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 팔랑마을 억새집을 다녀왔습니다. 몇 개월 전에 KBS 1TV '인간극장'에서 지리산 팔랑치 팔랑마을 김채옥 할머니가
소개되었습니다. '채옥씨의 지리산 연가'를 보는 동안의 감동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모부터 친할머니가 살아서 돌아오신 착각이
들었습니다.
김채옥 할머니는 지리산 팔랑치 팔랑마을로 열여덟 살에 시집을 와서 결혼 4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남원 시내로 나가서
아들을 키우다가, 20년 전 다시 이곳 팔랑 마을로 돌아와 굽은 허리를 펼 사이도 없이 홀로 바쁘고 알찬 삶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200년 된 억새집이 편하다며 고집하고 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이 집에 대해 할머니는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이다가 녹으면 해발 700미터 지리산 자락에도 봄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억새 집의 지붕을
새로 얹는 일로 무척 바빠집니다. 해마다 초등학교 남자 동창의 도움을 받아서 억새 지붕을 새 옷으로 입혀줍니다.
무더위가 찾아오는 여름에, 할머니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일하러 팔랑치로 출발합니다. 뱀사골 계곡에서 더위를 피하던 어린
시절 계곡물에 목욕하던 할머니와 친구들은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고향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소녀 시절로 돌아가서 긴 무더위를
쫓아내기도 합니다.
녹음이 우거졌던 지리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더욱 바빠집니다. 도토리와 알밤을 주우러 다니느라 아침 일찍 산을 오르고,
오후엔 아들에게 보내 줄 들깨를 수확합니다. 김장하는 날에 아들과 암 투병중인 며느리가 김장을 도우러 왔습니다. 외아들에 며느리도 한 명
뿐입니다. 소중한 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온 몸을 졸이며 전전긍긍했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 중인 며느리가 할머니는 고맙기만
합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지리산의 산짐승처럼 할머니 역시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팔랑 마을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얼어붙어 고립지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리 고로쇠 호스를 점검하러 산에 오르고, 산짐승을 위해 도토리며 사과며 먹이를 뿌려놓고
옵니다.
높은 지대에 살다 보니 버스도 다니지 않고 택배 수거차와 가스 배달도 어려움이 많아서 답답한 마음에 운전면허를 취득해서 직접 경차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 생각에 스스로 운전을 해서 학원을 다니며 레슨을 받는 할머니는 건반 연습도 열심입니다. “산을
짊어지고 살아 내 허리가 이렇게 굽었나 봐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시인이 꿈이라고 합니다. 컴퓨터를 배워서
블로그로 소통중이며 피곤해도 저녁마다 일기를 열심히 씁니다.
할머니를 빨리 뵙고 싶은 생각으로 억새집을 찾아서 묵과 파전을 안주로 동동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할머니께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자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마루에 앉아서 할머니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바쁘신데 죄송하다는
말씀에 얼마든지 사진 찍어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동안 방송 출연 횟수가 10여회 이상이었지만 순박한 시골 할머니 그대로여서 기쁘고 마음이
놓였습니다.
억새집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팔랑치에 올랐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날이 빨리 어두워지니까 적당히 가다가 내려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적은
양이지만 동동주를 먹은 때문인지 숨이 찼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걱정하실까봐서 잘 다녀왔다고
인사를 드리러 가니, 고사리를 꺾으러 나가셨다고 안 계셨습니다. 그렇잖아도 우리를 기다리셨다고 해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른 집은 넓고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있지만 정리되지 않고 낡은 억새집에만 손님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향수와 그리움을 붙잡아
주신 할머니를 뵈며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한 가지 바람은, 굽은 허리로 동동거리며 한 시를 쉬지 않으시던데, 조금만 더 자신의 몸을 챙기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그 자리에 계셔주기를 소망해봅니다.
기사입력: 2017/06/06 [14:22] 최종편집: ⓒ 광역매일 http://www.kyilbo.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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