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司馬史記〕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이후의 사건은 역사서에 결락되거나 잘못된 부분이 많은데, 믿을 수 있는 자료는 오직 사마천의 《사기》 뿐이다.
말馬〕을 가지고 말을 설명하는 것은 말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을 설명하는 것만 못하니, 역사를 논하는 자가 하필 사마천을 말하겠습니까. 요 임금과 하(夏)ㆍ은(殷)ㆍ주(周)의 글은 시대가 멀어 논할 수가 없거니와, 《춘추좌씨전》 이후로는 역사서로 세상에 이름난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사마천을 주로 하여, 논리를 펴고 전거를 인용할 때 《사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이로 인해 스스로 누락되고 모순되는 잘못으로 돌아가고 마니, 이것이 말을 가지고 말을 설명하는 폐단입니다.
지금 말 아닌 것으로 설명해 보면 억지로 갖다 붙이고 잘못 서술한 실책을 가릴 수 없지만 문장의 천만 정태(情態)는 또한 더욱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자 하는 자들은 어찌 사마천 아닌 것보다 먼저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마천이 역사가의 종주가 된 것에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뛰어나고 웅위한 재주와 분방하고 호탕한 기운으로, 성인이 멀어지고 경전이 쇠잔해진 시대를 당하고 전쟁으로 세도가 무너진 뒤를 이어, 약관의 나이에 개연히 천하를 유람하려는 뜻을 세웠습니다. 이윽고 우혈(禹穴)을 답사하고 구의산(九疑山)을 둘러보았으며, 배를 타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찾아 보고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답사하였으며,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을 강습하고 공자의 유풍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흉중은 실로 여덟 아홉 개의 운몽택(雲夢澤)을 삼킨 것이니 구구하게 독서한 자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불행한 시대를 만나기에 미쳐서는 곤액을 당한 깊은 울분을 품고서, 울울하고 불평한 마음을 스스로 펼쳐낼 방법이 없었으니, 이에 위로 황제와 요ㆍ순 임금의 시대를 서술하고 아래로 태초인지(太初麟止)의 시대까지 이르렀으며, 경전과 백가의 말을 두루 채집하여 수천 수백 년 동안의 세월을 종횡으로 치달려 일가(一家)의 문장으로 엮어내어, 끝내 하락(河洛)에서 손을 부여잡고 당부한 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은인자중하며 발분저서(發憤著書)한 것이 쫓겨난 굴원의 《이소》와 무릎이 잘린 손빈의 《병법》과 더불어 기상이 꼭 부합할 듯합니다. 그래서 이 《사기》 130편 52만 6500자에 무한한 언외(言外)의 뜻이 있으니, 이 어찌 사실을 기술한 역사책으로서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책을 저술할 때에 새로이 범례를 만들어 편년체를 변화시켜 기전체를 확립하였으니, 부각시키고 비판하며 칭찬하고 혹평한 내용이 성인의 법도에 모두 부합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공자를 숭상하고 육경을 표창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고신(考信)할 바가 있게 한 공로는 또 어찌 과소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천이 스스로 가탁한 분은 공자입니다. 공자가 《춘추》를 지으실 때엔 노나라 역사서를 바탕으로 수정ㆍ정리하여 242년 간의 세월에 포폄의 뜻을 담았을 뿐이니, 역사를 첨삭(添削)하는 사이에 털끝만한 사심을 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사마천은 그렇지가 않아 한 부의 《사기》를 가지고 은근히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하고 비분을 털어내는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그 글을 읽어 보면 〈화식열전(貨殖列傳)〉이나 〈유협열전(游俠列傳)〉 등과 같은 편은 궁액을 원망하고 인의를 부끄러워하는 주제가 아님이 없습니다. 선인들이 “〈자객열전(刺客列傳)〉 등의 편을 읽으면 피해자를 대신해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이 들게 하고, 사군전(四君傳)을 읽으면 하사(下士)가 주군의 위급함을 구하려는 마음이 들게 하고, 〈굴원열전〉과 〈가의열전〉을 읽으면 불우함을 슬퍼하는 마음이 들게 하고, 〈노중련열전〉을 읽으면 벼슬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들게 한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모두 사마천이 담은 뜻에 감응한 것입니다. 그의 문장은 공교하지만 뜻은 슬프니, 성인의 필법을 기준으로 본다면 또한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른바 역사가의 조종이란 자가 그나마 허다한 사의(私意)가 없는 다른 사가(史家)만 못하니, 어찌 한갓 문장이 좋다는 이유만을 가지고 《춘추》의 죄인 됨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인정하는 점은 다만 웅걸하고 기려한 필법과 안배하고 포괄하는 사유가 백대에 홀로 우뚝하다는 것일 뿐이고, 저 어그러진 의리와 괴천(乖舛)한 문투에 대해서는 또한 ‘말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을 설명한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가령 사마천의 장점을 취하고 사마천의 단점을 버려 《사기》를 읽는 올바른 법을 잃지 않고자 한다면 이 길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저는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마다 그의 뜻을 마음 아파하고 그 문장을 기이하게 여겨, 그가 성인의 도를 듣지 못한 것에 대해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 역사를 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을 가지고 말을 설명하는 잘못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지금 밝은 질문을 받자오니, 어리석은 충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주1] 말을 …… 말하겠습니까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닌 것을 깨우치는 것이, 손가락 아닌 것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닌 것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고, 말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 말 아닌 것으로 말이 말 아닌 것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한 것을 변용한 표현이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의 이름에 ‘마(馬)’ 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 사마천의 《사기》가 꼭 훌륭한 역사 기록이 된다고 할 수 없는데, 이것을 사마천의 문장을 통해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역사서들과 비교하여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의미이다.
[주2] 우혈(禹穴)을 …… 답사하였으며 : 우혈은 회계산 줄기에 있는 우 임금의 유적이고, 구의산은 호남성 영원현(寧遠縣)에 있는 산으로 순 임금의 무덤이 있다는 곳이다. 원수와 상수는 굴원이 쫓겨나 배회하던 곳이고, 문수와 사수는 공자가 강학한 지방이다.
[주3] 흉중은 …… 것이니 : 여덟 개나 아홉 개의 운몽택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넓다는 말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운몽과 같은 것 여덟 아홉 개를 한꺼번에 집어삼키듯, 그 흉중이 일찍이 막힘이 없었다.〔呑若雲夢者八九 於其胸中 曾不蔕芥〕”라는 구절에서 온 표현이다.
[주4] 태초인지(太初麟止) : 태초는 한 무제의 시호이다. 인지(麟止)는 기린이 잡혔다는 기사까지 쓰고 붓을 멈추었다는 뜻이다. 한 무제가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았는데,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기린이 잡혔다는 사실까지 서술하고 멈춘 것을 말한다.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도당(陶唐) 이후로 인지(麟止)까지 서술하였는데, 황제(黃帝)에서 시작하였다.” 하였다.
[주5] 하락(河洛)에서 …… 부탁 :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한 무제 때 주남(周南) 지방인 낙양(洛陽)에 유체(留滯)되어 있었기 때문에 봉선(封禪)의 행사에 참의(參議)하지 못했다. 사마담은 이 일로 울분이 치솟아 병이 위독해졌는데, 죽음에 임하여 사마천의 손을 잡고 ‘유업을 계승하여 《사기》를 완성하라.’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주6] 요컨대 …… 공로는 : 《사기》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무릇 학자는 서적이 지극히 광범하지만 그럼에도 육경에서 진실한 근거를 찾는 법이다.〔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藝〕”라고 한 구절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司馬史記]
問。周秦以後。史多闕失。所傳信。惟司馬史記也。對。以馬而喩馬。不若以非馬而喩馬。則論史者何必曰馬乎。虞夏商周之書。尙矣無容議爲。盖自左氏以下。史之名於世者。不爲不多。而世之學史者。動以馬爲主。論說引据。不出於其中。故率多因是而自歸於錯漏牴牾之科。此以馬而喩馬之弊也。今若以非馬而喩之。則其傅會舛繆之失。固不可掩。而文章之千情萬態。亦可以益見矣。欲讀馬史者。烏可不先於非馬也哉。雖然馬之爲史家之宗者。亦豈無所以而然耶。盖其奇偉之才。跌宕之氣。當聖遠經殘之日。承戰途橫潰之後。以弱冠之年。慨然有壯遊之志。遂乃探禹穴闚九疑。浮沅湘涉汶泗。講業齊魯之都。觀孔子之遺風。則其胷中。固已呑得八九雲夢。有非區區讀書者之比矣。及夫遭時不幸。阨困幽憤。無以自伸其壹欝不平之意。則於是乎上述黃帝陶唐之世。下逮太初麟止之時。旁采經傳百家之語。馳騁上下於數千百載之間。而勒成一家之言。卒不負河洛執手之託。其隱約發憤。直欲與放逐之離騷。臏脚之兵法。朝暮遇焉。則凡此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之內。莫不有無限言外之意。是豈可徒以記事之史言之者哉。且其爲書發凡起例。變編年而立紀傳。雖其進退抑揚之間。不能皆合於聖人之法度。而要之尊尙仲尼。表章六經。使後世之人有所考信。則又曷可少之哉。雖然子長之所自託者孔子也。夫孔子之於春秋。因魯史而修之。寓褒貶於二百四十二年之間而已。何嘗有一毫私意於筆削之際。而子長則不然。欲將一部史記。隱然作自家訴寃洩悲之具。今讀其書。如貨殖游俠等傳。無非怨戹窮羞仁義底話頭。而前輩所稱讀刺客傳。則令人有爲人報仇意。讀四君傳。則令人有下士急難意。讀屈賈傳。則令人有悲不遇之意。讀魯連傳。則令人有輕爵祿之意者。皆其託寓之所感也。其文則誠工矣。其志則誠悲矣。苟以律之於聖人之筆。則不亦左乎。然則其所謂史家之宗者。反不如 他史家之猶爲無許多私意也。又何可徒以其文而不思其爲春秋之罪人耶。雖然吾之所取者。特以其雄傑奇麗之筆。錯綜包括之思。曠百代而獨立而已。若其義理之繆戾。辭意之舛錯。亦惟曰以非馬喩之而已。如欲用馬之長。棄馬之短。而不失乎讀史之法。則舍是道何由哉。愚也每於讀馬史之際。未嘗不傷其志奇其文。而惜其人之不聞聖人之道。又歎世之論史者。率不免於以馬喩馬之失矣。今奉明問。正激愚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