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짐 싸서 서울 큰 병원 가라”라는 말, 나는 여태 지방 공공의료와 중소병원에 대한 오해이거나 비아냥이려니 했었다.
봄이라고 해도 새벽 공기가 칼끝처럼 매웠던 어느 날이었다. 예기치 않은 일로 강남에 볼일이 생겨 새벽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던 중 A병원에 진료받으러 간다는 한 승객의 한숨 소리를 듣게 됐다. 건강검진을 받을 요량으로 집 가까운 병원에 들른 딸아이 가슴에 악성종양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어서 서울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 보라”는 주치의 말을 듣고 1주일이 멀다 하고 새벽에 눈을 떠서 서울로,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한다는 노부의 얼굴엔 검고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 있었다. 노부는 병마에 지친 딸아이가 가엽고, 딸자식은 노부의 이마에 이지러진 주름을 보며 괴로워한다. 짐짓 여식은 태연한 척 낯빛을 감추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그 내면의 표정만 봐도 병세가 예사롭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오자 애잔함이 내 눈가에도 서리기 시작했다.
1시간 남짓 달렸을까. 동대구역이 가까워지자 두 부녀는 무엇엔가 황급히 내몰리듯 진둥한둥 자리에서 일어나 서두르기 시작했다. 2, 3분 간격으로 뒤따라오는 부산발 수서행 고속열차(SRT)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열차를 놓칠까 두려운 나머지 노부는 여식을 낚아채듯 끌고 무섭게 달린다. 평생 일로 굽어진 노부의 등허리엔 아직도 짐 하나가 올려있다. 그 어깨에 매달린 등짐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뜩이나 아픈 몸을 이끌고 ‘원정 진료’를 떠나는 것도 서러운데, 교통체계마저 열악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싶었다.
SRT 종착지 수서역 앞에는 환자가 길게 줄을 늘어선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른바 서울의 빅5 병원이라 일컬어지는 아산과 삼성, 성모병원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경남지역에서 KTX를 이용하는 승객은 중앙행정관서나 기업의 본사 등을 찾는 샐러리맨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많은 반면, 수서역으로 향하는 SRT는 환자나 대치동 학원가를 찾는 수험생 등 거친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숨 가쁜 이야기를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다.
SRT 고속열차는 경부선과 호남선만 운행하고 있다. 그 때문에 경전선을 경유하는 진주와 창원, 김해, 밀양 등지의 주민들이 이들 병원에 진료를 받으려면 KTX를 타고 동대구역까지 가서 수서행 SRT로 갈아타거나, 서울역 또는 광명역에서 내려 버스나 지하철 등을 타고 1시간가량 더 이동해야 한다니 의료서비스 격차에 교통체계까지 열악해 도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동안 많은 도민은 경전선에 수서행 KTX를 증편하거나 SRT 신설을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다. 역대 정부마다 ‘지역균형발전’이다, ‘혁신역량 강화’다… 온갖 달콤한 말을 그토록 부르짖었으면서도 이제껏 경남에서 ‘철도교통의 오지’라는 오명을 씻어내지 못했다니 도대체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기는 하는 건가? 수서행 아침 풍경을 보며 던지게 되는 씁쓸한 질문이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장하고 민생을 챙기는 일은 국가의 기본적 기능이자 민주국가의 무한책무이다. 시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지역의 의료기반을 하루빨리 확충해야 하지만, 당장 수서행 SRT 신설만이라도 조속히 신설되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 부녀의 원정 진료 길이 편안하기를, 수서역으로 향하는 서민들의 이맛살이 활짝 펴지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첫댓글 위 글은 2022.5.8 경남도민일보를 통해 보도된 칼럼입니다. 저의 이러한 주장과 요청이 통했을 리 만무하겠습니다만, 올해 9월부터 진주~서울 수서 간 고속철도 SRT가 신설됨에 따라 교통편의가 크게 개선되어 다행입니다. 이러한 성과가 있기까지 경남도와 진주시 등에서 많은 노력과 수고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관계 기관과 철도당국에 감사드립니다.
공유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시지요?
간간히 안부는 듣고 있습니다.
항상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시는 조광일 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