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강 “저주와 고아의 영에서 벗어나라“
여러분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 은혜 받을 말씀은 여러분의 고정 관념을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고정 관념이 산산이 부서져 다시는 복구 할 수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가진 모든 의구심과 의심을 없애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치료를 방해하는 모든 의심을 하나님께서 산산 조각내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단 하나만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인간의 생각은 필요 없고 하나님의 의견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는 문맥 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의견을 좇거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이랬다고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따르는 대신 결국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믿는 분들도 종종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어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르고 있는 죄 때문에 무슨 저주를 받고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우리 조상 대대로 받은 저주가 전해 오면서 안 되는 가 보다”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은 “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갖고 의심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막11:23)
의심은 헬라어로 “다야크리노스”인데 뜻은 “구분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자신의 믿음을 기준으로 내가 보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조상의 죄로 받는 저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시길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저주는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성경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 어떤 대물림되는 저주도 여러분에게는 영향이 없습니다. 저주가 대물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주장하는 분들은 대부분이 모세 시대의 율법에 나온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신명기에 나오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신7:26) 신명기의 이런 말씀을 두고 집에 이런 저런 것을 둬서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것을 믿고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그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결국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임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많은 분들에게 물어보면 대물림 되는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대물림을 끊는 기도를 해 달라고 해서 끊는 기도를 해 주면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대물림 저주를 끊는 기도를 받습니다.
그 마음에 진정한 믿음이 없고 진정한 마음에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상태지요. 바른 믿음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마음에 안식이 없다는 것은 그 바탕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도 대물림의 저주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만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사항에 대해서는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성도들을 구약의 율법 말씀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이 가증한 물건을 집에 들이면 같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신약 말씀은 우리가 다시 저주를 받으려면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율법을 믿으면 우리는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가르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우리는 율법아래 있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만 갈3:10절을….
갈 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의식법을 따르는 이들이죠.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 번제를 드려 속죄제를 드리는 율법이나 또는 돼지고기나 갑각류 등 섭생에 제한을 두는 율법이죠.
또는 유대식 전통 율법이지요. 이스라엘의 절기를 지키라는 법이기도 하죠.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런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율법에서도 자유하지만
성경에 나온 율법의 저주와 율법을 행한다는 뜻은 십계명의 율법과 그 모든 율법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을 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3장 7절을 보십니다.
고후 3: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여기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의 조문”이라고 했습니다. 분명 죽게하는 율법의 조문은 돌에 써서 새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금 앞에서 예를 들었던 섭생법이나 의식법 곧 뭐는 먹지 말아야 하고, 동물을 죽여서 제물로 삼고, 이스라엘의 절기를 지키는 것 등은 절대로 돌에 써서 새긴 적이 없습니다.
단 하나 돌에 써서 새긴 율법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죽게 하는 직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율법”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어떤 교회는 십계명을 연속 시리즈로 설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서서히 죽이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아멘! 돌에 써서 새긴 율법은 십계명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직분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살인을 하고 다녀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정말 바보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십계명 아래에 있지 않고, 십계명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율법에 대해서 죽으면 죽을수록 성령의 역사 하심은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이 성령님을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만드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승리의 능력이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도 있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했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서는 아내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고 더욱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은 지켜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간음하지 않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간음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이 어떻게 간음을 합니까? 간음하지 않았다고 해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시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롬13:10) 따라서 은혜 아래에 있으면 율법을 넘어서 행하게 됩니다.
율법은 “도둑질 하지 말라”고 말씀하지요. 그러나 은혜 아래에서는 남에게 베풀게 만듭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은혜아래에서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켜야 거룩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룩하게 들릴 지는 모르지만 거짓말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은혜아래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율법을 “죽게 하는 직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입니까? 십계명입니다. 이것 만으로 부족하다면 로마서 7장 4절을 보시겠습니다.
롬 7: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 율법은 무슨 율법입니까? 제가 말한다고 믿지 마시고 이 말씀의 문맥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말씀은 문맥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니다.
롬 7:5-6⇒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0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 “이제는”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여기서 우리가 벗어난 율법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 율법의 조문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속해서 7절을 보십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율법은 분명 십계명임을 분명 알 수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문맥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율법이란? 십계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더욱 지키려고 할수록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아멘 “목사님! 그런데 지금 우리가 구원 받으려고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거룩하게 되려고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씀하길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3:3)
성령을 받은 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들음으로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으로 역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에 율법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까? 전부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것이고 들음으로 난 믿음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대물림되는 저주에 대해서는 지금 확실하게 종결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며 여러분도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저주는 받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러면요. 누가 나에게 저주를 퍼 부으면 어떻게 되나요?” 여러분!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무슨 근거로 나의 보호자 되신 예수님보다 그 사람이 더 강하다고 믿는 것입니까?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내 삶에 주신 축복보다 사람의 말이 더 강하다고 믿습니까? 심지어 저주로 명성이 높았던 전물 마술사 발람도 소와 염소의 피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술사나 마녀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예수님의 보혈 아래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저주를 걸 수 있다고 행각하는 것입니까? 민수기 23장 21절을 보십니다.
민 23:21⇒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반역이 없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와 허물이 없었습니까? 아주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보지 않으심이 저들에게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23장 23절을 보시면
민 23:23⇒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여기서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했는데 “복술”이란 히브리어 원문에 보시면 “마법”을 뜻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구약 율법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모든 마법과 저주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그 효과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아멘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불운이나 징크스나 저주 아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으나 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혹 누가 여러분을 저주하려고 해도 저주가 반사되어 저주한 자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꼭 말해 주세요. 조심해! 저주가 반사 될 수가 있어!
저와 여러분은 빈틈없고 함락 불가능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요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저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 저주 받고 싶다면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에 있으면 저주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앞에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증한 것을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그와 같은 장에 읽어 보시면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신7:1-3)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안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지금 당장 가서 그들을 죽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해당 족속들을 죽이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제 뜻은 무슨 근거로 우리는 하는 지키고, 하나는 안 지켜도 되느냐는 말입니다. 율법은 전체가 하나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잖습니까? 그래도 십계명을 꼭 지키겠다고 하신다면 그러면 예배드리는 날도 여러분은 주일날 즉 일요일에 예배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하면 토요일 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토요일이 유대교 안식일이거든요. 토요일이 항상 안식일이었고, 이것은 율법 안에서는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일요일과 바꿀 수가 없죠.
그러나 일요일은 주님의 날이자 한 주간의 시작하는 날입니다. 구약 시대는 인간이 일을 한 뒤에 쉬어야 했습니다. 율법으로 내려온 전통적인 방식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언약에서는 첫 날이 쉬는 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성공적으로 일 할 힘을 얻어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약이 아닌 신약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그런 것은 시대에 따라서 바꿔야지!” 누가 바꿀 권리를 주던 가요? 율법 아래에 있다면 첫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나의 마음 속에 우상이 있다면 출애굽기 20장 5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 보십니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기서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이것이 첫 번째 저주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러분이 십계명 즉 율법아래에 있다면 하나님이 그 죄를 자손 삼 사대까지 갚으십니다.
”목사님! 이 부분은 예외로 하면 안될까요?”여러분! 야고보서에 보시면 율법은 전체가 하나라고 했습니다. (약2:10) 율법 중에 하나를 범하면 율법 모두를 범한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전체가 하나입니다.
지키면 전체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라도 안 지켰으면 전체를 한 지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키고 저 것은 안 지키고 내 마음대로 취사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주를 언제 받는 지 아세요?
가증한 것이 있으면 저주 받는다고 믿을 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은혜가 아니고 율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고 저주 아래에 있게 됩니다. 율법의 전체적인 저주 아래에 있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 집에 가서 아무 신문이나 펼친 뒤에 별자리 운세를 본다고 칩시다 그것도 주일날에요. 제가 장담하건데 어느 잡지든 여러분 집에 가서 아무 잡지나 펼친 다음에 보세요.
별자리 운세 점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주 아래 있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보는 순간에 끝입니다. 저주를 받게 되죠. 여러분! 우리가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새 언약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을 보십니다.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율법, 곧 십계명 아래에서는 악행을 용서하지 않으시며 자녀에게 죄를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 말씀하십니다.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다시는”이라고 했습니다. “다시는”이란 무슨 뜻입니까? 전에는 죄를 기억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율법 하에서는 죄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덕분에 하나님은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아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셨기에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로를 의롭고 신실하게 대하시므로 하나님이 우리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행을 벌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러습니까? 우리의 악행을 모두 사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만족하면서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서 의롭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충족하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벌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처벌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를 선포하였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행을 3-4대까지 벌하시고 은혜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악행을 용서하십니다. 이 차이점을 아시겠지요?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 덕분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 분명히 아시겠지요?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시기 전인데도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에 이미 대물림의 저주를 언급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시겠습니다.
렘 31:29⇒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여기서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이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이 구절은 잠언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죄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내용입니다. 자녀에 대한 저주이지요. 여러분이 신 식초를 맛보거나 신 포도주를 먹으면 인상이 찡그러집니다.
불편한 표정입니다만 아버지가 신 것을 먹고 불편한 것을 자녀가 그대로 느낀다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새 언약 덕분에 이 저주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그 때에” 신약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은혜와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식이 벌을 받는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예언한 것입니다. 은혜와 새 언약의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죄로 대물림의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마지막 아담이 오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자유롭게 하신 것도 아주 멋있게 하셨습니다. 30-31절을 보십니다.
렘 31:30-31⇒30절: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31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자기 죄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뜻이고 그러나 “그 날에는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악행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물림의 저주에서 자유롭게 된 그 문맥을 잘 살펴보시면 새 언약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두운 저녁에 태양도 그 빛을 잃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창조주께서 고난을 겪으셨기에 예수님이 하늘과 땅 사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요한 복음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9절을 보십니다.
요 19: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신 포도주는 신포도로 만듭니다.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의 일입니다. 30절을 보십니다.
요 19: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를 조상의 죄로 인한 저주에서 해방시키신 일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왜 예수님이 마지막에 신 포도주를 마시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지를 몰랐습니다.
신 포도주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을 어렵게 만들어 구원은 너무나 어렵고 타락은 아주 쉽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 성경은 구원이 아주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할아버지가 의식 불명으로 병원에 계실 때에도 예수님이 만나 주실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할아버지에게 중국어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모든 언어가 가능하시니까요.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저의 외갓집에 할머니 한 분은 외 할머니는 아니고요 촌수가 먼 할머니 한 분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분은 교회에 가 본적도 없고 교회에 발을 들인 적도 없었고 하실 줄 아는 언어도 광동어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광동어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믿기 때문에 성경에 이르길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 집안을 구원하실 문이 열린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저자인 사도 요한은 천국을 보았는데요. 수를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지옥을 보았을 때에 믿지 않는 자 등이 있는데 요한은 “셀 수 없다는”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말세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천국은 사람 수가 폭증하고 지옥은 사람 수가 급감할 것입니다.
복음의 혁명이 그 답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구원받으려면 이것도 포기하고 회개 마저도 은혜에 대한 반응이 아닌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면서 구원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양 옆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를 보세요. 예수님 옆에 두 강도도 함께 십자가 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서 죽으신 것은 여러분이 좌우 편에서 강도 당하지 않도록 구속하신 것입니다. 한 쪽의 강도는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옥에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예수님께 고백하길 천국에 가셨을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눅23:42) 그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영접 기도도 아닙니다.그 강도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 보혈의 죄 사함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그런 기도 대신에 그 강도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그곳에 구원이 어렵다 말하는 목회자가 없었기에 망정이죠. 그런 목회자가 그곳에 있었다면 강도에게 이랬을 것입니다.
”여보시오 구원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요 당신은 강도지 않소? 구원 받기 전에 훔친 것부터 돌려 주고 와서 그런 말하시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이렇게 말했겠지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할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은데 지금 움직이기가 곤란해서요”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하라는 등 복잡한 이론들이 있는데 그러나 성경에 나온 대로 믿으면 됩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한들 잘못된 것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적이 없으시죠. 예수님은 틀린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예수님께 아무리 구한들 “네 이놈 또 뭣 때문에 왔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절대로 짜증내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목사들은 짜증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늘 사랑하시고 늘 참아주십니다. 여러분 이렇듯 조상의 죄로 대물림 되는 저주는 늘 구약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논거로 삼습니다. 그 결과 눈치채지 못한 채 확실히 속박 아래 들어가게 되죠.
그 말을 믿으면 율법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릴 주제가 하나 더 있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 교회 분들은 남들과 구분되어 계십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계시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모르시는 많은 잘못된 교리들이 존재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천국에 간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많은 분들이 죽은 뒤에 자신이 천국에 왔음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모두가 자동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오해할 까봐 말씀 드립니다. 저는 “만인 구원설”은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위해 기도한 것도 하나님께서 열심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우편에 강도를 보세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구원은 비싼 값으로 산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통 받고 피 흘리고 죽음으로 산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쉽게 만드셨습니다.
”목사님도 물러터진 아가페 은혜주의자로군요” 물러 터져서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천국에 슬라이딩도 못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의 머리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 언약의 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겁니다
이제 영적인 것에 관해 말씀 드리면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여러분의 영에 관한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롬7:6) 율법과 은혜는 잘 알면서 “목사님,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잘 압니다”
구약의 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이 율법주의적일 수 있지요. 영이 잘못된 관점인 것입니다. 구약의 관점이죠. 율법과 은혜를 알면서도 말입니다.
”저도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얼굴은 마치 무척 신 레몬 주스를 마신 듯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요.
그래서 보기가 안쓰럽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웃지도 않고, 편안해 하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보기에 안쓰럽습니다. 이런 분은 구약의 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란 마을에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을 배척했고 유대인 역시 사마리아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야고보와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구약 시대는 그랬거든요. 구약 시대에 바로 그 도시인 사마리아 땅에서 선지자 엘리야 시대에 열왕기 하 1장에 보시면 나옵니다. 100명의 병사가 50명 50명씩 엘리야를 잡으러 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구하니 이 병사들이 모두 불에 타버려 죽는 사건이 사마리아 땅에서 일어났습니다.(왕하1:10) 바로 야고보고와 요한이 엘리야처럼 “불로 저들을 멸할까요?”라고 물은 것은 사실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에 기록된 전례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구약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시대에 살았던 엘리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돌아보시며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무슨 영으로부터 말하는지 모르는 구나!” 영의 문제인 것입니다. (첨가: 킹제임스 흠정역)
눅 9:55(킹흠정역)⇒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영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멸망시키려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반면에 율법 시대인 엘리야는 저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서 예수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첨가: 율법의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로 모셨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섬겼고, 예수님과 밤낮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영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율법 주의적인 영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영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롬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라고 했는데 “양자”를 “아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어에는 “아들”로 나와 있습니다. “후이오스” “후이오테스”아들의 영입니다. “후이오스”는 성숙한 아들을 뜻합니다. 다 자란 아들이죠. 헬라어로 “테크논”은 젖 먹는 유아들 뜻합니다. “어린 자녀”를 뜻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후이오스”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주의적인 영을 가졌는지 알려면 하나님을 얼마나 자유롭게 부르는지를 보면 앎니다. “아빠”는 히브리어로 “아바”이고 영어로는 “대디”라고 부르죠.
이 호칭만큼 친근하지 못하면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다시”라는 말이 왜 들어갔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다시”라는 말이 율법 아래 있었을 때 가졌던 영을 뜻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졌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이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으면 나는 죽을 거야! 고난 받을 거야!” 이것이 바로 종의 영이고 많은 성도들이 아직도 이런 영 아래에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우리는 이 종의 영을 다시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종의 영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첨가: 감히 어떻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5:11)]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감을 느끼고 잘못하면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표현은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가 보시면 이 전 예배시간에 제 이스라엘 친구가 한 명 왔었는데요. 그 친구가 고개를 끄덕 끄덕하더군요.
이스라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느냐 하면 우리가 “아빠, 아빠,라고 부르듯이 그 아이들은 “아바 아바”라고 부릅니다. “아바”는 아주 친근한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아바, 아빠, 아버지”다 가족 같은 느낌이죠 아주 친근한 아빠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엘로힘”하나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신 여호와 하나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엘 샤다이”하나님 그런 분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이 알려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다 하셨죠. 요한복음 17장 6절을 보십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여기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내신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엘 샤다이”는 유대인들이 오래 전부터 알던 이름입니다. “여호와”도 구약 시대부터 알던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이름은 바로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부르십니까? 하나님을 친근하게 느끼는 마음을 따라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 하나님이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엘 샤다이”입니까? 하나님이 “엘로힘”이고 또 “아도나이”이십니까? 맞습니다.
이 모든 이름의 주가 되십니다. 전에 언젠가 하나님의 이름을 설명해 드렸지요. 그 이름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엘 샤다이, 엘 샤다이” 그러나 개인적으로 부를 때에는 이런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는 이런 이름들을 써도 됩니다. “아도나이” “엘로힘”은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는 명칭이니까요. 누가 “전능하신 하나님”하면 아! 저분이 내 아버지시지 누가 “여호와” 또는 유대인이 “아도나이”라고 부르면 아! 저 분이 내 아빠시지 라고 하세요.
하나님은 아들의 영을 원하십니다. 누가 뭐라 든 이 아들의 영을 빼앗기거나 다시 종의 영으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잘못된 영입니다. 아멘!
제가 이 교회 담임 목사인 것도 맞고, 제가 책의 작가인 것도 맞습니다. “다스리는 삶”이란 책을 썼으니까요 모두 저를 부르는 호칭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집에 들어갔을 때 제 자녀들이 제게 달려 와서 작가님! 하고 달려와 안긴다면 저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저를 부르는 호칭이 분명 맞습니다.
하지만 제 딸이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그 느낌이 무척 다릅니다. 뭔가 다른 느낌이고 가깝지 못한 느낌이죠. 저를 부르는 호칭이 맞지만 “아빠”만큼이나 가까움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아내는 저에게 프린스 목사님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느낌이 확 달라지죠. 아내에게 뽀뽀하려다가도 “프린스 목사님”하면 왠지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목사인 것은 맞지만 가족 간에 호칭이 아니니까 친근감이나 가까움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손을 들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그 영은 하나님께 자유로인 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유로인 받는 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 친근함이 더해집니다.
한 가지 더 설명해 드리자면 가족들은 남이 가지지 못한 특권을 가진 관계입니다. 제 딸이 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런 모습을 보면 남이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아빠 오랜지 주스 마셔도 돼요?”- 그래, 치킨 소시지 먹어도 돼요?-그래, 밥 조금만 더 먹어도 돼요?- 그래, 뭔가 이상한 것 맞지요?
가족 간에 학대 당하는 느낌이 들죠. 학대의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제 자녀는 먹을 때 자유롭게 먹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족이니까요.
사실 때로는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한마디면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의 경우는 자라온 환경상의 이유로 아버지가 자녀를 신체적으로 학대하며 자란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감정적으로 언어상으로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자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르면 육신의 아버지의 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일반적인 아버지보다 훨씬 더 선하심을 모릅니다. 진정한 아버지시지요. 그런 분들은 주님께 그 마음을 치료해 주실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나온 통계로 기억합니다만 그 통계에 의하면 감옥에 수감된 사람 중 대다수가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대다수가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던지 감정적으로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랐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했어도 감정적으로 부재했던 것이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아의 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고아의 영을 소유하면 사랑을 갈구하게 됩니다.
단지 수감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일반이라고 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비슷합니다. 우리 중 대부분도 가정을 살펴 보면 가정에 아버지가 존재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아버지가 부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부재감이 건강과 정신건강에 영향을 줍니다. 감정적인 건강과 신체적인 건강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 점차 회복되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로다”였습니다.
모든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말을 들려 주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며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지지 하거나 우리를 북돋아 주지 않았죠. 아버지 되신 여러분 여기 보세요.
아버지 날에 설교했으면 좋았겠지만 상관 없습니다. 저는 절기에 맞춰 설교하지 않으니까요. 아버지들 잘 들으세요. 마귀는 말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폐나 심장 속에서 얼마나 자녀를 사랑하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야 얼마나 사랑하든지 간에 겉으로 말 안 하면 쓸모가 없어요.
표현을 안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귀는 이를 두려워합니다. 하나님도 말로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라” 모든 자녀들이 이 말을 들으며 자라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도 마귀를 이기는데 성공했습니다. 아멘!
자녀가 말을 안 들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를 불러서 야단 치지요. “아들아! 너는 강건한 전사이고 위대한 정복자 하나님의 사람인데 왜 원숭이처럼 굴고 있니?”
자녀에게 비젼을 주세요. 하나님이 창조하심을 보면 그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에서 딱 정확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 가까웠으면 타 죽었을 것이고, 더 멀어졌으면 얼어 죽었겠지요.
사람들은 낮과 밤 속의 지혜와 모든 자연이 시계처럼 정확한 것을 봅니다. 우리의 몸의 동작에도 지혜가 있지요. 심장도 자연스럽게 뛰고 우리가 명령하지 않아도 혈액이 돌죠. “혈액아 이제 움직여라”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보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몸이 낫기를 원하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상처가 나면 몸이 저절로 낫거든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피를 더 흘리고 죽게 놔 두셨겠지요. 우리의 몸만 봐도 인간의 부실한 신학과 반대됩니다.
어떤 분들은 질병의 치료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하는데 우리 몸만 봐도 안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은 “가이아”라고 부릅니다. 대자연의 어머니가 “가이아”래요. 그게 도대체 무슨 이름입니까? 어머니란 없어요. 어머니가 지구를 창조한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아버지가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버지가 없는 세대여서 그러합니다. 생각해 보면 놀랄 것입니다. “대자연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왜 “대자연 어머니”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아이가 어머니와 더 친하게 커서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따듯하고 아버지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대자연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주 놀라운 발견입니다. 저 자신 조차도 이를 믿으며 자랐는데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성도가 감정적으로, 성격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미숙한 성도에서 성숙한 성도가 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나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이죠.
이러면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제가 지금 보여 드릴 구절입니다만 “율법 아래서 어린 자녀”는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율법 아래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녀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로 “테크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구속하고 죽으시며 자녀 됨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으면 아들이 됩니다. 상속 받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뜻을 모른 채 유대인에 대한 내용이며, 문맥이며, 그 뜻은 모두 무시하고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성숙해지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갈라디아서 4장 1절입니다.
갈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까? 여러분이 수백만 장자여서 차고에 최고의 고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어도 여러분의 자녀가 4살이면 그 차를 몰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급한 일 때문에 뭐가 필요해서 누구를 시켜서 차를 몰고 가져오라고 시킵니다.
집사가 차를 몰 수는 있어도 아들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아들이 어린 동안에는 여러분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죠. 이해 되십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라면 다 성장하기 전에는 누리지 못하니 종의 삶과 크게 다를 것이 없겠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인용해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 하는데 그러나 이 구절은 영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읽으면서 문맥을 보시겠습니다. 2절입니다.
갈 4: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 갈라디아서의 구절은 율법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선생으로서는 여기서 말씀하는 대로 후견인과 청지기입니다. 3절을 계속해서 보십니다.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여기서 “어렸을 때”란 헬라어로 “테크논” 유아기였을 때 즉 율법 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 나오는데 율법을 뜻합니다만 나중에는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부릅니다. 계속해서 4-5절을 보십니다.
갈 4:4-5⇒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05절: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서 아들은 “후이오스” 성숙한 아들입니다. 즉 우리가 율법아래에 있을 때는 “테크논” 어린 자녀여서 상속할 수 없어 종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었으나 어린 자녀였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서 속량하시고 무엇을 주셨다고 했습니까? 아들의 명분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후이오스”성숙한 아들의 명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가 성숙한 아들이 됩니다. 계속해서 6절을 보십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영이란 이렇듯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지 없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을 부를 때에 휘황찬란한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부른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즉 구약의 영을 가지고서는 새로운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된 가죽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담는 격입니다.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친근하게 느껴지십니까? 때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기도의 전부입니다.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찬양하며 “아바”라고 부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회사 다니면서 스트레스 받고 엄무 부담이 클 때 화장실이든 조용한 곳에 가서 “아바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하고 부르세요. 그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동료들이 경제 침체를 논하고 경제가 언제 좋아질지를 말하더라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 안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만 밝히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말하실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요한복음 17장 11절입니다.
요 17: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알려 주신 이름은 “아버지”입니다. “보전”이란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아버지라 부르면 보호를 받습니다. 아들의 영, 새 언약의 영을 받은 자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습니다. 다음 구절인 12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들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족되심을 밝히시고 아들의 영과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7: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종과 율법의 영에 사로잡혀서 이럽니다. “하나님의 눈에 좋은 것이 인간의 눈에 좋지 않을 수도 있지! 백은 흑이요 흑은 백이니라” 우리를 헷갈리게 할 뿐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 했는데 하나님께 좋은 것이 우리에게 좋지 않을 수 있다니 그럴리가요. 악한 자가 주는 것이 좋은 영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은 앞서 말한 영적인 것과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하신 말씀이죠.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그건 모르죠 아들이 떡이 아니라 돌을 원하는 겁니다. 돌이 좋은 거에요”
아들이 떡을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것은 문맥상으로 살펴보면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하셨습니다. “아니, 생선은 네가 생각하기에 필요하다고 한 것이지 네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잘 안단다 너에게는 뱀이 필요해!”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유머 감각까지 섞어서요. 이 이야기를 군중들 앞에서 하셨을 때 다 같이 웃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지도자들이 헷갈리게 하고 흑을 백이라고 하고 백을 흑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혼동시켜서 아무도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아버지가 돌을 주겠느냐?” 예수님이 왜 이러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서글픈 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세례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주이시고 주님께는 기쁨이 넘칩니다. 주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아멘. 이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선물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여기서 “하물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면서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녀 대신에 내가 아프고 싶다 하시지요. 어떤 분들은 자녀가 다치느니 내가 다치고 싶다 하십니다. 아멘! 완벽하지 못한 부모도 이러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한 것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주십니다. 예배 말미에 아버지께 이번 주에 좋은 것을 주시길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바이러스에서 지키실 것입니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와서 “당신이 뭐라도 된다고”라고 말해도 누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설명할 시간도 없어요.
여러분이 제에게 뭐라고 하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에게 좋은 것을 구할 때 우리를 지켜달라고 구할 때 좋은 것을 더 구하시기 바랍니다. 원문에는 “좋은 것들”이라고 했거든요. 좋은 것을 하나 더 구하세요 부유함이 어떨까요?
여러분이 지금 얼마나 경기 침체로 고생하는 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과거이고 이제는 하나님께 선물을 구하십시오. “아버지! 우리 회사에서 제가 번영하고 잘 되기를 구합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축복을 받을 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가족입니다. 하늘에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아멘! 여러분은 기도하기 힘들었던 적 있으시죠? 시계를 보고 한 시간 기도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기도는 열심하고 시간을 보니 5분만 지났을 때….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사랑 받는 것을 기뻐하며 아버지라 부르며 무릎 꿇는 것 혼자 있는 공간에서 방이든 차 안이든 여러분의 눈을 감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길고 어려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중언부언하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아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누리며 구원 받았다는 감격을 가족이 된 기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보십니다. 그렇게 기도하시겠어요? 여러분 모두 눈 감고 고개를 숙여 주세요
지금부터 할 기도는 오늘 여기 오셨으나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악행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셨습니다.
우리가 어긴 율법을 대신 지사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신 그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과 저주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우리 죄 사함의 증거로써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 양자의 영이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시므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던 지 영접기도가 필요하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에 모시고 싶으시다면 지금 이 기도를 따라서 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주님! 저를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사 십자가에서 저에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흘러 내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고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의 구세주가 되어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나는 완전히 죄 사함을 받았고, 온전히 축복 받으며 큰 은총을 받습니다.
저를 깊이 완전하게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절대로 다시는 아버지가 없는 고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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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설교
267강 “저주와 고아의 영에서 벗어나라“
ha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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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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