니쿠스는 70세가 되던 해에 비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자신의 저서를 출간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변을 회전하는 한 행성에 불과하며 자전(自轉)한다는 사실도 증명했습니다. 또 우주의 중심은 바로 태양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가 주장한 ‘태양 중심설’은 엄밀히 말해서 정확한 학설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의 우주관에 도전한 그의 학설은 천문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근데 천문학의 포문을 열고 자연과학의 새 시대를 예고한 셈이지요. 중세의 암흑기를 빠져나온 자연과학과 철학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새로운 과학의 진리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30년 일생 받친 한 사람의 인류 최고의 결과물입니다. 2,000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진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 주장하여 거짓에 속아 살던 사람들을 구한 것입니다. 신(神) 중심적 세계관의 종말의 가져온 것이지요.
인간을 행복하게 해야 할 종교가 '지구가 둥글다.'라고 하여 수도원 신부를 분형(焚刑)시키는 사건은 종교가 종교를 말살한 사건입니다. 천지창조의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논리라고 이런 주장을 한 신부를 생화장 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우주 과학시대에 너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에게 어떤 위로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형 당한 신부는 「조르다노 브루노」입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조금 일찍 태어나신 분으로 원래는 가톨릭 수도회의 수도자였으나 이단의 죄로 교회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자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단의 죄를 물어 종교 재판을 합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갈릴레오는 자신이 틀렸다고 다시는 교회의 의견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간신히 풀려납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보다 앞서 부르노는 8년간 이어진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사상을 굽히지 않고 결국 화형당하게 됩니다.
부르노는 사실 과학자도 아닌데 태양이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낸 분입니다. 지구 중심의 닫힌 우주관에서 태양 중심의 열린 우주관은 연 분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불과 400여년 전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경에 반하는 사교와 이단의 위험한 이론이었답니다. 결국 교회는 부르노에게 몇 가지의 이단 교리를 더 덧붙여 그의 혀와 얼굴을 쇠꼬챙이로 뚫고 수레에 태워 로마 시내를 끌고 다닌 뒤 발가벗겨 로마의 한복판에서 화형시킵니다. 인류의 무지가 낳은 교회권력의 오만이 하느님의 섭리를 깨우친 위대한 선각자에게 신의 이름으로 범한 파렴치한 범죄가 되었습니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그는 무려 8년 동안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예수회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사형을 선고하자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그 후 1899년 빅토르 위고 등은 사상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브루노를 기리며 그가 화형 당한 로마의 캄포데 피오레 광장에 동상을 건립하여 지금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 브루노의 동상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조르다노 부루노 동상>
“브루노에게.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서구 유럽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 신흥 과학자에 의해 태양 중심의 새로운 우주관이 태동하고, 뉴턴에 의해 그 우주의 물질들이 움직이는 규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브루노는 구 문명과 새 문명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은 행복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종교로 인해 불행한 삶은 산다면 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종교의 거짓에 속지 않고,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고, 가짜 종교인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늘 공부하고 순간순간 현명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살아 있는 나보다 위대한 존재는 없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법칙입니다. 나 없는 우주는 없고 나를 떠나 이 세상에 존재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출처: https://juny3.tistory.com/21 [정신혁명]외 다수 글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