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역동시조문학상 심사평
어둠을 벼려 새벽을 세운 붓
역동시조문학상은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문학적·학문적 업적과 선비정신을 기리고, 이를 오늘의 시조정신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마련된 상으로 올해 제14회를 맞았다. 이 상은 단양 우씨 문희공파 종친회의 후원을 받아 (사)한국시조협회에서 수여하는 훌륭한 문학상이다. 응모 자격은 등단 5년 이상의 기성 시조시인으로 하였으며, 공모 주제는 자유주제와 지정주제를 함께 제시하였다. 특히 응모작 가운데 한 편은 반드시 우탁 선생과 관련된 작품을 요구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이해와 현대적 시조 창작 역량을 함께 살피고자 하였다.
심사는 지난 9월 8일 본 협회 사무실에서 송귀영 문학상위원장과 김신아 간사가 참석한 가운데, 세 분의 심사위원이 심사 규정과 방법에 관한 협의를 마친 뒤 진지하게 진행하였다. 응모된 많은 원고를 무기명으로 복사하여 작품만을 놓고 심사한 결과, 1차 예심에서 15편을 선정하고, 2차 본심에서 다시 5편으로 압축하였다. 이어 3차 최종심에서는 「새벽을 세운 붓」과 「물꼬」 두 작품이 최종 경합을 벌였으며, 심사위원들의 면밀한 검토 끝에 「새벽을 세운 붓」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당선작을 확정한 뒤 작자를 확인한 결과, 두 작품 모두 라현자 시조시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당선작 「새벽을 세운 붓」은 제목 자체가 작품의 핵심적인 시적 발상을 압축하고 있는 4수로 구성된 연시조다. 이 작품은 고려 말의 격동기를 살아간 역동 우탁 선생의 삶과 정신을 역사적 사실의 재현에 머물게 하지 않고, ‘붓’과 ‘새벽’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현재화한 작품이다. 모진 풍우와 차가운 시대의 압력을 견뎌낸 한 인간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끝내 그 정신이 한 획의 붓끝으로 되살아나 ‘겨레의 뼈’를 세우는 장면에 이른다. 역사와 인물, 시와 정신을 하나의 서사적 흐름으로 엮어낸 점에서 작품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다.
첫수의 “모진 풍우 휩쓴 궐에 도끼자루 움켜쥐고”는 우탁의 강직한 기개를 강렬한 육체적 이미지로 환치한다. ‘도끼자루’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는 결연한 의지의 표상으로 읽힌다. 이어 “떠돌던 피울음을 바다 밑에 가라앉혀”라는 구절에서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흘러간 수많은 희생과 비극을 ‘피울음’으로 압축하고, 그것을 바다가 삼키는 장면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파도는 / 소리도 없이 / 그 세월을 삼켰네”라는 종결부는 역사적 비극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파도의 침묵에 맡김으로써 오히려 깊은 여운을 남긴다. 침묵하는 바다는 역사의 기억을 품은 거대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둘째 수에서는 외부의 역사적 격변에서 한 인간의 내면적 고통으로 시선이 깊어진다. “언제든 버릴 목숨 찬바람만 벗이 될 때”와 “언 섬돌에 꿇은 무릎 서릿발만 쌓여가도”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선비의 정신을 구체적인 신체 이미지로 보여준다. 특히 ‘무릎’과 ‘서릿발’, ‘살가죽’이라는 감각적 어휘는 정신적 고난을 육체의 고통으로 전환한다. 그 가운데 “갈라진 / 살가죽 속에 / 천년토록 푸르러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중요한 시적 성취 가운데 하나이다. 상처 입은 육체와 천년의 푸름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맞물리면서, 고난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정신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셋째 수에서는 역사적 인물의 정신이 그의 문학적 유산과 직접 연결된다. “사인암 맑은 물에 굽은 몸을 비춰 보며”는 노년의 우탁을 자신의 삶 앞에 세우는 장면이며, 이어지는 “바위에 쓴 탄로가 물빛 되어 흘러가고”는 그의 대표적인 시조 「탄로가」를 자연의 이미지 속에 녹여낸다. ‘바위에 쓴 탄로가 물빛 되어 흘러간다’는 발상은 문학의 불변성과 시간의 유동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표현이다. 돌은 남고 물은 흐르지만, 그 위에 새겨진 정신은 세월을 건너간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높은 산 / 짙은 메아리 / 돌가슴에 남았네”에서는 산과 메아리와 돌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한 인간의 정신적 유산이 오래도록 남는 과정을 형상화한다. 특히 ‘돌가슴’은 단단함과 침묵, 기억과 인내를 함께 내포하는 적절한 이미지로 기능한다.
마지막 수에 이르러 작품의 의미망은 한층 넓어진다. “텅 빈 뜰 눈발 치는 적막”은 단순한 겨울 풍경을 넘어 역사적 암흑과 고독의 공간으로 읽힌다. 그 적막을 “다 가르며” 붓끝이 움직이고, “벼루에 잠긴 어둠”을 붓으로 건져 올린다는 표현은 매우 독특하다. 특히 ‘어둠을 건져 올린다’는 발상은 추상적 개념인 역사를 시각적·촉각적 이미지로 전환한 대목으로, 작품의 상징성을 한층 높인다. 그리고 “새벽빛 / 한 획을 그어 / 겨레 뼈를 세운다”에 이르러 작품의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정점으로 수렴한다. 붓은 단순한 문방구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고 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며, 새벽은 새로운 시대와 희망의 표상이다. ‘겨레 뼈를 세운다’는 결구는 개인의 삶을 민족적 차원의 정신으로 확장하면서 작품 전체에 장중한 울림을 부여한다.
형식적으로도 이 작품은 각 수 종장의 행을 적절히 분절하여 의미와 호흡에 변화를 주고, 현대시조 특유의 시각적 리듬과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각 수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지가 응축되면서 다음 수로 이어지는 긴장감을 형성하고, 마지막 수의 ‘새벽빛’에 이르러 전체 시상이 하나로 결집되는 구성은 작품의 완결성을 높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강점은 역동 우탁을 단순히 ‘충절의 인물’로 박제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도끼, 피, 파도, 서릿발, 살가죽, 물빛, 돌, 벼루, 붓, 새벽빛 등의 구체적인 사물과 자연물을 통해 그의 삶과 정신을 감각적으로 되살려냈다. 역사적 인물을 기념하는 시가 자칫 추상적인 찬양이나 교훈적 진술로 흐르기 쉬운 데 비해, 이 작품은 구체적인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인물의 정신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역사적 소재가 문학적 소재로 전환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결국 「새벽을 세운 붓」은 한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통해 시대의 어둠을 견디는 인간의 정신과 문학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불러내되 단순한 역사적 회고에 머물지 않고, ‘붓’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통해 오늘의 독자에게 정신의 계승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어둠’과 ‘새벽’, ‘돌’과 ‘물’, ‘벼루’와 ‘붓’의 대비와 결합은 작품의 시적 의미를 확장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역동 우탁의 정신을 ‘어둠 속에서 새벽을 긋는 붓’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역사와 문학,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의 시적 공간에서 만나게 한다. 전통적 인물의 정신을 현대시조의 언어와 이미지로 재해석하고, 고난의 시간을 넘어 새로운 새벽을 세우는 정신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적 의미는 각별하다.
끝으로 당선의 영광을 안은 라현자 시조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역사적 소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징적 형상화 능력, 그리고 시조의 전통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역량이 앞으로 더욱 깊고 넓은 시 세계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석규, 박헌오, 김석철(심사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